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모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저를 장로님이 아니라 형제로 불러주세요. 제 아내도 사모님이 아니라 자매로 불러 주세요”

라고 한 장로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은 내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에서는 나이 50대가 되면 목에 힘을 주고 다니고 귄위를 강조하기 마련인데 그 장로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문화권에서는 어색하다. 형제, 자매라는 호칭은 수평적인 평등을 강조하는 말이기에 위계질서 속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을 받아 왔기에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를 존중해 왔다. 이런 영향으로 우리말에는 경어법이 특히 발달했다. 따라서 어른에게 형제나 자매라고 부르면 버릇없다는 말을 듣기가 일쑤다. 아마 젊은이들도 이 호칭 쓰기를 꺼려할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매(母妹)’라는 호칭을 계발했다고 한다. 모매란, 어머니 같은 자매라는 뜻이다. 어머니와 같은 나이에 있는 분께 자매라는 말을 쓰기가 어색하므로 만들어낸 말이다. 이런 식으로 만든다면, 부제(父第)라는 말은 어떨까? 부제는 아버지 같은 형제이다.

여하튼 상하주종 관계가 확립된 우리나라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말을 어른에게 쓰기가 정말 어색하고 힘들다. 따라서 그 장로님의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다.

그러면 교회에서 형제, 자매라는 말이 갖는 위치는 무엇인가?

형제나 자매는 교회의 계층 중 가장 밑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내 계층을 나열해 보면, ‘목사-장로-안수집사-집사-형제’의 순이 아닐까?(이 순서는 교단마다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신학교 1학년 때에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신학교 2학년 때에 전도사로 가게 되었는데,

“선생님, 출세하셨네요. 선생님이 아니라 전도사로 이제 가시잖아요”

라고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이 말을 했다. 아이들의 눈에는 전도사로 가는 것이 한 회사의 말단 직원에서 간부 직원으로 승진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교회 위계질서에서 돌출한 한 언저리가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것이다.

형제나 자매라는 말은 서열이 올라가면서 사용이 줄어들고 있지 않는가? 공식적인 직분으로 거의 상대방을 부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직분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형제나 자매’로 부르기가 어색해서 직분으로 대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직분과 나이는 거의 비례한다. 따라서 자연히 나이가 들수록 계층도 상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같은 직위에 있으면 위협감을 느끼고 경계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회에서 어른에게 ‘형제나 자매’라 부를 때에, 듣는 어른은 ‘나이가 어린 녀석이 형제로 부르다니! 장로님도 몰라보고’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기 십상이다. 이것이 한국교회 일상의 파시즘이 아닐까?

신학교의 일상에 형제애가 존재하는가? 신학교 게시판에 붙은 수많은 동문 모임 광고지들!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같은 학교 출신들이 모여 지난 추억과 정을 나눈다. 동문 모임은 사막 같은 도심에서 관계의 갈증을 해소하는 오아시스와도 같다. 그러나 이런 모임이 학연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가로 막고 있는 실정이다.

학연, 혈연, 지연같은 연줄을 이용해 사회의 비리들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신문 지상을 통해서 보고 있다. 연줄의 테두리 안에 들어 가면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감을 느낀다. 반면 연줄의 테두리 안에는 도덕의 무풍지대가 형성된다. 선후배 사이에 뒤를 봐주고 연줄 안에서 일어난 일은 비록 비도덕적이어도 비도덕적이지 않은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죄에 연루되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그리고 다른 출신들에게는 철저히 폐쇄적이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신학교는 학연, 혈연, 지연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연줄이 모든 인사 관계에 개입되어 있고 목회 현장 속에서도 이것은 연장된다. 같은 학교 출신과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니면 목회를 하기가 힘들어 진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 연줄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찢겨져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작고 얇은 면도날로 다시 칼질을 하는 격이다. 그러면서 이성의 절망을 말하는 ‘포스트 모던 신학’을 외치는가? 교회는 근대도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에 속하는데!

한국 사회의 분열상은 교회의 분열과 너무나 같다. 사회의 분열로 일어난 죄악들, 그로 인한 아픔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교회에 들어왔지만, 교회는 세속적 가치관과 철저히 싸우지 못하고 그 가치관에 동화해 버렸다.

“교회 분열은 윤리적 실패이다”라고 리처드 니버는 말한 것 같이 교회는 윤리적 귀감이 되지 못했다. 형제로 좌천하신(?) 장로님을 보면서 나이, 학식, 인종, 성, 지역, 혈연, 계급을 뛰어넘어 형제애를 이룬 하나님의 가족을 다시 생각한다. 한국교회에 형제로 좌천한 목사, 형제로 좌천한 집사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 울고 있는 소리를 듣고 같이 울고 상처를 싸매는 사람도 나오기를 소원한다.

가장 부르고 싶고 가장 듣고 싶은 너, 형제, 자매여! 눈을 미치게 하는 빨간 빛깔이 아니요. 눈을 어둡게 하는 검은 빛깔도 아니요. 눈을 멀게 하는 파란 빛깔도 아니요. 눈을 밝게 하는 물색 빛깔로 너를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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