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인홀드 니버> 이상원 저/ 살림출판사 ⓒ뉴스앤조이
칼 폴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년 6월 21일 ~ 1971년 6월 1일)는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 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킨 개신교 신학자다. 그는 미국 미주리 주 라이트 시(Wright city)에서 독일 선교사인 구스타프 니부어(Gustav Neibuhr)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스타프 목사는 복음주의 개혁 교회(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의 신학을 따르는 북미 복음주의 시노드(Evangelical Synod of North America)의 목사(Pastor)였다.

훗날 니버는 동생인 헬무트 리처드 니부어(Helmut Richard Niebuhr)와 함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니버는 일리노이 주의 엘름허스트 대학(Elmhurst College)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으며, 후에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 있는 에덴신학교(Eden Seminary)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1914년 신학사 학위(Bachelor of Divinity Degree, 약칭 B.D.)를 받고 알파 시그마 파이회(Alpha Sigma Phi Fraternity)의 회원이 되었다. 그가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915년이다.

무엇보다도 니버의 윤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니버에 의하면 기독교 현실주의란 "윤리가 진정으로 기독교적이기 위해서는 윤리 자체가 삶의 실재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해답을 줄 수 있는 윤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버의 고민은 기독교의 진리(윤리)가 삶의 현장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접목될 수 있는 윤리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무엇보다 니버는 성경의 진리에 기초한 인간의 이해를 다시금 재검토해야만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언제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윤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그의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통해 세가지 인간관에 대해 논하였다. 이는 아래와 같다.

"첫째는 고전적인 인간관이요, 둘째는 기독교적 인간관이다. 그리고 셋째는 근대적 인간관이다."

니버는 '고전적인 인간관'과 '근대적인 인간관'의 문제점을 제시하는데, 먼저 고전적인 인간관의 문제점으로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합리주의'와 '이원론'을 거론하였다. 나아가 근대적인 인간관의 문제점으로는 근대적인 인간관은 '고전적인 인간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의 조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이와 같은 조화는 두 인간관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본성의 내적 대립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나아가 인간의 개체성(individuality)을 상실토록 하였고, 또한 악의 문제를 너무나도 낙관적인 입장에서 다루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니버는 기독교적 인간관 즉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 속에 있는 악의 진상을 보여 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또 한 가지의 과제는 기독교적 신앙을 현실 세계에 실재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고민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 현실주의'라는 대안을 찾도록 이끌었다.

니버는 자신의 책 <기독교 윤리학>에서 '정통주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취하고 있는 윤리에 대한 방법론 및 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니버는 "먼저 기독교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실패한 원인은 예언적인 종교의 변증법을 버렸기 때문이며, 이러한 현상은 결국 시간성과 역사성을 영원이라는 영적인 차원에만 가두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상대성들에 기독교의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아마도 필자가 보기에 니버가 말하는 전자의 영역은 정통주의적인 기독교의 연약함을 가리키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계속해서 니버는 정통주의적인 기독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주의적인 기독교보다는 우월할지 몰라도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때문에 니버는 기독교 현실주의를 논하면서 진정한 기독교는 삶의 차원들에 대해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정치인의 현실 감각이 도덕적 선지자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될 것이며, 역으로 도덕적 선지자의 이상주의가 인간의 현실적인 집단생활과 교류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이는 도리어 도덕적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니버가 말하는 개인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이며, 나아가 사회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니버는 사회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사랑'은 모든 정의의 규범적인 원천이며, 궁극적인 관점이라고 언급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언급과 아울러 니버 자신도 이러한 사랑의 이상으로부터 사회적 윤리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제시한 기독교적 인간관에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죄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기인한 그 어떠한 사회 역시도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결국 니버 자신도 '사랑'이라는 윤리의 원리를 환상으로 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사랑'의 근사치인 '정의'에 대해서 동시에 논하는 것이다. 니버는 그의 모든 저서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정의를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전제하고 자신의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다시 말해 니버에게 있어서 '정의'는 사회 안에서의 '사랑의 법의 근사치'로 이해되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사랑과 정의의 관계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필자가 볼 때에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 윤리의 현실적 적용에 대해 엄청난 고민과 아울러 크나 큰 업적을 남긴 학자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 가지 그에게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면 그가 힘의 균형을 위하여 또 다시 힘의 사용을 권장한 부분이다. 물론 이 내용은 필자가 본 글에 싣지는 못했지만, 니버는 사회 속에서 힘이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다시금 힘의 사용이 필요함을 지지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와 같은 그의 견해가 진정한 정의가 아닌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음에 대해 문제성을 지적하는 바이다. 무엇보다 니버는 필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우리 모두는 그의 수고로운 애씀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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