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만 해서는 안 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들어 왔습니다. 우리의 아픈 곳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입니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병든 부분을 예리하게 성찰하고 밝히 드러내려고 애써 온 우리들이 이 시대에 대안으로 내 놓고 있는 것이 미미하기 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꾸짖는 사람들의 활동을 보면 매우 역동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역을 통해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수평이동이든 어쨌든 줄을 잇고 있습니다.

최근에 김홍도 목사는 "핍박받는 대형교회"라는 서신을 통해 큰 교회 목회자일수록 희생적인 충성을 다 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은 준비된 그릇임을 공개적으로 강변하였습니다. 적어도 중간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논지처럼 보입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은 정말 불순 좌경세력인 모양이구나 하는 심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시대를 거슬러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단지 개인적 영혼구원 수준에 머무는 기도, 전도, 교육만을 목숨걸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르침을 당장 실천에 옮겨나가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개인적인 게으름과 주변환경이 주는 물리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신을 삶의 장에서 펼쳐나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앞에서 말한 어려움은 물론이고 개혁적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구조적 세력이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이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개혁세력이 발을 디딜 틈을 물리적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안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후에는 '대안을 제시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대안을 가시적으로 그럴듯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결코 의기소침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처럼 보이는 가시적 현상에 대해 너무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예수님과 바울을 생각하면서 종종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거대 담론을 펼치셨습니다. 대대적인 회개운동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운신의 폭은 얼마나 좁았습니까? 주요 활동무대가 그 당시 천대받는 갈릴리였습니다. 주요 추종세력을 보면 사회적 약자들과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사회 주도세력의 압력을 못 이겨내고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제시한 대안운동은 참으로 허약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쇠사슬을 찬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한 셋방에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해 가르쳤던 바울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담론은 역시 거대한데 구체적 대안운동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 것입니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작지만 생명이 움트는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이어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셨고 그를 믿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바람처럼, 불처럼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배속에서 강물처럼 솟구쳤습니다. 경제적 나눔이라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작지만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기쁘게 십자가를 걸머지고 좁은 길을 착실히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영적 후예가 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우리편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다른 사람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하여 이 아픔과 통곡의 5월에 다시,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영광의 길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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