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영국 리처드 페이지(Richard Page) 전 치안판사(magistrate)는 2014년 "아이는 결혼한 엄마·아빠 밑에서 자라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영국 치안판사직에서 해임됐다. 페이지는 자신의 해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잇따라 패소했다. 올해 2월 26일 영국 항소법원(Court of Appeal)은 "해임 근거는 전적으로 합법적이며, 그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3월 30일 자 지면에는 리처드 페이지 사례가 소개됐다. 영국 기독교 법률 센터인 크리스천컨선(Christian Concern) 대표 안드레아 윌리엄스(Andrea Williams) 변호사는 칼럼에서 "판사가 아이에게 엄마 아빠로 된 가정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는 단지 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이어 "한국도 차별금지법을 처음부터 막지 않는다면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한국 반동성애 진영은 리처드 페이지 사례를 언급하면서 한국에서 차별금지법(또는 평등법)이 제정되면 기독교적 신념을 표현한 법조인이 처벌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복음법률가회(조배숙 상임대표)가 지난해 10월 20일 개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바로 알기 법조 토론회'에서도 리처드 페이지가 등장했다.

복음법률가회는 차별금지법 제37~40조 '행정 서비스 등의 제공·이용'에 대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관련된 영역에서 동성애 옹호 정상화 의견 표현만 허용될 뿐 동성애 반대나 비판 의견 표현이 금지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련 해외 사례로 "영국의 기독교 치안판사인 리처드 페이지는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은 엄마와 아빠에게 양육되는 것에 있다'는 발언을 해 내각부장관과 잉글랜드 최고판사에 의해 징계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일부를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리처드 페이지는 사적인 자리에서 표현한 기독교적 신념 때문에, 혹은 평등법을 위반해 해임된 게 아니다. 오히려 영국 사법부는 거듭된 소송에서 그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는 영국 항소법원 판결문과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리처드 페이지와 관련된 사실을 따져 봤다.

리처드 페이지 전 치안판사는 미디어 지침을 위반하고 영국 공영방송 BBC에 출연해 "입양 부모는 남자와 여자인 것이 더 좋다"고 공개 발언했다 . BBC브렉퍼스트 영상 갈무리
리처드 페이지 전 치안판사는 미디어 지침을 위반하고 영국 공영방송 BBC에 출연해 "입양 부모는 남자와 여자인 것이 더 좋다"고 공개 발언했다 . BBC브렉퍼스트 영상 갈무리
1. 리처드 페이지는 '언론에서 한 공개 발언' 때문에 해임됐다

먼저 영국의 법관 제도를 살펴보자. 리처드 페이지는 1999년 영국 켄트주 치안법원에서 치안판사로 임명됐다. 치안판사는 한국에 없는 제도다. 한국 '판사'와 달리, 변호사 자격이 없는 일반인을 임명한다. 관할 구역별 치안법원에서 근무하면서 형사사건의 경범죄, 가정법 사건 등을 다룬다.

치안판사는 임명 시 △법에 따라 정의를 집행한다 △정치적·인종적·성적·기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판단한다 △사적·업무적·공적 삶에서 신중하게 행동하고 명예와 좋은 평판을 유지한다 등의 내용을 담은 '선언과 동의(Declaration and Undertaking)'에 서약한다. 리처드 페이지는 이 서약과 함께 "악감정·편애·호의·두려움 없이 지역 관례·법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고 선서했다.

2012년에는 '미디어 출연' 지침도 받았다. 사법부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이 가이드라인에는 △언론과 소통해서는 안 되고 △일반·특수 사안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해야 하고 △그럼에도 언론 발언을 고려할 경우 반드시 먼저 사법 공보실과 상의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리처드 페이지는 2014년 7월 2일 사건의 발단이 된 동성 커플의 입양 신청 재판에 참여했다. 영국은 2002년 통과된 '입양 및 어린이 법률(Adoption and Children Act 2002)'에 따라 비혼자·동성애자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다. 법정에는 사회복지사가 작성한 입양 가정 종합 보고서가 제출됐다. 이 자리에서 페이지는 기독교 신념을 바탕으로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이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밝히고 입양 명령서 서명도 거부했다. 하지만 과반수 동의로 입양이 승인됐다.

재판에 관여한 의장과 서기는 리처드 페이지의 관점과 서명 거부 행위에 문제를 제기했다. 켄트주 자문위원회는 이 문제로 법에 근거하지 않고 판결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국 사법부는 헌법개혁법(Constitutional Reform Act 2005)을 근거로 징계 절차를 진행했다.

페이지는 청문회에서도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이라며 동성애자들의 입양에 반대 견해를 반복했다. 청문회 패널들은 "판결하는 데 있어서 종교적 신념과 편견이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징계를 권고했다. 대법원장과 법무부장관은 2014년 12월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이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재교육을 명령했다.

재교육을 받은 페이지는 재판석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법원 의장은 페이지에게 미디어와 접촉하기 전 공보실과 상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지침을 어기고 2015년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데일리메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입양 부모가 남자와 여자면 좋겠다"고 공개 발언했다. 결국 2016년 2월 영국 사법부는 리처드 페이지를 해임했다. 대법원장과 법무부장관은 해임을 알리는 편지에서, 임명 시 했던 서약과 미디어 지침 위반을 문제 삼았다.

해임에 불복한 리처드 페이지는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런던남부법원과 2019년 고용재판소(Employment Tribunal)는 페이지가 낸 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법원은 페이지가 언론에서 한 공개 발언이 치안판사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위법행위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고용항소재판소(Employment Appeal Tribunal)와 영국 항소법원도 페이지 해임이 합법적이라고 봤다. "(리처드 페이지가) 동성 커플의 입양과 관련된 사건을 다룰 때 법률이나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에 근거해 진행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며 판결 이유를 밝혔다.

영국 대법원장과 법무부장관은 리처드 페이지의 '종교적 신념'은 존중했지만, 그것이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영국 대법원장과 법무부장관은 리처드 페이지의 '종교적 신념'은 존중하지만, 그것이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2. 차별금지법은 판사를 해임하는 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리처드 페이지 사례처럼 판사가 종교적 신념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차별금지법 제38조(수사‧재판에서의 동등 대우) 1항은 '수사‧재판 절차 및 서비스에 있어 관련 기관은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조항은 사법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외국인이라도 재판 내용을 제대로 숙지할 수 있어야 하고, 절차적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판사는 다른 법률이 아닌 '헌법'에 의해서만 탄핵될 수 있다. 헌법은 판사의 신분을 보장한다. 헌법 제106조 제1항은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않고서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 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한다.

해임 요건인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가 쉬운 일일까. 법관의 탄핵을 위해서는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발의 후 가결돼야 한다. 설령 국회 문턱을 넘더라도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확정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헌재 최종 인용으로 판사가 탄핵된 경우는 '0건'이다.

결론: 리처드 페이지 사례는 한국의 차별금지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론자들은 리처드 페이지 사례를 들며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 비판이 금지된다고 말한다. 법조인이 기독교 신앙에 따라 동성애를 죄라도 하지도 못하고, 표현의자유를 침해받고, 징계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동성애 진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리처드 페이지는 치안판사로서 선언 내용과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위반하고, 법이 아닌 개인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겠다고 공개 진술했기 때문에 해임된 것이다. 반동성애 진영의 논리대로라면 불교나 이슬람교 신앙을 가진 판사가 종교적 신념을 앞세워 선언 내용을 지키지 않고,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위반해도 감싸 줘야 한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리처드 페이지 사례를 들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일은 '허위·왜곡' 주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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