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상은 많이 바뀝니다. 특히 최근 정보공학의 발전에 따라 삶의 주변 환경이나 삶의 양식 자체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가장 무서운 혁명은 기술혁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삶의 깊은 자리에 담겨있는 본질적인 모습에는 큰 변동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상과 점점 깊이 야합해 가는 한 레위인 제사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리시대 교회의 타락상을 꼭 빼 닮았는지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를 향하여 지속적인 적실성을 지닌 소중하고 살아있는 진리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레위인의 타락의 과정을 깊이 살펴보면서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발견하고 깊이 통회함으로써, 신앙과 세상을 엮고 있는 야합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계 때문에 무너진 한 레위인(17:1-13)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버릇이 안 좋은 사람이어서 어머니에게서 은화 일천 일백 냥을 훔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의심 섞인 무서운 저주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었는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돈을 어머니에게 돌려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 전체의 1/5에 해당하는 2백 냥만을 드려 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미가는 가족 신당(神堂)을 더 강화하여 에봇과 드라빔도 만들고 자기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 가정은 비록 하나님의 이름은 불렀으나 돈과 아들을 더 중심에 둠으로써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심히 멀어져 있었습니다(1-6).

바로 이 때 한 레위인이 미가가 살던 에브라임 산지로 흘러들어 온 것입니다. 그는 레위인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다가 여의치 않아 마땅히 거할 처소를 찾아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있던 신세였습니다. 그 당시 종교적인 책무를 맡은 레위인이 얼마나 홀대를 받고 있었는가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된 형편에서 미가를 만난 것입니다. 미가는 그를 보는 순간 매우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헐값으로 그를 가정 전속 제사장으로 고용할 수 있는 기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레위인에게 매우 낮은 연봉을 제시했습니다. 일년에 은화 열 냥과 의복 한 벌과 먹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식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정처 없이 헤매던 레위인의 눈은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7-13).

레위인과 미가 사이에 아주 적절한 거래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레위인은 미가 가정 신당의 문제점과 그의 얄팍한 속셈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생계의 위협을 느끼면서 미가의 손짓이 있기 전에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비굴하게 레위인의 신분과 신앙의 양심을 팔아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자신의 배를 채우고 몸을 따듯하게 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반면 미가는 약간의 경제적 호의를 베풀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함으로써 자기 가정 신당의 신앙적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인의 타락의 구체적 출발이었습니다.

우리말에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다"는 자조 섞인 표현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삶의 무서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인생의 중요한 대목에서 경제적 안정과 올곧은 신앙 사이에서 저울질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에 서게 되곤 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비교적 안정적인 자리를 얻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숨기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일단 좋은 자리를 얻은 다음에 서서히 진리의 길을 펼쳐 가는 것이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아주 없는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 정말 바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목회자의 경우를 든다면 나의 목회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나 자신 잘 알고 있는 터입니다. 웬만큼 기반이 잡혀있는 교회의 경우 목회지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사표를 던질 각오를 하지 않고는 못할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전히 바른 길을 걸어가려면 춥고 배고픈 삶을 살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이런 각오가 처음부터 없다면 뱀 같은 지혜 운운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에 다름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참된 길을 걸어가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신앙적 정통성이라는 탈을 쓰고 싶어하는 재력가와 세력가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경제적 안정만 누린다고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부가 자신의 욕심이나 불의한 축재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임을 증명하고 싶은 본능적 충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들은 늘 은근히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유혹적인 거래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손의 검은 정체를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담대히 뿌리쳐야 합니다. "주님! 이렇게 타협해서 안정을 누리느니 차라리 여기 이 자리에서 굶어 죽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 아내와 자식은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무 성급하게 자신을 좇아오는 사람에게 신앙적 삶의 진실을 알려주셨던 것일 겝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여기서 천상병 시인의 「나의 가난은」이라는 시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많은 사람들이 천상병 시인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고 평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가난을 자신의 직업으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귀천」이라는 감동적인 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열망을 표현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삶을 소풍처럼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신앙의 올곧은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가슴에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성공을 위해 세상과 야합한 레위인(18:1-31)

생계 때문에 신앙의 정체성이 무너진 레위인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큰 성공을 움켜지기 위해서 배신과 야합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계기는 단 지파의 정탐꾼 다섯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의 저항과 블레셋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할당된 영토를 확보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소라와 에스다올이라는 좁고 불편한 지역에서 겨우 겨우 공동체를 꾸려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 정탐꾼들은 땅을 찾다가 미가 집의 레위인을 만나게 되었고 자초지경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가정 신당의 제사장임을 알고는 자신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과연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 하나님께 물어봐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레위인은 즉시 안심하고 가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형통케 하리라는 아주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너무나 적절한 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곳은 라이스라는 성읍이었는데 골짜기에 위치하였고 인근지역으로부터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나마 먼 이웃들과 아무런 외교적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자족하는 마음으로 편안히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외부의 침입에 전혀 무방비 상태였고 전쟁을 하면 그들을 위한 구원군의 개입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땅은 매우 비옥해서 그들은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정탐꾼들은 그 지역을 보는 순간 속으로 "음! 그 레위인, 제법 용한 제사장이구먼!" 되뇌면서 마음 도장을 찍어 놓았을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긍정적인 보고를 듣자 단 지파는 600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가족들과 재물을 이끌고 점령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진군 중에 정탐꾼 다섯 명은 미가의 신당과 레위인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미가 신당의 신상, 에봇, 드라빔 그리고 레위인 제사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장군인 600명을 거느리고 미가의 신당에 가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 물품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에 레위인 제사장은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레위인에게는 또 한번 달콤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쉿! 조용히 하시고 따라만 오시구려. 당신은 우리의 어른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주시오. 겨우 한 집안의 제사장으로 머무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이스라엘의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좋겠소? 우리가 당신에게 날개를 달아 드리겠소. 더 큰물에서 노시면서 하나님께 크게 봉사하시지 않겠소?" 듣기만 해도 입안이 달달해지려고 합니다.

레위인 제사장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동안 박봉이지만 인내하면서 작을 일에 충성해왔더니 이제 저에게 큰 일을 맡기시려는군요!" 외쳤을지 모릅니다. 그는 미가에 대한 의리고 뭐고 다 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미가와 그 이웃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뒤쫓아왔지만 단 지파 군대의 기세에 눌려 퇴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 지파는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정치·경제적 기반은 새롭게 다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기서 자신을 위한 신상을 세움으로 영적인 면에서 깊은 부패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 제사장은 이러한 세속적 흐름에 야합함으로써 타락한 종교인의 모델로 남게 되는 비극적 주인공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과 세속의 야합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를 유혹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제적 안정 때문에 신앙의 올곧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을 더 큰 세속적인 성공을 향하여 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우 혼탁한 진흙탕이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올해 선거철을 맞이해서 정치인들이 주일에 초대형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예배시간에 인사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가 오가는 것입니다. 조찬기도회 역시 그럴듯한 거래의 장소입니다. 부패한 정치인에게 세상과 야합한 종교인은 정통성을 제공해주는 대신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명예를 제공하고 다양한 방패막이의 역할을 담당해주는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예배드릴 때 했던 설교들의 모음집을 언젠가 보고는 가슴아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때가 있습니다. 낯이 뜨거울 정도의 아부성 설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을 보며 너무나 슬펐습니다.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기독교방송 프로그램에서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부활절연합예배에 대해 평가해보는 토론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연합예배 실무를 주도했던 H 목사님에게 너무 정치적인 색깔이 강한 것이 아니었냐고 물었더니 "정부에서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항변을 하였습니다. 순수한 행사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다시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슬퍼졌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의 몸값이 참 싸구려가 됐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안 받았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거래를 부정하는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과의 불순한 거래를 즐겨서는 안 됩니다. 그 야합의 고리를 과감히 떨쳐버려야 합니다.

정치인들과 재계와 주요 언론계 인사들을 포함한 정치·경제적 강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노동계를 포함한 상대적 약자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보내는 거짓된 행태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개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주의 종들은 세상적 지위를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들과의 더러운 거래와 밀월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기천만원에 장로직을 팔아 넘기는 그 추태를 통회 자복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가슴에 박힌 못을 빼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맺음말

어거스틴은 "이용한다(use)"는 말과 "즐긴다(enjoy)"는 말을 구분하였습니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무엇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용해서 좀더 중요하고 정당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용해야 할 세상적 재화들은 즐기려고 하고, 즐겨할 하나님은 이용을 해먹으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위인 제사장이 무너지고 세상과 야합한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박국처럼 하나님만을 즐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됨으로써, 그 야합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데 앞장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합 3:17-19). 그럴 때 이 땅 위에 희망의 새 역사는 다시 한번 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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