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신학이 태동한 때에는 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신학의 방법론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결국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태동시켰다. 다시 말해 '고등비평학'이라는 신학 방법론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근본주의 신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할 긴박성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의 북장로교에 속한 유니온신학교에서는 '브릭스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유니온신학교의 브릭스 교수가 성경의 고등비평을 수락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95년은 미국의 나이아가라 휴장지에서 근본주의자들의 큰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초교파적인 성격을 가지고 기독교의 근본 교리 확립을 위해 개최되었다. 여기서 채택되어진 기독교의 5가지 근본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무오성
2.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5.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뿐만 아니라 1909년부터 1912년까지는 근본주의 진리 증언이라는 타이틀 아래 총 12권의 저서가 출판되기도 했다. 당시의 집필진들은 워필드, 라일, 모울, 카일, 어드만과 같은 미국에서 저명한 보수주의 신학자들로 알려진 이들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근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의미가 있었던 것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복음주의권의 교회들이 하나로 뭉쳤다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기독교의 모습이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서는 공교회 회복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한편 미국 교회 안에서의 계속적인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은 계속되어 갔다. 그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스콥스 재판'이다. 이 재판은 '존 토마스 스콥스'라는 공립학교 교사가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주 교육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부리안' 목사는 근본주의의 대변인으로, '다로우'는 자유주의의 대변인으로 법정에서 대결을 벌였다. 결과적으로는 스콥스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근본주의 측의 승리로 법정 판결은 끝났지만, 부리안 목사의 변증은 매우 어슬프기 그지없었다. 반면에 자유주의의 대변인이었던 다로우는 능수능란한 말재주와 나름대로의 논리로 그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비록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패배로 그 사건을 일단락 지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이들과 이에 대한 세간의 분위기는 근본주의의 나약함과 허술함에 대해 씁쓸함을 드러냈다.

이로 인하여 근본주의는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특히 1929년에는 프린스톤신학교의 '로스 스티븐슨'의 연약한 신학적 리더십으로 말미암아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설 자리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메이첸 박사는 그의 동료인 알리스, 윌손, 반 틸 등의 교수들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35년에는 미국 북장로교회를 완전히 떠나 정통 장로교회라는 새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본주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중심으로 다시금 그 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