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국교회를 향해 세상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말이 있다. "저들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면서 날마다 서로가 죽이자는 거야?"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들 편에 세워 놓고 분열을 일으키는 한국교회를 향해 비웃는 부끄러운 소리다.

과거 한국교회는 지금처럼 타락의 본색을 드러내 놓지 않았다. 현 한국교회의 모든 분열과 갈등의 문제는 오직 권력화, 대형화, 감투화에서 시작되었다. 각 교단이 배금주의에 젖어 물질이 쌓이고 그 물질로 인해 이권이 개입되고, 이권으로 인해 권력 다툼이 이루어졌다. 또한 양적인 성장에 치우친 대형화가 낳은 과시적인 건물과 보암직한 감투에 치우친 바리새인들이 복음을 상품화시켰기 때문이다.

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

최근 예장통합 측 총회장(지용수 목사)은 또다시 이재철 목사를 향해 설교권을 방해하며 경고장을 보냈다. 하용조 목사가 운영하는 CGN TV에 이재철 목사의 설교 방송을 중지하라 요청했다 한다. 또한 100주년기념교회 소속 부교역자들에게는 교단 소속 목사로서 합당하게 처신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는데, 필자의 귀에는 마치 공안 당국에서 휘두르는 쇠망치 소리로만 들려온다.

이들은 교권주의 안에서 그들만의 법을 만들어 '집단 사고'(Groupthink)에 빠져 무조건 만장일치로 응집력을 과시하며 권세를 남용하고 있다. 예수의 은혜를 빙자해 저 높은 곳에 앉아 심판하는 자들은 이 시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다. 진정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분별력도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벙어리가 더 낫지 않은가. 총회장 자리는 권세와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자리가 아닐 것이다. 교단의 권세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자칫 교만의 선봉자로 보일 수가 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이 시대 지성과 영성이 소통하는 강줄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 비전을 양화진 문화원에서 만났다. 수많은 지성의 사람들을 강대상에 세워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영성이 회개하고 자숙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선민이 되어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분쟁 속에서 자신만의 하나님을 찾았는가. 나만의 하나님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될 수 없고, 우리 교단의 하나님은 타 교단의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내 안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은 나 하나만을 높이고 축복하는 이기적인 전능자인 것이다.

▲ 지성과 영성이 만나 세상을 향해 예수의 향기를 선포하고 있다. 양화진 목요 강좌 중. (사진 제공 양화진 문화원)
예수 안에서 통합, 합동, 고신, 감리, 기장, 성결의 교파 분열. 그 무엇이 유익이 되겠는가. 새벽을 깨우는 기도와 기도원에서 외치는 소리들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해 모이기에 힘쓰고 있는 것인지 냉철한 이성과 신성으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축복, 평안, 사랑을 명분으로 이기적인 교리주의와 율법의 사슬에 매여 바리새인들을 생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다.

그러나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는 변함 없이 비포장도로를 고수하며 성도들과 천성을 향해 좁은 길을 가고 있다. 이 목사를 향해 돌을 던지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과 사울의 후손들이 처처에서 권세를 남용하고 있지만, 분명 하나님의 뜻은 화목과 사랑일 것이다. 하늘의 권세로 생명을 살리려 하지 않고 생명을 죽이려 하는 자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과연 이 시대 바리새인은 지금 누구인가?

이렇듯 서로를 억압하며 사람이 법을 만들어 하나님의 의를 내세우며 드디어 광화문 감리교단 본부 앞에서도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감독회장을 탄생시켰다. 김국도 단독 출마자가 보여 주는 어설픈 퍼포먼스가 감리교단 역사의 한 장을 만들어 준 것이다. 김국도 목사는 감독회장 당선증을 받으며 자신만이 교단을 살릴 수 있다는 의로움으로 어김없이 하나님의 의를 내세웠다. 링컨, 알렉산더 대왕, 요한 웨슬리까지 대동시키며 감독회장 당선 소감을 세상을 향해 선포했다.

▲ 감리교 본부 앞에서 김국도 목사의 감독회장 당선식을 거행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필자가 보기에는 근접해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섭섭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두 분이 하늘에서도 개신교 사랑에 대해 상처 받지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에, 두 분께서 이 광경을 보다 한 말씀 하실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싸움은 여전하구나. 그러나 지금 네가 죽어야 모두가 살 것이다. 복음 없이 죽은 자도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는 죽을 줄 알았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렇다. 복음 없이 죽은 자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배부른 자들은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죽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육신에 깊은 병이 들어 판단력도, 영적인 분별력도 사장된 채 합병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감리교단은 그야말로 사태다. 이 사태는 언제 끝이 날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인데,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살려고만 한다. 성서에는 분명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마 10:39)는 진리의 말씀이 살아 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사람의 법 아래서 짓밟히고 있는 현실이다.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 않으니 그들 안에 갇혀 계신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죽고자 하는 선지자들

다행히 스스로 죽으려 하는 자들도 있다. 얼마 전 이동원 목사의 내려놓음을 접하면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하늘을 향했다. 이렇듯 예수의 은혜로 차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내려놓을 줄 알았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가 아닌, '자연인 이동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한국교회 산증인처럼 다가왔다.

이 목사는 치유가 덜 된 목사는 목회 현장에 급하게 들어오지 말고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라 당부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아직도 목사가 강자라며 목회자의 자기희생을 강조했다. 목사가 성도를 이기려 하지 말고 스스로 목사가 죽으려 하면 어려운 상황도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건축에 대해서도 한마디 남겨 주었다. 교회가 건축에 집중하는 것을 우려하며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교회까지도 건축에 집착한다며, 건축이 일종의 트렌드가 될까 두렵다"라고 했다. 또한 은퇴비를 거절한 이유는 돈을 위해서 사역해 온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분의 내려놓음이 배부른 자들에게도 향기로 퍼져 가기를 바란다. 향후 설교 클리닉, 리더십 교육, 영성 훈련에 집중할 이 목사의 비전 앞에서 감사의 열매가 풍성하기만 하다.

또한 최근에 한완상 선생은 '우아한 패배'라는 주제로 나들목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생애가 철저하게 패배한 사람 같지만 죽음이 끝이 아닌 예수님의 부활의 참의미를 '우아한 패배'로 승화시켰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선물이기에 살아서 죽을 줄 아는 자만이 '우아한 패배'자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한완상 선생은 예수님의 섬김을 한국교회가 닮아 가야 하며, 북한이 무력으로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우아한 패배'라 했다. 폭력과 억압으로 정의를 이루려는 것은 예수의 정신에 어긋남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비폭력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오직 예수의 사랑만이 가장 진보적인 가치라 했다.

분명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했기에 예수님이 좌파라면 자신도 좌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편을 가르기에 자신을 향해 좌파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성서적인 좌파임을 고백했다. 이렇듯 사랑의 가치는 바로 자신이 다 가졌으나 버릴 줄 알고, 자신이 다 누릴 수 있었으나 포기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이기에 그는 죽을 줄 아는 선지자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로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다. 정치의 포플리즘(populism)이 종교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와 보암직, 먹음직하게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복음의 중심에 예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각 교단의 총회장, 한기총, NCC 회장, 한목협, KNCC 회장, 감독회장, 이사장, 총장 등. 이렇듯 수많은 협회와 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당연히 대형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당회장들이다. 또한 대형화한 교회 건물과 함께 물질이 넘치는 배부른 자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본주의와 손을 잡고 물질 만능 즉, 맘몬주의로 조직화 기업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이고 흩어지는 원리를 외치지 않는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기에 지금 우리는 복음 안에 있다. 만약,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안주해 그곳에 대형 교회를 짓고 양적인 성장에 주저앉았다면 복음은 땅끝을 향해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다.

300명의 기드온 용사처럼 300명이 넘는 교회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기드온은 3만 2,000명 용사 중, 3만 1,700명을 돌려보냈다. 그들을 흩어 보냈기에 기드온은 미디안을 치고 승리한 것이다. 숫자로, 물질로, 무기로 적을 이기려 하지 않았고 오직 말씀에 순종했기에 적을 물리친 것이다.

교회가 숫자가 많아지고 물질이 모아지면 탐욕으로 땅의 것에 집착한다. 그래서 더 모으고 더 쌓아 우리끼리 당을 만들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이다. 드디어 금송아지를 섬기며 풍악을 울리면서 잔치는 이곳저곳에서 연일연야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총회장을 세우고 이사장을 세우고, 감독과 교단장을 세워 그들을 중심으로 축복과 평안을 자손만대 누리자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전능자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혹한 아프리카 땅에서 구정물을 마시고 사는 그들의 눈을 보라. 흩어져 가야 할 곳, 나누어야 할 곳들이 처처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해야 한다. 얼마나 더 높아지고, 더 가져야 하늘을 볼 것인가? 잠시 하프 타임 시간 안으로 들어와 삶의 후반전을 하늘의 뜻에 합당하게 그려 가야 할 시간이다.

베드로, 바울, 삭개오, 고넬료, 사마리아 여인 등. 이들은 하나같이 패자의 자리에서 부활의 영광으로 승리한 사람들이다. 지금 하늘에서는 장마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장대 같은 장마비로 씻겨 내려가야 할 것들을 꺼내 놓자. 바벨 끝까지 높이 올라가 있는 감투, 대형 창고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물질, 조직화 기업화를 추구하는 교단, 그리고 각자의 마음속에서 섬기고 있는 금송아지를 7월 장마비에 정하게 씻어 보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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