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5·18을 먼저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음의 길을 행
진해간 그들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셔서 사회적 약자들이 진정으로 존
중받는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운동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임을 깊
이 깨달아야 한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그리스도인에게 5·18은 무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5.18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여전히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한국교회 대부분은 5·18을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은 체 적당히 역사의 전당에 모셔놓고 편리하게 망각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면 한국교회는 그 외양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5·18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청산할 것을 청산하고 거듭나야 한다. 그것만이 그 때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의 최전방에서 절규하며 스러져간 민주투사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5·18

물론 지난 97년 4월 17일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등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됨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 싼 사법적 판단은 일단락 되었다. 전두환·노태우로 대변되는 신군부 세력은 군사반란과 내란을 일으킨 범죄집단으로 확정되었다. 한편 1980년 5월 18일 이후 오랫동안 불순분자·불량배·폭도로 매도당해 온 광주시민들은 민주화 운동 혹은 민중항쟁의 투사로서 그 명예를 일정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5·18』이라는 책에서 최재천 변호사가 잘 밝혔듯이 5·18에 대한 역사적 정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로 그가 제시한 것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5·18 정신의 계승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5월 14-16일에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있었다. 광주시위목격자인 아놀드 A. 피터슨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는 "계엄령 철폐", "유신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백성들을 짓밟아 온 거짓된 권위주의적 군부독재에 대항 항거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바로 5·18 정신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한국교회는 이 항거와 열망을 외면해 온 것이다.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할 이유

▲이 땅 위에 민주주의가 심화될 수 있도록 역사의 발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5.18 항쟁의 피 흘림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80년 5월 그 당시 나는 한 대학생선교단체의 간사로서 서울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나는 71년에 대학에 입학한 유신세대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직접 경험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앞에서 언급한 대학생선교단체에 붙들리고 말았다. 철저히 보수적인 신앙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단체의 공식적 입장은 데모 불참이었지만 나는 데모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것도 순진하게 가장 앞줄에서!

그러나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대한 열망은 그 이상을 넘어가지는 못하였다. 복음전도와 제자양성이 민족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편리한 확신을 가지고 대학생선교사역에 점점 깊히 뛰어 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3년 봄에 영국으로 유학과 목회의 길을 떠났다. 그 힘들었던 80년대에 나는 역사의 현장에 없었다. 그리고 극렬했던 투쟁의 시대가 다 지나간 후 97년 초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기에 지금 5·18을 다시 생각하며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이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참여에 대한 신학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1980년 5월 지금의 신학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투쟁의 현장에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새벽마다 주님께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바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울부짖고 매달리곤 한다. 젊은 시절 부끄럽게 살았기에 나의 남은 여생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주님이 원하시면 아브라함처럼 자식도 포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사회참여의 신학적 당위성

이런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5·18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교분리라고 하는 편리한 교리 뒤에 숨어서 정치·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비겁하고 거짓되게 안전을 도모해 온 삶을 통회 자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이요 신앙고백의 핵심인 출애굽 해방사건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포함한 전인격과 공동체 전체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분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해방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서로 간의 평등이 보장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이셨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사회적 약자를 짓밟으면서도 형식적 신앙에 만족하고 있을 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를 잃고 말았다(사 1:1-17; 렘 22:1-9). 그들이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개혁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사 58:1-12).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 회복의 객관적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신약시대에 와서 이러한 사상이 바뀌었는가? 구약시대에 하나님 백성은 정치경제·종교가 통일된 하나의 왕국에서 살았다면 신약시대에 와서는 둘이 일정정도 분리된 두 개의 왕국에서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양식은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신앙공동체의 이러한 새로운 존재양식이 정치참여를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구약은 그리스도인에게 정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종교·정치·경제 교과서로 여전히 유효하다(딤후 3:16-17).

예수님은 약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저항하시고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걸음을 따르라고 명하심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신앙과 정치경제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총체적 현실이며 사회참여의 사명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이 신앙과 삶의 영역에서 정치·경제의 영역을 제외시키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언어도단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구약의 율법보다도 더 작은 분으로 폄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거짓과 위선

▲ⓒ뉴스앤조이 김승범
여기서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왜곡 해석해서 신학적으로 정치참여를 배제하고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하는 순간 교회는 거짓과 위선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5·18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역사적 경험이 증명한다.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교회가 정치권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24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가졌다는 것을! 참석자들은 이 자리에서 전두환 위원장이 "일찍이 군문에 헌신해서 훌륭한 지휘관으로 나라를 방위하는 데 충성을 다하게 하신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또한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여러 해 동안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돼 있는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운동에 앞장설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렸다.

전두환은 인사말을 통해 광주 사태는 불순분자의 배후 조종으로 발생한 것으로서 6·25 이후 최대위기였음을 강조하면서 "다행히 주님의 각별하신 은총으로 우리 정부와 국민은 슬기롭게 이 난국을 극복하고 이제 새 시대 새 사회의 건설을 위한 대열에 서서 힘차게 매진하고 있다"고 평한 후 기독교지도자들의 협조를 구했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1980년 8월 7일자 신문에 이 내용을 일면 톱기사로 다루었다.

이렇게 기독교 지도자들은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의 정당화 작업에 적극적인 협력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정치참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정치참여란 말인가? 한국교회 지도층은 선량하고 억압받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참여는 강력히 정죄하고 포악하고 억압적인 강자를 대변하고 지지하는 정치참여에는 앞장섰던 것이다. 교회가 한번 신앙양심을 잃게 되면 어떻게 비참해지는 지를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해 회개하지 않은 결과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이 법적으로 정리되는 과정에서조차 한국교회는 뼈아픈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잘못된 정치참여의 길을 걸어가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년 7월 21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정의사회구현 실천협의회'이름으로 성명서가 실렸다. 성명서에는 기독교보수진영의 지도층 인사들과 소위 초대형교회 담임 및 원로목사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용인즉 첫째 애국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독교신문인 국민일보 탄압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둘째 국가 보안법 개정을 즉각 중단하여 공산화 통일을 방지하라는 것이다. 셋째 단군상 문제로 형사처벌을 받은 성직자를 즉각 석방 사면하라는 것이다.

만일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순교를 각오하고 범국민운동을 펼쳐가겠다는 것이었다. 명실상부 교계인사들의 정치참여 행위였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조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엇보다도 정의롭지 못하게 강자의 편에 서서 기득권을 유지해온 세력들과의 깊은 연대관계가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후에 교계의 몇몇 지도자들이 미국을 확실히 지지하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이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강자의 편에 서서 정치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모든 것은 한국교회가 5·18의 흐름과는 얼마나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5·18의 피흘림이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5·18을 먼저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음의 길을 행진해간 그들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셔서 사회적 약자들이 진정으로 존중받는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운동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80년 5월 27일 깊은 밤! 계엄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해올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의 최후인 것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아 저항하기로 결의한 시민군! 과연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최정운은 그의 저서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광주의 진실, 투쟁의 진실을 죽음으로 지켰을 뿐이다... 다만 그들이 명정한 정신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그 자리를 내주어 그들의 적이 진실을 영원히 파괴하고 모든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생매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투쟁의 진실을 깊은 땅 속으로 감추어 언젠가는 우리 앞에 진실로서 부활할 수 있도록 화석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광주의 피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제단 위에서 우리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5·18의 피흘림이 그 뜻을 다 이룬 것은 아니다. 역사의 발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5·18의 치열한 정신으로 우리는 정진하여야 한다. 그것이 5·18의 피흘림이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땅 위에 민주주의가 심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2002년은 매우 중요한 해이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역주의와 색깔론 그리고 금권에 기대는 구태의연한 패거리 정치가 그 끈질긴 생명을 이어갈 것이냐 아니면 합리적인 이념·정책대결과 진정한 리더십 대결을 통한 민주주의 심화를 일구어 낼 것인가가 판가름나는 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정치가 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최근의 모든 통계가 객관적으로 보여주듯이 현재의 경제체제는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세상은 그의 자녀들이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후 8:9-15; 마 5:45). 이런 대안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기존의 지배세력은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5·18의 치열한 정신이 다시 요청되고 있다.

힘들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리가 있다. 80년 5월 광주의 마지막 밤! 확성기를 통해 울려나온 한 여자의 절박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가 공수부대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

하나님, 2002년 5월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저와 우리 한국교회가 그들을 잊어버리고 살아온 죄를 회개하며 부서지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절규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들의 피흘림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