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4장 7절).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믿는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의 인물됨을 말할 때 ‘그릇이 크다’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특히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셨다고 하므로, 하나님은 토기장이로 사람은 질그릇으로 비유되곤 한다. 질그릇은 말 그대로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그런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평범하고 값싼 것이다. 그릇도 가지가지인데 왜 하필이면 질그릇인가?

질그릇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질그릇에 대한 상부터 수정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유약을 바르고 구워서 겉에 윤기가 흐르는 뚝배기 그릇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질그릇은, 그런 것이 아니라, 고분 발굴 현장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황토 빛 토기이다. 그런 그릇은 물을 담으면 꼭 물이 그 안에 스며들거나 흙의 성분이 물에 녹아 나올 것만 같다. 물론 실제로는 질그릇을 그렇게까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질그릇은 그 안에 담긴 것이 조금이라도 스며들 수 있는 그릇이라는 통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위기에는 질그릇에 부정한 것이 담기거나 부정한 사람이 질그릇을 만지면 그 그릇이 부정해진다는 사고가 나온다(11:33; 15:12).

이와 같이, 질그릇의 특성은, 그 안에 담긴 것에 의해서 변화되기 쉽다는 데 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안에 담긴 보물에 비유한 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다. 그것은 물건처럼 그릇에 담았다가 꺼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물처럼 쏟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질그릇에 한번 담기면 그것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다시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흙으로서 질그릇이 인간 존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안에 담긴 보물은 이런 존재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탤런트들이 입던 옷을 무슨 경매에 내 놓으면 본래 정가의 몇 배 값으로 팔린다고 한다. 유명 탤런트가 입은 옷은, 중고품인데도, 그가 그것을 한번 사용했다는 것, 한번 걸쳤다는 것 때문에 그 가치가 몇 배나 올라간다.

바울이 말하는 보물을 담은 질그릇도 이런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빛이 이 세상을 비추었고, 우리는 이 빛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질그릇의 의미는, 그저 값싸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럼 그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빛은 어떤 것인가?

질그릇에 담긴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 4:6).

바울은 대조법을 잘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첫 사람 아담과 대조하여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였다(고전 15:45).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비춘 환한 빛을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환한 빛과 대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빛이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빛은 우리 마음속을 비추는 빛이요 우리 존재를 밝히는 빛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바로 이 빛을 간직한 존재이기에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환함, ‘존재의 환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햇빛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오는 환함으로 사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본래 환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환한 해를 찾아 해 뜨는 곳을 찾아서 이곳 한반도까지 왔다고 한다. 환한 달이 뜨면 쳐다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정월대보름 팔월한가위 같은 명절이 생겼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은 ‘환한 분’이라는 뜻이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성도 ‘밝’ 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백두산, 태백산, 소백산, 장백산 등 신령한 산에는 백(白) 자가 들어가는데 그것도 ‘밝’ 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밝은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우리 민족에게는 존재 속에서 드러나는 환함이 있다. 그렇게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참 밝다. 한국 사람의 얼굴 하면 대개,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하회탈의 함박웃음, 신라 흥륜사지 수막새 기와에 나타난 은은한 미소, 신라 토우들의 수더분한 웃음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문화재들이 참으로 귀한 것은, 그 예술적인 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민족의 존재의 환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 이런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그 얼굴이 꼭 어릴 적 시골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웃는 얼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심한 고생으로 얼굴은 그을렸어도 그 표정은 참 밝았다. 뭐 그렇게 재미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모이기만 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경상도에서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있잖니껴-” 하면서 밝게 이야기한다. 전라도에서는 아무리 찌들어도 “그래라우?” 하면서 사람들을 곧잘 웃기고, 익살맞은 얘기도 잘한다. 예수를 알기 전에도 우리에게 이런 밝음이 있었다면, 예수를 알고 나서는 그 밝음이 얼마나 더하겠는가.

최근에 IMF다 뭐다 하면서 국가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기억해 보라. 사람들의 표정마저도 어두워진 것 같지 않았던가. 노숙자들이 늘어나고, 사망률도 증가하고 암 발생률도 급격히 증가했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지금보다 몇 배나 더한 어려움들을 겪으면서도, 그 웃음 하나 잃지 않았고, 그 밝음 하나 지켜 왔는데,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부를 누리기는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쉽게 우리 존재의 밝음을, 환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의학을 공부하는 분들이다. 그 과정이 힘들기는 해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 준다는 점에서 보람있는 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는데, 오늘날은 의사들이 그 일을 하고 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 병든 사람이 기를 펴고 밝게 살도록 해 주셨다. 병을 고쳐 주고 나서 항상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 “병에서 놓여서 평안하거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하고 안심시켜 주셨다. 병을 고쳐 주는 것뿐 아니라 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어서, 그 사람의 존재의 환함을 찾아 주었다. 예수의 이런 방식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서 두 번 또 다른 일로 한번 모두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갔다가 엉겁결에 수술하게 되었고, 두 번째는 해산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수술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째는 혹시 마취를 하고 나서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술하기 직전에 담당 의사가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셨다고 한다. 길지 않은 기도였고, 기도 내용은 기억나지도 않지만 그 기도를 듣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그 수술은 잘 되었고 아내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데, 늘 그 의사 선생님의 기도를 기억하면서, 그때 수술을 잘 해 주신 것 못지않게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기도해 주신 것을 고맙게 느낀다고 한다.

환자들은 위기에 선 사람이고 기로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의사의 온화한 웃음 하나, 짧은 기도 한 마디에서도 큰 위로와 평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질그릇 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이 보물을 간직하고 산다고 했다. 여러분도 이 빛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의술을 열심히 배울 뿐 아니라, 늘 이 빛을 간직하고 살기 바란다. 여러분 속에서 존재의 환함이 드러날 때, 여러분이 병을 고쳐 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도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질그릇 같은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온전히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2002. 3. 25 이화여대 채플 설교)

김재성 / 민들레성서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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