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교계 현안에 대한 20~30대 청년의 이야기를 꾸준히 담아내기 위해 '2030이 한국교회에게'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 주
모순을 넘고자 세상으로

교회는 세상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태신앙으로 살다가 20대에 들어서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위해 살고자 했다. 그렇게 하려고 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예배란 예배는 다 드리고, 봉사란 봉사는 시키는 대로 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신학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 몸과 마음이 다치고 지쳐 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다. 교회에서는 다 '영적인 문제'로 치부했지만 나는 신앙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눈을 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생활 사이의 모순이기도 했다.

교회에서 느낀 가장 큰 모순은 '세상'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 안에 있을 때는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한 줄 알았다. '세상에는 온갖 죄악과 불의가 넘쳐 난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야 선을 이룰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자연스레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보니 온통 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 속에 자신의 모습을 숨겨 놓으셨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찾으셨다. 예수님은 성전·회당에 묶인 분이 아니라 세상을 직접 거닐며 사랑이 무엇인지 보이셨다.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진실하게 성경을 봤을 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세상 속에 계신 분이었다. 정작 나 자신은 하나님이 계신 세상을 알지 못하고 교회에만 묶여 있었다. 그래서 교회를 나와 자유를 선택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 사역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개척자들'이라는 평화 사역 공동체에 들어갔다. 개척자들은 '세상 속에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념 아래, 분쟁·재난 지역에서 평화운동을 해 온 공동체다. 전쟁과 군사화에 반대하면서 제주도 강정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도 하고 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가 평화운동으로 넘어간 일은 다소 극적인 전환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일은 자유롭고, 진실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경험이었다.

고통 있는 곳이 교회의 자리

평화운동을 하며 알게 된 것 첫 번째는 세상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척자들이 하는 사업 중 하나는 미얀마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난민을 돕는 것이다. 2017년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학살·방화·강간·약탈이 자행됐다. 70만 명이 가족을 잃고 집을 떠나 방글라데시로 도망쳤다. 방글라데시 소재 로힝야 난민 캠프에는 오래전 피난 온 난민과 최근에 유입된 난민까지 120만 명이 갇혀 있다. 개척자들은 로힝야 난민 캠프 안에 커뮤니티를 만들고 지원하는 사업을 한다.

난민 캠프 집들은 대나무와 비닐로 만든 임시 거처다. 좁은 땅에 수많은 난민이 살아가니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바닥엔 모래가 일고 배수로조차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오염된 식수 환경 속에 질병이 생겨난다. 이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난민 캠프에는 출입구가 하나뿐이다. 나머지 구역은 울타리를 치고 통제하고 있다. 난민들은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교육·의료도 받을 수 없다. 그저 주어진 식량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여러 현장을 다녔던 개척자들 멤버 중 하나는 로힝야족 난민 캠프가 가장 심각한 곳이라고 말했다.

로힝야족을 통해 마주한 세상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미얀마 군부에게 조직적인 왜곡·탄압·학살을 당했고, 도망쳐 온 방글라데시에서도 '자국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하에 울타리 안에 갇혔다. 미얀마·방글라데시 양측 모두에서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자유·희망을 모두 잃어버렸다.

나는 세상의 고통이 우연히 혹은 어쩔 수 없이 온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악을 통해 온 것임을 깨달았다. 고통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었다. 가난하다고 돈을 주면 해결되는 게 아니고, 집을 잃었다고 집을 주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악의 체제·구조 속에서 고통과 씨름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하며 희망이 돼 줄 누군가였다.

고통받는 세상을 보며 비로소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게 됐다. 예수님이 왜 길 위에 계셨고, 왜 낮은 곳으로 가셨고, 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셨는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괴롭히는 불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보이지 않던 불의가 고통받는 자의 자리에 가면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가장 낮은 곳은 온갖 불의가 드러나는 곳이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셔서 교묘하게 은폐된 불의를 폭로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자라면 응당 고통받는 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하시고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다. 이 대목은 나에게 교회뿐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세상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교회 건물만 하나님을 찾는 자리가 아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교회의 자리가 어디인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진리 실험

평화운동을 하며 알게 된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제주도 강정에서 반전 평화운동을 하면서 여러 활동가를 만나게 됐다. 그들은 각자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이루기 위해 저항한다. 생명·평화·환경·인권·평등·퀴어 등 좇는 가치는 다르지만 모두 세상을 평화롭고 조화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하나님나라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런 가치가 사회에 확립돼야 한다. 우리 활동가들이 저항하는 대상은 체제, 사람들의 인식, 기존 사회질서다. 우리가 생활하는 양식 안에서 저항해야 할 불의를 발견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저항한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원하시는 세상의 모습은 이러한 저항의 과정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17절)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통받는 세상의 속으로 오셔서 모든 불의를 드러내셨다. 이제 그 불의를 없애고 다시 세상을 회복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곧 세상을 회복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요한복음 3장 21절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외면적인 규칙 준수가 아닌 내면적인 자각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나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열어 놓으셨다. 진리는 간단명료하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리가 적혀 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많은 이가 이 진리를 잘 찾지 못한다. 예수님 말씀에서 자신의 생각과 생활을 뒷받침할 내용만 찾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9절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라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이를 "대부분의 인간이 사색하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려고 애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은 진리 속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자신이 보내고 있는 쾌적하고 습관이 된 생활이야말로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의 핵심은 '실천'에 있다. "하나님 안에서 행함"은 진리를 따라 자기 생활을 바꿔 내는 일이다. 이미 세상에 적응된 나의 생활에는 진리와 모순되는 지점이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체제 안에는 불의가 교묘하게 은폐돼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모두가 '살인하지 말라'는 말에는 동의하겠지만 군대에는 살인을 허용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도 동의하겠지만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이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내 생활을 바꾸든지 아니면 진리를 잠시 접어 두든지. 진리는 실천해야 진리가 된다. 불의가 은폐돼 있는 기존 생활 질서를 바꾸지 않는 한, 세상을 회복할 수 없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꾸짖으신 이유는 그들이 외면적 규칙만을 지키며 하나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며 병자를 고치고, 돈의 노예가 된 성전을 뒤엎으시고, 두 렙돈 헌금한 여인을 칭찬하신 것,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것, 결국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모두 불의한 기존 생활을 바꾸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불의한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 즉 모든 생명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각자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삶을 바꿀 때 가능하다.

우리는 세상 속을 살아간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도 세상에 있다. 하나님도 이웃도 모두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만날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인간·자연 모두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는 세상의 낮은 곳으로 부름 받은 공동체다. 세상과 벽을 쌓고 교회 안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진리를 사유하며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더는 '거룩·영성·은혜' 같은 신비하고 추상적인 종교 언어에 갇히지 말고, 고통 있는 현장으로 찾아가 '어떤 가치가 하나님의 속성인지', '무엇이 하나님나라를 상상하게 만드는지'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윤혜성 / 세상을 알기 위해 교회를 뛰쳐나왔다가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고통과 불의를 보며 우울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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