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미 한번 시키는 데 2천 5백만 원이나 든대요."
"와! 대단하네요. 새끼 한 마리에 얼마나 되는 데요?"
"최소한 백 오십만 원은 된데요"

왕관 마크를 붙인 깜찍한 옷을 해 입은 하얀 개가 누런 개와 이리저리 뒹굴며 장난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 '개 전문 성형외과'도 생겼다 하고, 개 전문 호텔도 생겼다 하더니만, 우리 교인 말을 들으니 개 장례 예식장도 생겼다나.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그런 문화 속에서 사는 분들의 옆에 우연히 앉게 되어 그분들의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자 하니 내가 꼭 원시 미개사회에서 온 외계인 같은 생각이 들다.

좀더 멋있어지겠다고 성형외과를 찾은 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와 앉아 있다. 콧날을 좀 높이려고 온 이, 눈썹을 쌍꺼풀로 만들려고 온 이, 턱 뼈를 깎으려고 온 이, 넓적다리와 종아리 살을 빼려고 온 이-----.

수술실에서 무엇을 하나 하고 문을 살짝 열어 보니 아이고머니나. 어떤 여자가 가슴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아마 가슴이 작아서 가슴을 열고 실리콘 고무주머니를 넣는 모양이다.

원장실 방에 가니 저희들끼리 놀다가 나를 따라온 강아지가 자꾸 창문 곁으로 올라가려 하여 왜 그러나 했더니 창틀 밑에 웬 뼈 깎아 논 게 그렇게 많은가. 알고 보니 사람들의 턱을 깎아 논 뼈들을 모아 논 것이다. 그러니 개가 그 냄새를 맡고 환장하는 게 아닌가. 비싼 개라 품위가 있는 줄 알았더니 개는 역시 개일 뿐이구나.

얼굴 좀 멋있게 고쳐보고 몸매 좀 아름답게 만들어보겠다고 상담하러 오는 분들이 줄을 잇는다. 나도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뭐 좀 고쳐 보려고 온 사람 같다. 광대뼈도 좀 깎아 내야 하고 주름도 지우고 점도 빼고 비쩍 말랐으니 가슴에도 실리콘 백을 넣어 살 좀 붙이고 허벅지와 다리에도 살 좀 붙이면 견적이 제법 나올 것 같다. 가능하면 키도 한 자쯤 더 크게 하면 어떨까. 허벅지와 다리 살을 빼는 데 최소한 큰 거 한 장은 든다 하니 낡아빠진 이 몸뚱이를 수리하려면 큰 빚을 내야 되겠으니 헛된 공상일랑 하지 말아야겠구나.

얼마 전 나의 주변에 코가 낮다고 코를 좀 높이고 쌍꺼풀 수술까지 한 학생이 있다. 부모의 말을 빌리면 성형수술을 한 후 너무 사람이 달라졌다는 거다. 전에는 매사에 수동적이고 내성적이었는데 지금은 매사에 자신감을 갖고 사람들을 대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아주 좋아졌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형수술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것이 아니다. 얼굴 좀 만져서 성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인생이 변한다면 얼마나 큰 수확인가.

헌 집도 수리하고 헌 차도 수리하면 새로운 기분이 드는데 얼굴을 더 아름답고 멋있게 꾸미게 된다면 얼마나 더 자신감이 있어지겠는가.

2.
성형외과에서 젊은이들이 성형수술을 받고 있던가 혹은 기다리고 있던 시각에 강남 씨티극장 지하2층 4관에서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도시에서 살던 외손자가 두메산골 외할머니 댁에 잠시 맡겨져 살면서 외할머니와 도시 외손자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문화충돌 속에서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햄버거 피자 치킨을 먹으며 도시문화 속에서 자란 외손자 상우는 요강을 사용하고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사는 생소한 산골문화 속에서 심한 갈등을 일으킨다. 상우는 끝내 할머니를 괴롭히며 못살게 군다. 그러나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외할머니는 한번도 노한 마음을 품지 않고 외손자를 위해 갖은 희생을 다하며 헌신하신다. 마침내 상우는 할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시골생활에서의 모든 문화충돌을 극복하고 할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할머니와 헤어질 때 상우는 서운해 눈물을 금치 못하며 차창을 통하여 멀리 사라지는 할머니에게 아쉬운 듯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한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를 위해 할머니가 아프시거나 보고싶으실 때 꼭 편지를 보내라고 당부한 상우 자신이 스스로 쓴 엽서를 할머니에게 건네주고 할머니와의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는 손짓이 차창 밖으로 비춰지는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니 내 주위의 관람석에 앉아 있던 여자 분들은 거의 모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다.

외할머니와 상우가 서로간의 문화충돌을 극복하고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외할머니의 사랑이었다. 디지털 전자혁명의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 사회는 빠른 변화의 속도에 의하여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 많은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다. 남자 청년들이 머리에 물을 들이고 귀고리와 팔찌를 차고 성형수술을 하고 손에는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귀에는 핸디폰의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모습을 기성세대들 중에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서는 무조건 그들의 문화를 배척할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포용하며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상우 외할머니처럼 모든 것을 이해하여 줄 때 비로소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의 염려하는 마음을 그들의 마음에 담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수백만 원짜리 강아지를 끌어안고 성형수술을 받기 위하여 성형외과에서 대기하고 있는 청년들과 시골 풍경에 향수를 느끼며 <집으로>를 감상하고 있는 분들은 똑 같은 서울 한복판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갖고 동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다른 문화를 갖고 사는 분들은 아니다. 성형수술을 마치면 <집으로>를 보러 갈 수도 있는 분들이고 또한 <집으로>의 영화감상을 마치고 나면 성형수술을 받으러 갈 사람도 있다. 그들은 도시문화 속에 살면서 시골문화에 향수를 느끼고 또한 시골문화에 향수를 느끼면서도 도시문화에 젖어 살고 있다. 그들은 그러기에 서로 다른 이질 문화 가운데서도 싸우지도 않고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양쪽 문화를 너그럽게 포용하며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낸다.

상우 외할머니는 시골 오지의 노인이며 상우의 문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사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납한다. 상우 외할머니의 이러한 모습에서 아가페적인 예수의 사랑을 보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비종교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시골문화의 우월성을 이해시키려하기 보다는 도시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이해시키고 싶어하는 모습도 보인다.

도시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허덕이다가 겨우 살 자리를 마련한 후 친정어머니에게 잠시 맡겨 두었던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향하는 상우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작가는 서울문화가 시골사람들이 배척해야만 하는 문제점투성이의 사회가 아니요, 그래도 살기 위해서 택해야 하는 길로 묘사하고 있으며 서울과 시골 모두가 중요함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여기에서 우린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성(聖)과 속(俗)을 지나치게 구별하지 말아야 된다고 한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도시문화와 시골문화는 서로 배척해야 할 문화가 아니다. 시골은 우리의 부모가 사는 곳이고 서울은 우리의 자녀가 사는 곳이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모든 문화의 갈등을 넘어설 수 있을 게 아닌가. 도시(과학)는 자녀들을 자유분방하게 길러내고 시골(자연)은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감싸안아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한다. 변화하는 세상은 우리들의 자녀를 마구 허둥대게 만들지만 신앙은 사랑으로 그들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것과 상통하는 게 아닌가. 그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힘이 아닌가.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문화적 감각이 필요한 때이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문화환경 속에서 내 생각과 경험과 상식과 안목으로만 세상을 읽고 인간을 판단해서 젊은이들과의 심한 세대차를 내기보다는 종교적인 관용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표면문화(surface culture)에 들떠있는 젊은이들을 심연문화(deep culture)로 안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쌍꺼풀 수술을 마친 우리 교회 젊은 집사님이 마음까지도 더 예쁘게 변화되어 전보다 더 자신감 있게 세상을 살고 더 이쁘고 은혜로운 성도의 삶을 살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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