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1. 육수
- 멸치
- 다시마
- 양파(껍질 깐 것)
- 통마늘 몇 알

2. 양념장
- 몽고 간장, 조선간장
- 방앗간에서 직접 짠 참기름
- 깨소금, 다진 마늘, 얇게 저민 고추
- 굵은 고춧가루

3. 고명
- 소고기 꾸미(소금, 간장, 미원)
- 호박 볶음
- 계란 지단

4. 국수
- 노란 봉투에 들어 있는 옛날 소면이 좋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여지없이 국수 한 그릇이었다. 들통에 잔뜩 끓여 놓은 멸치 육수가 무섭게 김을 뿜어낸다. 고명은 호박 볶음에 김 가루. 소면이 담긴 그릇을 가져다가 줄을 서면 깊게 패인 국자에 가득 담긴 국물이 스댕 그릇에 쏟아지며 살짝 불어 달라붙은 소면 사이를 뜨겁게 달군다.

이곳은 식당이 아니다. 테이블마다 양념장이 따로 놓여 있길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커다란 수저통 옆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통에서 양념장을 떠다가 자리에 앉아야 한다. 적게 넣으면 싱겁고, 많이 넣으면 짜다. 뒤로 길게 늘어선 줄 사이로 들어가 부족한 양념장을 덜어 오거나 국물을 더 달라 말하기는 영 어렵다. 멈칫하는 것도 잠깐, 감을 믿기로 한다. 양념장 한 숟갈을 크게 떠 면 위에 얹고 자리에 앉는다.

아무렇게나 담긴 면을 젓가락으로 슬슬 건드려 풀어 헤친다.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고명을 얹을 필요는 없다. 후루룩 면을 넘기다 보면, 호박이니 지단이니 김 가루니 하는 것들이 걸려 넘어온다. 그렇게 얻어 걸린 고명과 국수를 씹어 넘기다 목이 막히면 국물을 마시고, 질린다 싶으면 김치를 얹어 먹는다. 수다를 떨든, 오가는 사람마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든, 국수 한 그릇 먹는 건 금방이다. 남은 국물과 고명, 젓가락질에 잘려 나간 국수 건더기를 한입에 들이키고 일어난다. 회전율이 생명인 교회 식당에 제격인 음식, 잔치 국수다.

비빔국수, 간장 국수, 칼국수, 어묵 국수 등. 국수 이름은 참 다양하다. 이름 붙인 경위도 대충 알 만하다. 잔치 국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국수다. 그냥 국수라 불러도 좋았을 것이고, 멸치 국수라 해도 괜찮을 텐데 '잔치 국수'라 불러야 익숙하다. 만드는 일이 간단하지도 않다. 집에서 끓여 먹을라치면 어쩐지 육수 맛이 부족하고, 간이나 맞추는 용도인 줄 알았던 양념장은 비빔국수 양념만큼 재료가 들어간다. 지단에 호박 볶음은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부엌에 서면 막막함과 귀찮음이 몰려온다. 거기에 소고기 볶은 것까지 올라가는 푸짐한 한 그릇을 원한다면 일은 더 복잡해진다. 저렴하면서도 수고로운 음식이다. 먹는 입이야 간단하겠지만.

일러스트 gom lee
일러스트 gom lee

국수는 원래 귀한 음식이었다. 고온 다습한 한반도에는 밀 농사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치 국수'라 부르게 된 연유도 아마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으로 '밀국수'가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던 국수가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흔해지며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비슷한 시기, 먹고살기 어려웠던 농촌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며 생존을 위한 음식 장사가 시작된다. 바야흐로 노점상 전성시대다.

저렴하게 유통되는 밀가루는 떡볶이, 어묵, 튀김이 됐다. 특별한 기술 없어도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음식들은 지친 마음들 달래 주는 값싼 위로였다. 거리에 즐비한 노점상들은, 서울로 몰려들어야만 했던 가난한 인구의 끈질긴 생명력과 호주머니 가벼운 도시 사람들의 배고픔이 만나 그려 낸 도시의 풍경이다. 국수는 그 풍경화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늦은 밤 광화문 거리를 지나다 '짜장면', '우동'이라 써 붙인 포장마차를 만난 적 있는지?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길에도 어쩐지 허해서 국수 한 그릇을 찾고,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다음 날 숙취를 달랜다는 명목으로 둘 또는 셋이 앉아 국수 한 그릇에 결국 또 소주를 한 병 시키고야 마는 술꾼들의 새벽 안주, 그중에서도 제일은 호박 고명 푸짐하게 올라 따뜻하게 속을 달래는 잔치 국수다.

아현역 인근에 오래된 '아현포차' 거리가 있었다. 포차 거리가 철거되고 지금은 무심한 화단만 잔뜩 놓여 있는 그 길은 40년 전만 해도 쓰레기 집하장이었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이 생기며 아현시장 인근에서 리어카를 끌고 분식을 팔며 장사하던 상인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하나둘 자리를 잡아 포차 거리가 생겼다. 지저분했던 거리에 포차 거리가 생기니, 구청장까지 와서 축사했다는 옛 이야기를 당시 사장님들께 전해 듣는다.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 아현동의 가난한 주민들, 학생들을 주된 고객으로 30년을 장사했다. 동네가 재개발되며 오랜 단골들이 이 거대한 도시 곳곳 가난한 동네로 쫓겨나듯 흩어졌다. 그 빈자리에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마을버스 다니는 동네는 후져 보인다며, 집값 걱정에 버스 노선까지 민원으로 없앤 살뜰한 새 이웃이다. 포차 거리가 기꺼워 보일 리 없다. 여느 날과 같았던 어느 날 새벽 6시, 구청 직원과 용역을 동원한 강제집행이 있었다. 30년 자리를 지켜 온 포차의 얇은 합판이 포크레인질 한두 번에 모조리 무너진다. 나뒹구는 식기 사이로 늙은 상인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날 아침에는 밤을 지새운 술꾼도 없다. 철거는 짧았다.

그대로 쫓겨날 수 없었던 상인들과 예배를 드렸다. 십자가를 선두에 두고 떼제(Taizé) 찬양을 부르며 아파트 단지를 행진했다. 창문을 열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침묵의 밤을 찢는 소리가 있다. 조용한 떼제 찬양 사이 목청껏 외치는 '작은 거인'의 목소리다. 욕지기를 쏟아 내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밤, 찢어지는 목소리만 메아리쳐 되돌아온다.

작은 거인은 아현동에서 오래 장사했다. 매콤한 곰장어 볶음도 좋고, 질 좋은 국내산 생삼겹 사다가 그때그때 볶아 주는 삼겹살 볶음도 인기였다. 손님들이 얼큰하게 취할 때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 찬송가며 가요며 구성지게 불러 단골들이 좋아했다. 그 옛날, 주머니 가벼운 학생으로 안주 하나에 소주 여러 병 먹던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찾아와 10만 원씩 쥐어 주곤 했단다. 그 재미에, 가난한 자녀와 손녀를 부양하기 위해 낮이면 장을 보고, 저녁이면 가게 문을 열었다.

육·해·공 아우르는 '안주 일체'를 내놓았지만 가장 인기있던 것은 한 그릇 잔치 국수다. 몇 년 만에 찾아오는 반가운 옛 단골들도 어김없이 잔치 국수를 찾는다. 예배 후 아파트 단지 행진까지 함께하느라 지친 연대인들에게 내놓은 음식도 임시로 마련한 포차에서 끓인 잔치 국수다. 가끔은 라면이 먹고 싶어 주문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크게 혼나며 국수를 먹게 된다. 단골과의 오랜 인연이 자랑인 작은 거인의 인생에서 잔치 국수는 부정할 수 없는 일등 공신이다.

일러스트 g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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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멸치를 사다가 다시마와 함께 끓인다. 깔끔한 맛이 생명이라며 양파는 껍질을 다 까서 넣고, 남들 넣는 파 뿌리는 국물이 지저분해진다며 넣지 않는다. 마늘 몇 알도 넣어 준다. 육수가 팔팔 끓는 동안 양념장을 준비하면 된다.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숙성하면 더 맛있겠지만, 집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으니 흉내만 내 보자. 깊은 맛을 내기 위해 간장도 두 가지를 쓰는 게 좋다. 감칠맛 나는 몽고 간장에 조선간장을 섞는다. 약간의 참기름이 필요한데, 시중에 파는 것 말고 소주병에 담아 주는 방앗간에서 짠 참기름을 써야 맛이 있단다. 깨소금과 다진 마늘을 넣고 고추를 얇게 썰어 넣는다. 고춧가루는 꼭 굵은 것을 써야 한단다. 고운 것은 양념장이 되직해져 좋지 않다나.

작은 거인의 잔치 국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미'다. 북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사전에서는 '국이나 찌개에 넣는 고기붙이'라 하고, '고명'의 사투리가 꾸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소고기 간 것을 사다가 기름에 달달 볶는다. 겉면이 갈색이 될 때쯤 소금, 간장, 미원을 넣고 조려 가듯 볶으면 작은 거인표 꾸미 완성이다. 양념장은 양껏 먹어도, 꾸미는 올려 주는 만큼만 먹자.

지금부터는 쉽다. 호박을 볶고, 계란 지단을 지져 고명을 만든다. 육수 옆 화구에 불을 세게 올려 물을 끓인다. 국수 양은 알아서. 500원 동전 하나가 1인분이라던데, 포차에서는 500원짜리에 50원짜리 하나 더 얹은 양을 1인분으로 친다. 오래전부터 써 온 노란 봉투에 든 옛날 소면을 넣고 끓인 뒤, 찬물에 헹궈 탱글탱글한 면발을 만든다. 면을 예쁘게 담아 국물을 붓고 한쪽에 지단과 호박 볶음, 가운데에 꾸미를 올린다. 김 가루는 국물에 풀어질까 봐 손님상 내기 직전에 올려 숨을 살렸다. 백반 메뉴가 있으니 잔치 국수 반찬도 남다르다. 미역에 초장, 무말랭이와 고추 장아찌를 곁들였다. 배추김치는 당연하고.

그렇게 한 그릇을 먹으면, 아 배가 부르다. 들어갈 배가 없는데 자꾸만 더 먹으라 한다. 끓여 놓은 동태찌개 있다며 밥 한 숟갈만 더 하란다. 한 공기 같은 한 숟갈에 찌개를 받으면, 결국 백반 한 상이다. 그래 놓고 국숫값만 받으면 나는 미안해서 어쩌나. 어쩌긴 뭘 어째, 다시 와야지. 다 큰 그림이다.

얼마 전, 작은 거인은 임시로 운영하던 포차를 접고 아현시장의 임대료 싼 가게를 구해 들어갔다. 돌고 돌아 다시 아현동으로 가시냐 했더니, 그래서 아현동이란다. 모질었던 동네를 잊지 못해 30년 장사하다 하루아침 민원에 쫓겨났던 그 동네서 다시 국수를 삶는다.

시장을 오가는 아파트 주민들은 밤마다 찢어지듯 소리치던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행진이 끝나고 다 같이 둘러앉아 먹었던 잔치 국수는 30년간 지켜 온 레시피 그대로 아현동 식탁과 주안상에 오를 것이다. 연대의 밥상은 그렇게 한차례를 또 지나 보낸다. 연대인들은 단골이 다 됐고, 민원을 넣던 이들은 멋모르는 손님이 될 것이다. 다만 한 그릇 잔치 국수는 뜨겁게 끓어 다시 누군가의 속을 달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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