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위치한 호남신학대학교에는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죽어간 선교사들의 흔적이 22개의 낡은 비석으로 남아 있다. 2001년 5월 17일. 호남신학대학교 교정 한켠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또 하나의 잘 깍인 비석이 세워졌다. 5.18 당시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진 문용동 전도사를 추모하는 비석이다. 추모비가 세워지기까지 호남신학대학교 교수회, 총동문회, 518 기념재단, 총학생회와 원우회 등 많은 단체와 여러 명의 동문 및 관계자들이 함께 힘을 모았다.

문용동 전도사의 추모비가 세워지고 일년이 지난 지금. 5월이 되어도 문용동 전도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추모비가 세워지는 역사의 현장까지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을 돌아서 왔다. 그의 죽음으로 부터 20여년이 지난, 그것도 5.18에 죽어간 세 명의 신학생 중 가장 더디게 치루어진 추모행사는 그를 추억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잊혀지지 않는 몹쓸 기억 하나만 떠오르게 한 가슴 아픈 행사였다.

추모비가 세워지기까지

총학생회장으로 문용동 전도사님의 추모행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죽음으로도 끝낼 수 없는 한 사람의 고결한 삶을 목격하게 되었다. 호남신학대학교의 자랑스런 선배, 문용동. 군부정권의 폭력아래 입과 귀가 모두 막혀버린 5.18의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오히려 죽음으로 말했던 사람.

20여년의 역사의 간격을 뛰어넘어 그가 남긴 흔적들을 하나 하나 되짚어 만나는 그의 삶은 내게 죽음의 의미 그 이상의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그의 족적을 새롭게 조명하려던 지난 7번의 시도와 실패. 오랫동안 발목을 잡고있는 프락치설. 많은 반대와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일임을 아는 듯 일을 막고 있던 많은 장애물들이 하나 둘 걷히기 시작했다. 행사 당일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전도사님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마지막 그가 세상을 떠난 1980년 5월 27일에 그의 죽음을 '순교'라 힘주어 읽었다.

"1980년 5월 27일 우리의 자랑스런 선배 문용동 전도사님
  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가슴 속에서 울컥 치솟는 울음을 간신히 누르고 자리로 오자 옆 자리에 앉아있던 선배 한 명이 이미 울음을 터뜨리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뇌하며 죽음을 택한 한 신학도가 우리의 부끄러운 입술로 순교자라 고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우리는 기다렸던가. 이러한 오랜 기다림의 댓가일까. 이제 호남신학대학교에는 순교자를 기억하는 23개의 비석이 놓이게 되었다.

잊혀짐의 아쉬움

그 후 일년의 시간이 흐르고 교정 한켠에 세워진 추모비는 그곳을 거니는 이들에게 그저 낯익은 잘 깍인 비석이 되어갔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 이끼 끼고 다 닳아 버린 22명 선교사들의 묘비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너무 쉽게 잊혀져 가는 추모비를 보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다.

새벽길을 간 이, 오늘 나는 책꽂이에 꽂힌 그의 추모집을 다시 꺼내 읽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통속적인 결심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b)"

그의 묘비에 적힌 한 마디 성구가 유난히도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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