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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열정과 성서 오남용
비판이 두려우면 교주가 되라
  • 정용섭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0.09.03 16:24

김홍도 목사가 2010년 8월 22일 주일 낮 예배에서 선포한 설교 '주의 종과 성도의 신앙생활'을 텍스트로 읽고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교를 접한 건 처음이다. 설교를 접하고 다가온 전체적인 느낌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로 구분하겠다.

하나는 금란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키운 목회자의 명성에 걸맞게 설교의 카리스마가 돋보였다는 사실이다. 청중들을 자신의 설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내용도 단순 명료하고, 전달 방법도 직설적이어서 청중들에게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요소들은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들로 설교자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고는 이런 카리스마는 확보되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설교가 끝난 뒤에 내 영혼이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금 간략하게나마 내 입장을 해명하려고 한다.


위 설교에 은혜가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케리그마가 빠진 설교였기 때문이다. 성경 공부나 직분자 교육이라면 모르겠으나, 주일 낮 예배의 설교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한 순서인 설교는 바로 그 사건을 선포하는 일이다. 위 설교는 한결같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고, 비방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김홍도 목사도 당신의 설교가 주일 낮 설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설교는 평생에 처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도 위의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신자들이 복 받는 길을 막으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복 받는 방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위 설교는 공허하다.

복과 화, 축복과 저주라는 이원론적 구조가 김홍도 목사의 설교를 끌어가는 패러다임이다. 한국교회 설교의 일반적 행태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부분에 예민하고 취약하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의 오늘 운세가 나빠 보인다" 하고 말하면 누구나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포교하는 종파의 신도들을 간혹 만날 수 있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내리시는 화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런 구절은 모두 고유한 '삶의 자리'가 있다. 그것을 놓친 채 겉으로 드러난 구절을 그대로 청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파멸의 위험성이 있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놓치고 대신 세속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의 포로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없으면 결국 성서는 죽는다. 성구를 나열하고 예화를 나열하는 게 설교는 아니다.

위 설교에는 성구가 많이 나온다. 각각의 성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문제는 그것을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위 설교에서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나타나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주의 종이 아무리 큰 잘못을 행했어도 멸시하거나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술 취했던 노아, 처자식이 있는 몸으로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들인 모세, 밧세바를 범한 다윗,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를 인용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어도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크게 들어서 쓰신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오늘 교회에서 목사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외쳤다. 이런 식으로 성서 이야기를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합리화된다.

김홍도 목사의 모든 주장이 무조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귀담아 들을 말도 있다. 목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래도 안 되면 혼자서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목사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자기와 생각이 다를 때마다 교회에서 파당을 짓고 모함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견뎌 낼 수 있는 목사는 없다.

카리스마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 인용한 성서 이야기를 근거로 목사에게 대들지 말라고 설교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공연히 트집을 잡는 신자는 많지 않을 뿐더러, 목사가 진리에 열린 자세를 갖춘다면 굳이 성구를 들이대면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질서가 자리를 잡는다.

개신교회(Protestant)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수직적인 질서보다는 말씀의 진리를 우선하는 종파가 아닌가. 감리교회도 그런 정신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문제의 핵심은 목회에 대한 반론 제기가 아니라 그 과정의 비민주성, 독단성, 비신학성이다. 목사는 비록 목회의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교회 안에서 문제 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두렵다면 교주가 되라.

위 설교에서 성구 인용이 설교자의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서 취사선택되고 오해되고 있는지를 한 구절만 구체적인 예로 들겠다. 위 설교의 성서 본문은 빌립보서 4장 16절과 시편 105장 15절이다. 앞의 구절은 주의 종을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한 근거로, 뒤의 구절은 주의 종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인용됐다. 뒤 구절의 내용은 다음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이 구절의 문맥을 살피면 이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에서 소수 씨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이방인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을 진술하는 시적 표현이다. 이를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소수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분의 특별한 방식으로 지켜 주신다고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기름 부은 자들' 아닌가. 거친 세상에서 외롭게 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 아닌가. 이 구절을 목사의 목회 절대권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는 것은 성서의 오남용이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인격적인 진정성이나 목회 열정에 상관없이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른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목회의 열정이 강한 것만큼 기독교의 근본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위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목사의 설교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 나왔다.

"
저는 심히 부족한 종이지만 47년 목회하는 동안 저를 거역하고 비방하고 공격하며 교회를 소란케 한 사람들은 후에 보면 10년 안에 아들이 죽거나 딸이 죽거나 손자가 죽거나 본인이 암으로 죽거나 많던 재산이 다 없어지고 알거지처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언급이다. 아무리 금란교회 설교 현장의 분위기가 특별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과격하게 공격적인 설교는 다른 데서는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 김홍도 목사도 아마 저 말에 확신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기억에 그렇게 각인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다. 선의로 해석하면, 자신이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신자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좀 심하게 과장한 것일지 모른다. 목적만 좋으면 수단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사랑이 지나치면 거짓말도 진리가 되는가.

위 설교를 접하고 난 후나, 지금 그 설교에 대한 느낌을 쓴 후나 똑같이 필자의 영혼이 불편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모든 목회 행위와 설교 행위가 용납되는 한국교회의 풍토를 우리가 어떻게,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단 말인가!

정용섭 / 대구샘터교회 목사 · 대구성서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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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50
  • 아르케아카데미 2010-10-16 22:05:41

    잘못된 성경 해석의 대표적 사례

    이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가 얼마나 암울한지를 보여 주는 단면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왜 거부당하고 무식한 종교로 치부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 핵심은 자신을 크게 성공한 목회자라고 자부하는 그 사람 자신의 비양심적인 문제가 심각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성경 말씀을 원래의 의미대로 알거나 가르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자기 임의대로 성경 구절을 적당히 꿰맞추는 식으로 이용하는 적당주의적 성경 해석의 관행적 폐습에서 기인하고 있음이 더욱 문제인 것이다.

    상기 설교는 성도에게 성경 말씀을 바르게 가르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워서 목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례로 볼 때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기 설교에서 인용된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은 어떤 것인가?

    ① [빌립보서 4장 16절]
    바울 사도가 자비량(自備糧)으로 이방의 각지를 다니며 선교할 때, 그에게 몇 차례 부조를 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하면서, 그들의 선행은 단순히 바울을 이롭게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성도 자신들의 열매 맺는 성숙한 신앙이 나타난 것임을 가르친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성도들이 이방 선교에 힘쓰는 선교사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칠 때 적용할 수 있다.

    ② [시편 105편 15절]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9~16절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초기 족장들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으며, 본 구절은 특히 창세기 26장 11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삭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깨달은 블레셋 아비멜렉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 그를 해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성도들에게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③ 목사가 각종 스캔들과 교회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고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을 때에도 성도는 그 목사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종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가?

    - 설교 내용 : 성도가 볼 때 문제가 많은 목사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시는 기름 부은 종일 수 있으며, 그 예(例)로써 구약 시대 의인으로 불리는 노아, 모세, 다윗의 실수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 신약 시대에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용서하시고 오히려 큰 사도로 사용하셨다.

    - 바른 해석 : 의인들일지라도 그들은 죄를 지었을 때 자신과 가족들이 끔찍한 고통을 당했고, 또한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았다.(겔 3:20) 그리고 구약 시대에는 비록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지라도,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기 때문에 죄를 범하기 쉬웠다. 그러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롬 6~8장)

    베드로의 경우는 그가 성령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오순절 때 성령을 받은 후에는 다시는 변절하지 않았다. 신약 시대 성도들도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으나, 만일 과오가 있다면 즉시 깨닫고 철저히 회개함으로써 용서받아야 하며, 다시는 유사한 죄를 저지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요일 3: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죄(세상 법상의 범죄를 포함)를 저지르면서 성도들을 괴롭히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목사는 주의 종이 아니라, 거짓 교사이며(요일 3   삭제

    • 파발 2010-09-13 16:13:07

      계속 선문답식 같아서 한마디 덧 붙입니다.저는 님의 글을 읽고 센스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 했습니다.같은 성경을 읽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생각 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겠습니다. jcj님은 성경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특별계시로 받아 들입니까? 그렇다면 욥기는 설화라고 믿습니까?

      제가 목사의 설교안에 갇혀있는 바보라고 말씀 하셨죠? 그리스도인들이 바보 같이
      알고 있는 교리 그대로를 주구장창 내 뱉는다고 하셨죠?....할말 없습니다.

      님이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생각 하신다면 욥의 나중 복이 어찌 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욥기 42:12~17
      "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중략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욥기 42장 12절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셨다는데 그것이 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새로운 관점이 우려 됩니다. 교회안에서 의문을 제기하면 죄인 취급한다고 하셨나요?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은 믿고 나머지를 의심해야지 기본적으로 말씀을 믿지 않는데 무슨 의문을 더한다는 것입니까?   삭제

      • 파발 2010-09-13 15:40:42

        역대기하 18장 18~21

        그러나 미가야는 계속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것을 똑똑히 들으시오!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하늘의 보좌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분의 양편에는 천상의 궁중 관료 전원이 서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물으셨습니다.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길르앗 지역으로 가서 라못을 공격하다가 전사하도록 하겠느냐?' 이때에 어떤 이는 이렇게 제안하고, 또 어떤 이는 저렇게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영이 여호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제게 `아합을 꾀어다 죽일 방법이 있습니다.' 하니 여호와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슨 방법으로 그를 꾀어다 죽이겠느냐?' 그 영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내려가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속이는 영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입에서 속이는 말만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아합을 꾀어 다가 죽인다면 성공할 것이다. 어서 내려가 그대로 하라!'

        마태복음 4장 1~10, 마가복음1:12-13, 누가복음 4:1-13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삭제

        • 파발 2010-09-13 15:25:16

          애초에 문제의 본질은 빌닷의 말이었지 욥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님께서
          문제를 욥의 축복 문제로 이끌어 갔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제가 표할 수 있는
          성의껏 대답을 해 온 것입니다. 제말에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요는 그 이후에
          왜 욥이 나중에 받은 복이 복이 아닌지를 님은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에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 라는 정식은 님의 말을 오도한
          것이 아니라 자칫 흐트러 지기 쉬운 논점을 정식을 세워 일반론으로 생각해 보고자 함
          입니다. 위의 정식에 님의 말이 포섭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님은 계속 해서
          어떤 설명이 아니라 주장만으로 문제를 회피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죽은 아비의 슬픔이 얼마나 큰데, 욥이 그런 와중에 나중에 받은 물질적 축복과
          자손의 축복이 제대로된 축복이냐를 님은 주장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이
          잘못 되었습니까?

          님이 저에게 제3자( 불신자 )를 통하여 '미친놈' 이라고 비난하였을 때도 간과 했습니다.
          "교회 담장 안에서만은 바보처럼 살아가는 " 바보라고도 빗대어서 말했습니다.좋습니다.
          제가 미친인간이며, 바보인지를 님은 지금에 논지에 비추어 제게 증명해야할 의무를 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것을 관용했기에 님에게 요구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또한 아직 끝나지 않은 주제가 욥의 축복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거론 하기전에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생각에서도 님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삭제

          • dogma 2010-09-13 15:17:38

            <사실 관계> 와 님 자신의 <(가치) 판단>.. 조차
            구분 못한다.
            <사실관계>란 욥기가 쓰여진 배경, 시대상황,
            전래 신화의 영향에 의해 어떻게 수집 편집되어
            성경책으로 변했는가, 하는 문제다.

            가치판단이란 절대진리로
            교육되고 세뇌되어 확신을 갖게 된 종교적 신념을 가르킨다.

            절대다수의 교인들은 사실관계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도 없다.
            다만 목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교육받고 세뇌당한
            종교적 신념에만 목매고 있다.
            사실이 드러나거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까지 없어질 줄 안다.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와 사단이 서로 대화하는 거 봤냐?" 그거
            "사실의 기록이냐? " 물으면 뮤조건 사실이라고 우긴다.
            맹신과 무식과 고집이 사이비적 믿음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무엇이든
            사실로 입증될 수 없는 건 신화일 가능성이 많다.
            단군교에서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너 곰이 마늘먹고 사람되는 거 직접 봤냐? 사실이냐?"
            물어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은
            종교적 맹신을 주장하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다.

            잘못된 믿음, 잘못된 가르침, 잘못된 설설교의 함정은
            자체 검증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증이나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물으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 바쁘다.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이단이나 불신자로 축축되는 종교가 있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미치광이 집단이 아니겠는가?

            목사에게 세뇌된 대부분의 목사교인들이
            논리와 이성 기능의 사용을 거부하고 무조건 믿습니다로
            사육되었기 때문에 간단한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다.

            그런 건 맹신이지 믿음이 아니다.   삭제

            • JCJ 2010-09-13 13:09:05

              잠시 욥기에 관한 이야기를 접어두고 다른 내용을 질문합니다.

              님께서는 dogma님이 욥기를 설화로 보고 있다고 해서 그분과는 대화를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내용중에 여러 부분이 고대의 설화나 혹은 고대의 기록과 유사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런 설화나 전승되어 오는 고대의 기록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기독교계에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왜 아닌지 그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기독교계에서는 많은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성경에 나타난 사건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역사적 유물과 고증들을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물증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보다 먼저 쓰여지고 고고학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른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반론을 펴는 주장에 대하여는 수용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 보아도 십계명에 관한 내용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성경이 쓰여지기 훨씬 이전인 수메르의 유물에서 발견이 되고 또 욥기와 매우 흡사한 내용이 고대의 기록에 나타나고 노아의 방주와 동일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내용이 많은 민족 설화 가운데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데 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를 반증하는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반론을 펼치지 않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왜 자신의 주장에 유리하게 보이는 자료는 채택을 하고 자신의 주장에 불리하게 보이는 자료는 채택을 하지 않을뿐 아니라 단지 '아니다' 로 일관하는 것입니까?

              고고학적 혹은 역사적 자료뿐만 아닙니다.

              이제는 심지어 과학까지도 동원해서 이런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성경에 나타난 여러가지 사실들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하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창조과학이라는 과학도 아닌 것을 가지고 창조에 관한 의문을 풀어내려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이성적으로 납득이 됩니까?   삭제

              • JCJ 2010-09-13 13:08:33

                제가 질문한 것은 욥기의 내용이지 욥기를 설화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욥기에 나타난 내용이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냐 아니냐의 질문일 뿐입니다.

                님께서는 공통점이 있어야 동의하면서 의견 개진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의할 내용이 있으면 의견 개진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동의를 못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논리의 전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이야 말로 동의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면 더 이상 대화하기를 거부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가 보는 시각이 나의 시각과 왜 다른지 알아보려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거나 아니면 그의 논점을 들어보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어떻게 하면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고 상대의 주장을 철회할 수 있는지만을 궁리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꺽어 누르려는 방법만 모색하면서 대화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님은 저의 주장을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에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라고 해석하십니다. 이것만 보아도 다른 이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저의 해석이 맞다는 것도 아니요 제가 욥기를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님이 말하는 해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님보다 성경을 많이 모른다 해도 이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님은 인간의 이성과 신앙은 충돌한다고 말하십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 어떤 인물도 이성과 신앙의 충돌로 고민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그런 상황을 보고 고민이라는 단어와 추측을 도입한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이지 그 사건에 있는 인물에게는 고민했다고 하는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님의 말대로라면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입니다. '신앙 없는 짐승'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님은 이런 부분들을 간과하십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이 말할 때에 그 어떤 의문도 지니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의문을 지니는 것이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에서는 죄처럼 인식되어져 있기 때문에 바보들을 교회에서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님이 바보란 말이 아닙니다. 원래는 바보가 아닌데 교회 담장 안에서만은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저항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잊지마십시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마치 죄로 물든 세상이 만들어낸 思潮처럼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가 한참 지난 이 시대에도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적 문화와 교리들이 이성적인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강요해 온 결과입니다. 즉 기독교가 오래 전에 일으킨 파도가 이제서야 현실속에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더 묻습니다. 이번에는 욥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의 자녀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묻습니다.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습니까?

                그들이 천국에 갔겠습니까 아니면 지옥에 갔겠습니까?

                자신의 아버지의 믿음에 대한 시험 때문에 다른 것도 아닌 죽음이라는 불똥이 왜 그들에게 튀어야 합니까? 이것을 가지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을 하시겠습니까?   삭제

                • 파발 2010-09-13 11:07:04

                  도그마님 님은 욥기를 설화로 보는 분 아닙니까?
                  저는 창세기나 욥기를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사실로 받아 들이는 맹신자입니다.
                  그러니 님의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구분에 대한 저의 의식 비판에 대해
                  시간을 내며 대꾸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공통점이 있어야 동의하면서 의견 개진이
                  있는 것이지요   삭제

                  • dogma 2010-09-13 10:53:28

                    파발님,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에 대한 구분의식 없군요.
                    옛 약속에서는 보이는 땅, 보이는 축복, 보이는 자리
                    보이는 율법, 외형적인 것,육적인 축복을 축복이라 믿고 올인했습니다만

                    새로운 약속에서는 복의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복 만 받으면 장땡입니까?
                    파발님이 욥과 똑같은 경우를 당해 욥과 똑같은 축복을 받기 바랍니다.
                    하면 그게 님을 축복하는 거겠습니까? 저주하는 거겠습니까?
                    예수께서 물질적으로 배나 더 받는 축복에 목숨 걸라고 하셨나요?
                    더 많이 가지기만 하면 축복입니까?

                    상식과 합리성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광신과 맹신, 미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삭제

                    • 파발 2010-09-13 10:21:35

                      자식이 죽었다.이보다 더 큰 불행이 있을 수 있느냐, 네가 그런 상황에
                      처하면 감사하고 복까지 더해 진다 해도 행복할 수 있겠느냐. 이런 주장에
                      무엇을 더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념이 사그러 들겠습니까?

                      믿음의 행위를 설명하면 교만이요, 위선이라면, 그리고 교회에서 정직하게
                      배운것들을 조롱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에서 입은 상처를 빌미로 교회를
                      부정직하게 보는 관점이 아닙니까?

                      저는 인간적인 것을 얕보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님이 그런 대응을 염려해
                      인간적인 이성이 신앙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이려 예전에 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다시 올린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함, 믿음의 승리를 그리려 한 것
                      입니다.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에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는 님의 주장의 요체는
                      네가 한번 자식 잃은 슬픔에 처해 봐라 그런 말 할 수 있느냐 라는 주장으로
                      답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신앙을 위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님의 말처럼 교회에서 배운대로
                      앵무새처럼 뇌깔이고, 하잘 것 없는 믿음의 억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입니다. 그것이 맞는 것인지는 불문에 부칩니다.

                      님의 욥기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 지는 군요.교회에서 배운대로가 아니라 님이
                      스스로 생각해낸 욥기의 사상이 궁금해 집니다.저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에서
                      정통으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결론을 맺지 못합니다. 욥기에 대해 제가 느낀
                      여러 생각들은 제쳐 두고서 전체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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