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병원에서 운구(運柩) 버스가 출발했다고 직접 장지로 가라는 연락이 핸드폰으로 오다. 가는 김에 유아저씨와 함께 가려고 교회에 들리니 마침 방바닥에 써늘한 밥과 김치쪼가리 하나 놓고 주
저앉아 식사를 하며 텔리비죤을 보고 있다. 잘 먹이겠다고 모시고 와서는 저렇게 맨밥만 먹게 하니 미안하기 그지없구나.

나도 잘 못 먹는 주제에 아저씨까지 잘 대접해 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장사 집에나 데리고 가 실컷 얻어먹게 하자구나. 그냥 따라가게 하면 싱거울 테고 내 가운가방이나 들고 가시게 하자.

"유아저씨! 이 가방 좀 들고 가세요. 이 가운 가방은 큰 교회에서는 부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들고 가서 담임 목사님을 보좌하는 거요, 오늘 아저씨가 이 가방을 들고 가는 것은 우리 교회의 부목사님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시라 했더니 잘 보관해 두고 주일날과 어데 갈 때만 아껴 입는 지난 번 회갑 때 청장년 회원들이 해준 봄 잠바를 입고 나오시다. 새 승용차는 아니지만 세차를 하니 오랜만에 황사가 걷히고 깨끗한 흰색이 밝게 빛나는 봄빛에 과분하게 잘 어울린다.

아저씨를 앞상좌에 태우고 오늘은 담임목사의 보좌관이 되는 거라며 추켜 드리니 따뜻한 봄 햇살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시다. 고맙다는 뜻인지 아니면 가소롭다는 뜻인지- - - - .

탄금대 다리를 건너고 충주호 변을 달려 중앙 탑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500m 즘 달려 주덕 가는 길로 들어서니 얼마 안가 오른 편 조그만 야산 밑에 장지가 한눈에 들어오다. 이제야 포크레인 작업을 하느라고 한창 웅성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다가 참을 먹느라고 쉬는 중이다.

눈치보기에 익숙하신 유아저씨는 멀찌감치 가서 앉아 나의 신호만 기다리시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겸연쩍은 듯 가까이 오시다. 여러 손님들이 앉은 가운데에 자리를 하나 비워 주며 약간 속삭이는 말로 "아저씨, 오늘은 온 김에 술도 한잔해요, 이럴 때 안 먹으면 언제 먹어요, 떡도 많이 드시고 실컷 드시오"라고 하니 알았다는 듯이 큰 종이컵에 소주 한잔을 딸아 자신 있게 벌컥 마시고 떡도 맛있게 드시다.

우리 교인은 한 분도 없고 나와 아저씨만 있으니 술 먹은 비밀이 어디로 샐 때도 없고 참으로 유씨에게 좋은 기회가 온 거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분이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교회에 왔다가 교회 주방에 갇혀 제대로 맘놓고 술 한번 못 먹으니 얼마나 목이 컬컬하시겠는가.

그렇다고 목사가 술집에 데리고 가서 술을 사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목사 신분에 수퍼에 가서 소주를 사다가 주기도 그렇고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는가. 참으로 좋은 기회다. 내가 먼저 선수를 처서 먹으라고 하지 않으면 남들 맛있게 먹는 것보고 목마른 김에 오늘 저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술을 구하여 먹을 테니 차라리 선수를 처서 조금 먹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그런데 저 양반이 부목사 행세를 하며 내 가운 가방을 들고 와서는 소주를 마시고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밭 한 가운데 뻐드러지게 나자빠져 코를 골며 잠에 떨어지던가 아니면 술 취한 김에
하객들에게 추태나 보이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는 건가. 부목의 모가지가 떨어지기 전에 내 모가지가 먼저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맛있어 잘먹는 음식 뺏을 수도 없지 않은가. 에라 내가 그거 무서워서 목회 못했는가. 그냥 내버려두고 장례 하관식 집례를 다 마치고 집에 돌아올 즈음 아저씨를 찾으니 아침에 입
고 온 옷 그대로 깨끗한 모습으로 내 옆에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럼 그렇지 내가  믿고 자기를 데려 왔는데 실망시키겠는가.
    
2.
"여기 한 영혼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가 이제 육신의 몸을 벗고 다시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여기에 누어 계신 할머니는 80이 되어 가시지만 어제 충주의료원 영안실의 이 할머니 옆에 누어 있던 분은 사십대 초반인데 벌써 가시게 되었습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오늘 우리 모두 이 시간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언제 우리를 부를지 모르지만 내일이라도 부르시면 가야된다는 마음으로 늘 하루하루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며 사십시다.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피곤에 지친 사람들 앞에서 긴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간단히 하관식을 마치고 시신 하관 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니 마지막 할머니가 가지고 가시는 것은 평소에 읽으시던 성경책 한
권뿐이다. 우리도 갈 때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저렇게 빈손으로 갈 것이 아닌가.

이세상 사는 동안에 아무리 열심히 주워 모아도 본향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거구나. 영원한 본향으로 갈 때에 가장 가기 싫어 몸부림치는 사람은 아마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 거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 땅을 많이 가진 사람,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 등 등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너무나 가기 싫어 몸부림 칠 것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죽을 준비중에 하나는 내 가진 것을 하나 하나 버리는 일일 게다. 욕심도 명예도 권세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하나 하나 버리기 시작하는 것이 죽을 준비가 아니겠는가. 석가나 예수처럼 어릴 때부터 명예도 부도 다 버리고 갈 준비를 하는 분은 성인이요 철인이 아닌가.

그러나 고희(古稀)가 넘어서도 갈 길이 아직도 먼 줄 알고 착각 속에 빠져 욕심만 부리는 분도 있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안 되는 줄로 아는 분들이 많으니 늙으면 어느 정도 몸도 함께 쇠약
해 져야 정상인가 보다. 성인군자와 졸부와의 차이는 바로 욕심이 적고 많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도 욕심을 버리라고 목이 아프도록 외치셨건만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의 욕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점점 더 높이 치솟고 있으니 이것이 무속신앙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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