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
5·18 민중 항쟁 30주년 '제18회 전국문학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로 가는 길은 5월의 햇살만큼이나 연녹색 풍경이 눈부셔 차라리 눈감고 싶을 만큼 아득하고도 험난했다. 굽이굽이 넘어가는 재마다 얼마만한 핏빛이 어려 있는가. 아픈 역사의 상흔을 곳곳에 안고 있는 지리산을 가로지르며 가슴은 광주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먹먹해지고 있었다.

5·18 민중 항쟁의 의미는 무엇보다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 수단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계엄'에 대해 필사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을 펼쳤다는 데 있다. '계엄'이면 만사형통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이젠 계엄으로도 되지 않구나!" 하는 충격을 주면서, 계엄의 위력을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이다.

낭만의 4·19보다 더 리얼리티한 5·18

그로부터 민중에겐 국가주의 폭력의 탄압이 칼로 보이지 않고 지랄 짓으로 보이게 되었다. 탄압이 아직 칼로 보이면 민중의 생명력은 위축되지만, 탄압이 지랄 짓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민중의 생명력은 놀랍도록 왕성해진다. 5·18이 4·19보다 더 리얼리티한 까닭은, 사실이 낭만보다 더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고립된 광주에서의 그 아름다운 시민 공동체 해방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우리 민중은 칼에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다. 슬프고도 아이러니컬한 사실이지만, 민중은 그러한 아픔을 거듭 겪으면서 아주 단단해졌다. 모든 게 비정상적이었던 그 시대에 민중은 독재의 압제를 통해 민주 의식을, 언론 부재의 상황을 통해 참된 언론의 고귀한 가치를, 억압의 경험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폭력의 광란 속에서 평화를, 불의의 횡행 속에서 정의를 배웠다. 공화국 60년사는 지독한 정치 수업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때 서울의 봄, 우리 사회에선 희망에 가득 찬 '순리론'(順理論)이 떠돌고 있었다. 역리(逆理)는 결국 스스로 파멸했으니 이제 순리에 따른 새 시대가 올 것이며 그를 결코 막지 못하리라. 누가 이 흐름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광주 학살의 현장에는 왜 칼레 시민들이 없었는가

▲ 로뎅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
그러나 광주 학살은 다시금 역리가 순리를 꺾고 올라섰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우리 모두의 안일한 대처 그 결과였다. 순리의 참된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상황의 술'에 취해있다 역리의 반역을 막지 못한 것이다.

그 중심에 '화려한 휴가'로 저질렀던 광주 학살이 있었다. 광주 학살이 계획적 범죄였음은 그들의 사망자 수 발표에서 은연중 드러난다. '한 200명은 희생시킬 각오하고서' 권력 탈취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희생자가 수천 명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회자되었다. 물론 이런 숫자 놀음 조작이 가능했던 근본 원인은 사상자 가운데 광주 지역을 대표하는 '유지'들이 없었던 까닭이다.

왜 그들은 앞장서지 않았는가. 윤공희 대주교만 하더라도 주교관 창가에서 눈 아래 펼쳐지고 있는 학살 장면을 내려다보며 그냥 울고 있었다던가. 대주교마저, 총장과 교수마저, 언론인과 성직자마저 학살에 저항해 앞장서 목숨을 내던지고자 했다면,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무명사(無名死)시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무모한 살상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학살의 실상이 제대로 밝혀져 광주 시민들의 한 역시 이리 깊어지진 않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들의 용기 앞에 학살을 그만두고 퇴각하고 말아, 궁극적으로 민주화의 봄을 되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참혹한 학살이 자행된 뒤 수습 위원으로나 활약하다 결국 2차 진압을 초래하고만 광주의 비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칼레 시민들의 이야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박제된 5·18, 그날의 그 광주가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가

그날 5·18기념문화관에서 광주·전남 작가회의 주관으로 열린 '5·18 민중 항쟁 30주년 기념 심포지엄' 주제가 '상처'였다. 아우슈비츠 비극과 군부 독재에 저항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통해 역사적 상처와 문학과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80년 5월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밤늦도록 짚어 본 뒤, 다음 날 일찍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가서 참배하였다.

▲ 홍성담의 작품 <아리랑을 부르는 탁경현>.

거기서 입은 상처일까. 광주 지역의 뜻있는 분들과 갈수록 박제화하는 5·18 기념행사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이 더욱 먹먹해져 갔다. 그날의 그 광주가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가. 기어이 둘로 쪼개져 치러진 5·18 기념식을 보면서, 단정하게 꾸며진 국립묘지가 아닌 비록 가묘(假墓)였지만 희생자들의 혼불이 살아 숨 쉬는 뒷동산 가파른 언덕바지 옛무덤들 곁에 머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 것은 어인 까닭일까.

광주에서의 1박 2일의 숨가쁜 여정을 마치고 온 뒤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예 글쓰기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광주를 떠나기 전 들렀던 '5월 화가' 홍성담의 전시회 '흰빛 검은물'도 한 원인이었을까. 거기에는 시커먼 국가주의의 공적 폭력에 참혹하게 유린당하는 성스럽고 거룩한 모성과 여성성의 아픔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 '야스쿠니 미망(迷妄) 시리즈' 가운데 일제 때 강제 징집당해 가미가제로 폭사해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는 조선인 병사를 표현한 '아리랑을 부르는 탁경현' 앞에서의 충격은 잊지 못하겠다.

하기야 80년 5월이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진행형이라는 암담한 현실 인식이 가슴 먹먹함의 몸살을 앓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거꾸로 가는 MB 정권하의 퇴행적 사회 현실. 30년 전 그때처럼 광장의 불은 다시 꺼지고 아크로폴리스가 폐쇄당하며 다시금 역리가 똬리 튼 구렁이처럼 우리 가운데 자리 잡으려는 반역의 야만적 기세 앞에 황망함마저 드는 시절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외치지만 정말 우리는 10년을 잃어 가고 있다.

모든 민중 항쟁은 다 살아나라

그런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가 있었다. 참여 정부의 역사적 평가를 떠나 노무현이야말로 5·18의 아들이요, 그의 집권은 5·18의 숙성된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그가 광주 경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선 가도의 주도권을 잡았던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진정 5·18의 아들, 아니 그 멀리 부마항쟁, 4·19 혁명, 4·3 항쟁, 대구 항쟁 등 모든 민중 항쟁의 소중한 결실이었다.

이제 모든 민중 항쟁은 다 살아나라. 박제의 껍데기를 부수고 알몸으로 다 살아나라. 먹먹했던 가슴이 풀려나듯이 죽어 가던 모든 것은 다 살아나라. 한번 깨어난 민중적 자각은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언제까지나 타오르리라. 하여 가라앉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으리라. 이제 곧 부활이 오리라. "폭군이 죽으면 그의 통치는 끝나지만 순교자가 죽으면 그의 통치는 시작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주의 부활의 씨앗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이 5월은 다시 6월로 나아가게 되리라.

▲ 6월 항쟁은 부마항쟁과 5·18 민중 항쟁의 위대한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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