사랑하는 심재원 성도님께,
가슴 깊히 다가오는 편지! 고마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에게는 님께서 보낸 편지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목사에게 실망했으면 돌아서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눈물이 담긴 정성어린 편지를 써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목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호소해 주시니 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엡 4:15)는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님의 편지 속에서 오히려 부드러운 목회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제가 마치 양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님의 목사에 대한 마음과 자세로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성도를 접근하면 저도 좋은 목자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듭니다.

저도 사실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목을 길게 늘이고 앉아있는 성도들에게 예리한 칼을 휘두른 경험이 매우 많은 전과자입니다. 저의 칼에 맞아 피를 철철 흘렸던 분들의 얼굴과 눈망울들을 떠올려보니 제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이는군요.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차이를 진실로 구별하는데 참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도 날마다 주님 앞에 부서지지 않으면 어느새 바리새인이 되어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가장 구체적인 차이는 각각에 대한 연약한 죄인들의 반응에서 드러납니다. 세리와 창기로 대변되는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거룩했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만 같이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외적 기준을 제시하고 요구만 할 뿐 그 심장에는 죄인들을 향한 따스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는 현격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12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좋아해서 가족들도 잊어버린 채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 당시 신학적 석학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사십 일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신 분입니다. 새벽 미명이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기를 즐거워하시고 때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경건한 삶을 사신 예수님을 어떻게 범인이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거룩해 보이는 바리새인을 그렇게 무서워했던 죄인들이 예수님만 보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식사자리나 말씀을 하시는 자리에는 죄인과 세리들로 가득 하곤 하였습니다(눅 15:1-2). 예수님이 진리를 타협하시고 요즘도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르는 소위 기복신앙을 전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날카롭고 가슴 섬뜩한 부분이 많습니까? 예수님은 사역 초창기부터 매우 엄격한 말씀을 가르치셨음이 산상수훈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아무리 『예사모』를 조직해서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열광적으로 따른들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면 국물도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눅 6:46-49)? 그런데 어찌 도덕적으로 엉망진창인 죄인과 세리들이 겁도 없이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따랐을까요?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뭔가 큰 죄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착각입니다. 그 신비의 비밀은 예수님의 마음이었지요! 예수님의 가슴에는 죄인들을 향한 동정과 사랑으로 언제나 충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 우시는 사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눅 19:41-46). 그 성에는 예수님을 끝없이 비판하며 죄인으로 몰아붙였던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중심거점인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지도자들이 진정한 평화의 길을 깨닫지 못하여서 곧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예수님의 가슴에서는 눈물이 북받쳐 올라온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 중에서 이 부분이 본받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부터 하나님께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비판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도 예수님처럼 울게 해주십시오. 다윗처럼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지 않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게 해 주십시오(시 119:136)". 요즘 이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을 종종 느끼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곤 합니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느헤미야 같은 눈물의 사람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과 실천을 잃어버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져 버린 예루살렘 성 그리고 그 가운데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동족을 위하여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금식하며 회개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 드린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심장에는 하나님과 죄인들을 향한 깊고 따뜻한 사랑이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이런 사랑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일어나면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심재원 성도님,
우선 제가 먼저 느헤미야 같은 목회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 이런 인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해 주시겠죠? 그리고 심재원 님 편지에 대한 답글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모든 소유를 버려 세속을 완전히 등져야만 진정으로 위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분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짧은 답글에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우선 성도님의 글에 대해 저의 느낀 점을 담아 보았습니다.

다만 무소유와 독신의 삶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라는 점, 그리고 무소유를 지향하고 독신으로 산다고 해도 더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고 오늘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의지하여 항상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정진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음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 말씀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는군요. 편지 정말 고마웠습니다. 주님의 포근한 사랑과 위로가 님의 삶에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주 안에서 박득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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