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다음은 2017년 개봉한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의 영화 '퍼스트 리폼드 First Reformed' 한 장면입니다. 구시대 유물과도 같은 작은 개혁파 교회, 퍼스트리폼드교회의 목회자 에른스트 톨러는 자기 교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거대 기업이 저질러 온 끔찍한 환경 파괴 문제를 알게 됩니다. 톨러가 그 기업의 CEO인 에드 발크와 만난 자리에서 불편한 이슈를 끄집어내, 아래와 같은 대화가 시작됩니다.

톨러: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분의 창조 세계에 하고 있는 짓에 대해 그분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발크: 환경 변화에 대한 무분별한 말이야 많이 있어 왔소.

톨러: 과학계의 합의가 있어요. 97퍼센트나요.

발크: 이건 복잡한 주제요.

톨러: 그렇지 않아요. 누가 이득을 취하는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이게 제가 스스로에게 줄곧 묻는 질문입니다.

발크: 우리 정치 이야긴 좀 그만할 수 없소?

톨러: 이건 정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한…

발크: 당신이 하나님 생각을 아시오? 당신이 하나님이랑 직접 대화했소?

이 대화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톨러 목사의 문제 제기에 발크가 반박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먼저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계의 합의, 즉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자연과학'이라는 진리 레짐(a truth regime)의 권위를 "무분별한 말"이라며 거부합니다. 동시에 그는 신학적인 진리의 권위 역시 거부합니다. "도대체 신이 있기나 한 것이며, 있다고 한들 누가 신의 속마음을 감히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발크의 응답은 물론 톨러의 지적대로 이익 또는 이윤의 추구라는 강력한 자본주의적 동기에 따르고 있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탈진실과 개소리

오늘날의 사회를 말할 때 종종 소환되는 유행어 중 하나는 '탈진실 사회'(post-truth society)입니다. '탈진실'(post-truth)은 2016년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기도 했고, <타임>지는 2017년 3월 잡지 커버 전면에 "진리는 죽었는가?"(Is Truth Dead?)라는 문구를 크게 싣기도 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7월 9일 기준으로 팩트 체크한 것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거짓말한 횟수가 2만 건을 넘었습니다.1) 하루 평균 16번 정도 직접 또는 트위터를 통해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보통 밥을 하루 세끼 먹는다는 걸 고려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속담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탈진실 사회는 단순히 정치인과 권력자가 거짓·기만을 이용하는 사회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사회입니다. 대통령의 거짓말 횟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제 사람들이 그것에 별로 신경을 안 쓴다는 것입니다. 올해 6월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 10명 중 8명은 여전히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2) 이들에게는 트럼프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자기 목소리를 대변하고 백인 집단에게 이익을 주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탈진실과 관련해 회자되는 또 하나의 용어가 있습니다.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관하여 On Bullshit>에서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합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말할 때 모두, 사람들은 실재에 관한 그들의 믿음에 의해 인도된다. 그 믿음은 그들이 세계를 정확하게 서술하거나 거짓으로 서술하게끔 인도한다. 이런 이유로, 거짓을 말하는 것은 개소리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 사람을 진실-말하기에 부적합하게 만들지 않는다. (중략) 개소리쟁이는 (중략) 거짓말쟁이가 하듯 진리의 권위를 거부하고 자신을 진리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는 진리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더 큰 진리의 적이다." (59~61쪽, 강조는 추가)

프랭크퍼트의 철학적 구분은 탈진실 사회 및 정치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해 줍니다. 개소리의 특징은 진리에 관한 '무관심', 즉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단절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내 주머니에 100달러가 있다'고 거짓말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명제('내 주머니엔 100달러가 없다')가 마음속에 있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거짓말쟁이는 진리에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소리하는 사람은 이러한 관심이 아예 결여된 사람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적으로 했던 많은 거짓말들은 진리·진실에 대한 무관심·냉소·경멸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프랭크퍼트가 말하는 개소리에 가깝습니다.

포퓰리즘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개소리쟁이들이 주목받고 그들의 개소리가 교회 안팎에서 선동에 이용되는 양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를 통해 생산·유통·소비되는 수많은 말은 거짓일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조롱·경멸·냉소를 포함하는 개소리에 가까워 보입니다. 오늘날 논자들은 '가짜 뉴스'와 '대안적 사실'이라는 형태로 전파되는 각종 개소리가 기본적인 사실들(이를테면, 기후변화나 코로나19에 대한 지식)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와 전문가의 권위에 대한 신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민주주의 근간을 허물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예컨대, 현재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음모론 단체 QAnon은 '딥 스테이트'(Deep State)라는 존재하지 않는 정부와 트럼프 사이의 전쟁 서사를 통해 적지 않은 미국인을 선동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3)

진리-말하기의 정치,
혹은 공동체로의 귀환

이러한 탈진실과 개소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근대 자연과학 모델을 따라 '상응론적인 진리 모델', 즉 객관적 실재와 우리 마음속 지식이 서로 일치할 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재천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탈근대적 이론들'을 탈진실 사회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하면서, 다시 '사실'과 '증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실증주의적'(neo-positivist)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탈진실 현상은 무엇보다도 '사실성'(facticity)에 대한 도전이며, 과학은 이에 맞서 진리·진실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전통 미디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팩트 체크'도 이러한 흐름의 일부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사진 출처 플리커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사진 출처 플리커

몇몇 신학자는 반대로 사실성에 대한 강박을 넘어 다시 '신학적'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습니다. 북미의 대표적인 후기자유주의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진리와 정치를 분리하는 근대 이후 경향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진리-말하기의 정치'를 옹호합니다. 하우어워스는 소비자적 개인주의에 함몰된 소위 '자유주의 근대성의 침탈'에 맞서 참된 덕성(virtue)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교적 서사, 전례, 비폭력적 실천으로 무장해 '사회윤리로서의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루터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를 재해석하면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진리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우어워스의 진리관은 신학적입니다. 그는 본회퍼를 따라 거짓말은 하나님이 주신 언어와 그분이 창조하신 실재 사이의 모순이라며, 인간의 말·언어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실재는 추상적·보편적 실재가 아닌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없이 살고자 하는 시도는 진실된 삶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하우어워스가 볼 때, 근대 이후 진리와 정치의 분리 현상은 히틀러로 대표되고 선동·기만으로 점철된 '파시즘'을 낳았습니다. 이에 맞서 하우어워스는 교회 고유의 진리-말하기의 정치를 옹호합니다. 교회는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맞서 진리·진실을 옹호하고 '진실됨의 덕성'을 기르는 대안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큰 거짓말뿐 아니라 작은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 한 공동체는 서로에게 진실되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곳으로 존재해야 한다. (중략) 그러한 사람들이 결여된 정치는 문자 그대로 거짓을 살게 될 운명에 처하며, 이는 폭력의 기초를 낳는다. 본회퍼는 교회가 하나님이 진실된 정치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세상의 창문에 두신 징표라고 믿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Performing the Faith: Bonhoeffer and the Practice of Nonviolence>, 70쪽)

세속 사회에 대한 교회의 대안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은 또 다른 신학자 스티븐 롱(D. Stephen Long)에게서도 발견됩니다. 하우어워스 제자였던 롱은 2019년 출간된 <탈진실 시대에 진리 말하기>에서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트럼프 시대를 배경으로 신학적·형이상학적 진리를 재천명합니다.

"진리는 거짓말보다 더 강력한데, 이는 하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중략) 진리는 기초적이다. 거짓말은 진리에게 기생충 또는 바이러스와 같다. 그것은 진리라는 숙주 위에서 살아간다." (스티븐 롱, <Truth Telling in a Post-Truth World>, 12~13쪽)

롱은 하우어워스와 유사하게 교회론적 접근을 취합니다. "진리 말하기의 덕성은 그러한 덕성으로만 유지될 수 있는 친구들의 공동체라는 맥락 안에서의 성품 계발을 통해서만 이룩된다"(같은 책, 140쪽). 그는 하우어워스를 따라 자유주의의 얄팍한 개인주의·보편주의를 지양하고 두터운 가치와 윤리에 기반한 공동체적이고 특수주의적인 윤리를 옹호합니다.

위 신학자들의 진리관은 진리를 사실성의 영역에 제한하는 신실증주의 모델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탈근대적 경향에 맞서서 신적으로 제정된 객관적·보편적 진리를 변호하는 동시에, 진리를 담지하는 특수한 공동체로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진리와 정치가 분리되고 교회가 주변화된 세속화·다원화 이후에도 여전히 고백적·비변증적으로 진리를 말하는 예언자적 증언 공동체입니다. 세속 사회에 맞서 진실되고 평화로운 삶의 방식을 증언하는 공동체를 옹호한다는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후기 주제였던 '자기-배려로서의 파레시아', 즉 '솔직 담백하면서도 위험을 무릅쓰는 진실된 말하기'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변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억견과 진리

많은 장점에도,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진리-말하기의 공동체' 교회론은 문화적·종교적·도덕적 다원주의라는 조건 위에 수립된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소 일방향적인 진리 선포에 그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들 신학자의 사상에는 강한 '교의주의'(dogmatism)와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주의 정치'(identitarian politics)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 이들은 현대 세속 사회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교회는 세속 사회에 이견을 제시하고 저항하지만, 교회 내 다양한 목소리에 대한 개방성은 다소간 결여돼 있습니다.

그렇기에 탈진실 시대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주의적 반응은 자칫 철학자 지안니 바티모(Gianni Vattimo)가 말하는, 절대적인 고정불변의 진리를 고수하는 '강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강한 사고의 특징은 무엇보다 자기 주권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경계 감시'(내/외부, 순수/오염, 정통/이단, 정상/비정상을 구분)입니다. 바티모는 강한 사고라는 진리관이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권위주의적 훈육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사진 출처 플리커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사진 출처 플리커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마도 '진리와 정치'라는 주제에 가장 깊이 천착했던 인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 반세기 전 아렌트는 정부와 관료에 의해 주도되는 '조직적 거짓말'의 위험을 이미 경고했고, '사실적 진리'의 영역이 침해당하는 데 깊은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사실이 언제나 조작과 기만에 취약하고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음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가장 기초적인 사실은 바꿀 수 없고, 바꿔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아무리 역사가 과거에 대한 '해석'이라고 해도 1914년 8월 4일 밤에 독일군이 벨기에 국경을 넘어 침공한 '사실'만큼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한나 아렌트, <Between Past and Future>, 235쪽).

그러면서도 아렌트는 진리와 정치 간 필연적 갈등 혹은 대립을 보았습니다. (플라톤적 의미의) 절대적 진리는 본질적으로 강제적이고 단일하지만, 정치 영역은 다양한 행위자가 출현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차이·갈등·긴장·타협의 다원적 공간입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인간이 지구 상에 살고 있으며 세계 내에 거주한다"고 말합니다(한나 아렌트, <The Human Condition>, 9쪽).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적 대화 모델을 옹호하면서, 누구도 민주주의적 정치 공간에서 보편적·절대적 진리를 독점할 수 없으며, 모든 정치적 행위자들은 억견(의견, doxa)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유한하며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나에게 드러나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의 주장처럼, 인간의 이해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는 '맨눈'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이해는 '해석'이라는 길을 경유합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신을 비판하는 제자 로널드 베이너(Ronald Beiner)가 주장하듯, 억견과 진리를 완전히 분리해 버린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아렌트 해석자 린다 제릴리(Linda Zerilli)에 따르면, 아렌트는 억견이 가진 근본적 통찰을 인정합니다. 아렌트의 관점은 다양한 억견을 떠나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진리를 찾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서 '산파술', 즉 여러 사람과의 대화로 각자 가진 억견에 숨겨진 진리를 이끌어 내듯이, 공적 논쟁을 통해 시민들은 서로가 가진 다른 관점과 견해를 나누고 사안을 다시 바라보는 법을 배웁니다. 타인의 관점으로 사유하는 것을 아렌트는 '재현적 사유'(representative thinking)라고 불렀고, 대화 참여자들은 '확장된 정신'(enlarged mentality)'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호 주관적 대화와 논쟁을 통해 개인들이 제한된 시야를 벗어나 타인과 공유하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렌트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탈진실 시대에 민주주의가 겪는 위기는 사실성과 증거로의 귀환(신-실증주의)이나 교회 공동체를 통한 신학적 절대 진리의 확보·증언(공동체주의신학)이 완전히 해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탈진실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오늘날 삶의 조건에 이미 내포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탈진실을 규범적 차원에서 허무주의로까지 밀고 나가는 대신, 서술적 차원에서 그 누구도 절대적·보편적 진리에 도달하거나 이를 독점할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원리로 제한한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이 민주주의 정치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일방향적으로 선포하는 '진리-말하기'가 아닌, 대화적이고 상호 주관적인 진리 탐구로서의 '신학하기'입니다.

습득된 무지와 민주주의 정치

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길 위의 신학 On the Mystery>에서 '진리-과정'(truth-process)과 '진리-정체'(truth-stasis)를 구분하고 전자를 옹호합니다. 그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의 관점에서 인간 인식·지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강조합니다. "과정으로서의 신학은 (모든 살아 숨쉬는 유기체들과 같이) 결말이 열린 채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10쪽). 절대적·보편적인 고정불변의 진리를 옹호하는 절대주의와 '무엇이든 다 허용된다'고 말하는 완전한 상대주의 사이에서 켈러는 '관계성으로서의 진리'를 옹호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비축하거나 보관할 수 없는 것처럼, "진리는 현재 주어진 선물이고, 관계의 은총"입니다(20쪽). 켈러는 신학은 진리-과정일 뿐, 일련의 진리 모음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신학적 명제가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신적 신비라는 선물을 말하면서, 켈러는 모든 신학하기란 '잠정적 진리-주장'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신학이 신적 신비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길 위의 신학'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진리가 언제나 손에서 쉽게 빠져 나가는, 완전히 파악·소유할 수 없는 신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지', 즉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착각·미망에서 벗어나는 것, 인식론적 한계를 깨닫고 무지의 구름 속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향한 도정의 출발점입니다. 소크라테스적 무지는 하나님의 신비를 '빛나는 어둠'으로 표현했던 위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 '습득된 무지'를 강조한 니콜라스 쿠자누스(Nicholas of Cusa) 등 그리스도교 부정신학 전통에서도 이어지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부정신학 전통은 부정을 통해 인간이 가진 우상적 하나님 이미지를 걷어 내고 언표 불가하고 이해 불가한 '신적 불투명성'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합니다.

이와 같은 켈러의 신학적 통찰을 아렌트가 말하는 민주주의적 공적 대화와 결합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민주주의 사회 공론장에서 진리를 말할 때에 '좀 더 겸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의 근본적 무지와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이 제시하는 여러 진리-주장도 민주주의적 공론장 내에서는 다양한 억견들 중 하나로 간주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론장에 참여하는 순간, 그리스도인 역시 대화 상대자의 진리-주장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런 대화는 일방적인 설교나 호교론이 아닌 상호 간 배움·비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향한 과정은 상호 주관적이며, 때로는 갈등·긴장·투쟁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가치를 가진 행위자 사이에서 논쟁·경합이 벌어지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공간은 항상 이질적인 것에 개방돼 있는 미결정성(undecidability)의 공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신의 관점에서 신·인간·세계를 바라보고 투명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고전 13:12). 이는 그리스도교 부정신학 전통이 줄곧 말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나가며: 용기와 겸손 사이,
예언자적 진리-말하기

그렇다면 다원화한 탈세속성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하우어워스 같은 신학자가 옹호하는 진리-말하기 실천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와 양립이 불가능할까요? 아브라함 헤셸(Abraham J. Heschel)이 말한 것처럼 '예언이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라면, 신적 눈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예언이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진리의 확실성을 붙잡는 절대주의(과도한 긍정)와 도덕적 진리의 규범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허무주의(과도한 부정) 사이에 놓인 심연을 건너 정의와 긍휼을 위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서두에 등장한 톨러 목사는 기후 정의를 위해 예언자적으로 진리를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 평범하고, 유한하며, 오류를 범하는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회 운동가 코넬 웨스트(Cornel West). 사진 출처 플리커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회 운동가 코넬 웨스트(Cornel West). 사진 출처 플리커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인간 지식의 우연성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미국 실용주의 전통, 해방적 관심에 기초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 억압·차별에 저항하는 흑인 교회 전통 등을 결합해 '예언자적 실용주의'(prophetic pragmatism)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회가 권력을 향해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언자적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시민은 공적 토론에 참여할 때에 자신이 견지하는 특수한 신앙·가치관에 입각해 사안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취하고, 이를 옹호할 수 있습니다. 세속 정부가 불의·억압·지배·폭력의 도구로 변질하고 민주주의가 맘몬에 휘둘리는 금권정치로 전락할 때, 교회는 '예언자적 기소'(prophetic indictment)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이 보편적·절대적인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이 공존하는 민주주의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망각해서도 안 됩니다(코넬 웨스트, <Democracy Matters>).

예언자적 그리스도교는 권력과 자본 앞에서 솔직하고 용기 있게 '진리-말하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인식적 겸손의 미덕을 갖춰야 합니다. 오늘날 광장에서 난무하는 소위 예언자적 언어를 보면, 지나친 확신과 자기 의로 점철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가짜 뉴스가 소셜미디어에 유포·소비되기도 합니다.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절실한 까닭입니다. 인식적 겸손은 진실/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탈진실 시대에 더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탈진실에 맞서 진리의 성채를 쌓는 것, 절대적 진리를 대리·독점하는 사제적 권위를 내세우거나, 사실성과 강한 증거에 기반한 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다시 주장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파 포퓰리즘과 결합한 탈진실 정치의 위험을 극복할 길은 열린 토론·대화의 공간에서 민주주의적 숙의·논쟁·경합을 더 확장·강화하는 일입니다. 상호 검증과 비판을 통한 판별·판단이야말로 음모론과 가짜 뉴스가 지닌 파괴적 잠재력을 약화하고 민주주의적 공론장을 건강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공론장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진실된 말하기를 하는 동시에 겸손하게 타자의 비판 앞에 자기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회는 여러 도덕적·정치적인 이슈에서 교회 밖 목소리(다른 전통 및 학문)에 귀 기울이고 입장을 수정한 과거가 있습니다. 예컨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더 많은 젠더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운동은 그리스도교 전통에 신학적·윤리적 도전을 가하는 동시에 자기반성을 수행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적 논쟁·숙의를 통해 교회 안팎에서 예언자적 비판을 수행하는 그리스도교야말로 탈진실 시대가 요청하는 예언자적 그리스도교가 아닐까 합니다.

권건우 / 시카고로욜라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신학생.

1) https://www.washingtonpost.com/politics/2020/07/13/president-trump-has-made-more-than-20000-false-or-misleading-claims
2) https://www.pewresearch.org/fact-tank/2020/07/01/white-evangelical-approval-of-trump-slips-but-eight-in-ten-say-they-would-vote-for-him
3) https://www.nytimes.com/article/what-is-qan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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