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1. 귤, 사과, 감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2. 건포도와 땅콩을 올린다.

3. 취향껏 마요네즈를 뿌려 주고 머스타드를 한술 더한다.

4. 슬슬 섞어 낸다.

사라다를 먹기에는 이맘때가 좋다. 설 명절 친척집을 나서던 길에 엉겁결에 쥐게 된 과일 봉투가 냉장고에서 사망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상한 부분은 성큼성큼 잘라 내자. 아쉽다고 다 주워 먹을 것도 아니니 미련 남길 것도 없다. 약간의 비타민이라도 성한 채로 먹으려면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도려내 혈색 좋은 과육만 남기는 편이 낫다. 마요네즈는 취향껏 뿌려 준다. 이렇게 많이 뿌릴 거면 과일은 왜 먹느냐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마요네즈에 뒤덮여도 죄책감을 덜어 줄 만큼의 상큼함은 남아 있다. 아무튼 과일 아닌가! 

'사라다'를 검색하니 '샐러드'의 잘못된 표현이라 한다. 양식 샐러드가 일본에 소개되며 발음 그대로 사라다라 부르게 됐으니 표준어인 샐러드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모양이다. 그럴싸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자연스럽게 사라다라 부르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음식과 언어의 지분 절반은 켜켜이 쌓인 기억의 몫이다. '샐러드'라고 하면 양상추 툭툭 끊어 오리엔탈이나 렌치 소스를 올린 것이 생각나고, '사라다'라고 하면 마요네즈에 버무린 과일 반찬이 생각나는 것은 그 기억의 확고한 자기주장이다. 그걸 영 없는 일로 할 수도 없고, 이제 와서는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도 할 만하니 그저 이 또한 한식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자연스럽다. 아무렴 사라다는 사라다다. 

머릿속 사라다가 외치는 목소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명절이거나, 손님맞이를 할 때면 밥상 위 시뻘건 반찬들 옆에 흰색 사라다가 한 첩을 차지하고 있다. 양식 소스인 마요네즈에 버무린 이 유별난 반찬은 메인 메뉴가 고등어구이든 제육볶음이든, 청국장이든 김치찌개든 상관하지 않고 반찬 가짓수를 늘리기 위한 명목으로 상에 오르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세련된 음식으로 대접받았을지 모르겠다. 어떤 세대 사람들에게는 추억이고 내 나이 때 사람들에게는 '그 옛날'이라 할 만한 시절 호프집에서는, 마요네즈 베이스의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뿌려 햄·야채 따위와 버무린 멕시칸 샐러드를 어엿한 안주로 팔았다고 한다. 조금 더 먼 과거, 고급 한식당에서는 고정 반찬으로 내놓는 사라다가 유명했다고 하니, 마요네즈에 버무린 어떤 음식들에는 나름의 특별한 지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명성에 시간의 맛이 더해져 사라다는 이제 추억의 대명사가 됐다. 

일러스트 gom lee
일러스트 gom lee

다시 두꺼운 철문의 농성장 이야기다. 밤을 지새워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학교 레포트를 쓰는 사람, 책 읽는 사람, 영화를 보거나 기타 퉁기거나 하는 사람 등 각자가 지루한 밤을 유익하게 보내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하고 모였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낯설었던 사람들 얼굴이 가장 낯익은 얼굴이 될 즈음이면, 하룻밤 보낼 준비는 다 허사가 되고 날밤을 수다로 홀랑 까먹는 게 예삿일이다. 현장 이야기로 시작한 수다는 이내 정치 이야기가 돼 한참을 불붙다가 푹 꺼져 재가 된다. 그렇게 잠이 들어도 좋으련만, 뜬눈으로 밤샐 예정이었던 어떤 이가 바람을 후후 불어 다시 불씨를 틔운다. 불씨는 오래도록 품고만 살았던 꿈 이야기가 돼 넘실거리기도 하고,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토가 되기도 한다. 누구 하나 분명한 해답이 없고, 가진 것도 변변찮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폭력을 기다리며 기약 없는 투쟁의 끝을 바라면서도, 몸서리치게 추운 철문 밖 세상 탓에 모닥불 피운 것마냥 그렇게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느 정도 서로의 용기가 돼 줬다. 

사장님은 그런 우리에게 과일을 먹이고 싶었나 보다. 직접 사다 놓기도 하고, 연대 물품으로 들어오기도 한 과일 박스가 늘 잘 보이는 곳에 쌓여 있었다. 귤이야 곧잘 까먹었지만, 사과나 감 같을 것을 일부러 찾아 먹는 사람은 드물었다. 자취방 냉장고 한구석, 명절에 받은 과일 몇 개를 끝내 먹지 않아 상하게 만드는 일과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스댕 다라이에 귤을 까서 넣는다. 사과와 단감은 한입 크기로 잘라 넣었다. 안줏거리 할 요량으로 넉넉히 두고 있던 땅콩과 건포도를 붓는 것만으로 재료 손질은 끝이다. 마요네즈를 넉넉히 뿌린다. 사장님 레시피에는 설탕이나 후추가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머스타드를 크게 한술 넣어 느끼함을 잡고 단맛을 더한다. 슬슬 섞어 그릇에 옮겨 담아 연대의 밥상에 올렸다. 노란 머스타드 덕에 누리끼리한 '농성장 사라다'. 다른 반찬 집어 먹다 괜히 심심해서 몇 개 집어 먹게 되는 요상한 반찬. 사장님 의도와 관계없이 건포도만 골라 먹는 얄미운 사람도 있고, 넉살 좋게 숟가락으로 퍼먹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얄미운 사람 축에 속했다. 쌀밥에 사과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땅콩과 감만 골라 먹는.

그것도 이제 몇 년이 지났다. 어느 정도는 추억이 됐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떠나갔거나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다. 무섭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철문의 기억도 흐려졌다. 밤새 나누던 이야기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구호도, 발언도, 노래도 물밀 듯 밀려오는 또 다른 구호 속에 그렇게 쓸려 갔을까. 아니, 아마 그걸 그대로 살아 낸다고 아등바등하는 사이, 살과 피가 되고 삶이 되고 또 연대가 됐겠지. 마요네즈 묻어 더 고소해진 사라다의 땅콩을 아작하고 씹으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이야기들이 생각나지 않아 갈피를 못 잡을 때면, 기억 켜켜이 쌓인 추억의 음식을 먹자. 무성했던 구호와 밤을 지새운 토론이 다시 불을 지피면, 또 오늘의 철문을 찾아 연대의 밥상을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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