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 아이다호데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혐오에 가장 앞장서는 집단은 보수 개신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혐오가 아닌 정당한 의견 개진이며, 한국 사회에는 성소수자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에는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이 정말 존재하지 않을까요.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성소수자는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고 차별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보수 개신교계에 번번이 무릎 꿇으면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성소수자는 차별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흘려 보냈습니다.

문제는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집요한 공격들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바탕으로 계속됐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2007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간 언론과 시민단체, 법원 등에서 계속 팩트를 체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뉴스앤조이>는 아이다호데이를 맞아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교계의 상반된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① 반동성애 진영과 보수 교계는 어떻게 차별금지법을 반대해 왔는지 정리하고 ② 반대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힘을 실어 왔던 개신교인도 있다는 점을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③ <선랑한 차별주의자>(창비) 저자 김지혜 교수(강릉원주대)에게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들어 봅니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를 보면 '차이'와 '차별'이 나온다. 사람이 선천적·후천적으로 지닌 특정한 속성은 차이다. 서로 다른 것을 두고 우열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들은 선으로 다른 특성을 공유한 사람들은 악으로 규정하며 가하는 모든 행위는 차별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차별하게 된다.

차별은 혐오와 뗄 수 없다. 사회에서 특정 속성을 공유하는 이들이 다수일 때 그렇지 않은 소수는 쉽게 공격받는다. 소수를 공격하면서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혐오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처럼 사회에 어려움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 하고 소수자 혐오가 극대화한다.

교계 반동성애 진영은 자신들의 활동이 차별이 아니고, 한국 사회에 성소수자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은 '거 봐라, 역시 동성애자가 문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것은 차별이고 혐오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DAHOBIT)을 맞아 보수 개신교계 반대로 13년째 발이 묶인 차별금지법을 다시 들여다봤다.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차별 행위가 발생했을 때 구제 신청을 할 수 있게 한 법이다. 하지만 교계 반동성애 진영은 법 취지는 무시하고 허위·왜곡·과장 정보를 끊임없이 생산·유포해 논의를 진흙탕 속으로 끌고 갔다.

허위·왜곡·과장 정보의 팩트를 체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뉴스앤조이>는 그간 가짜 뉴스를 팩트 체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번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말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왜 필요한지 다루고 싶었다.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해도 잡아가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것을 넘어, 차별금지법이 나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이를 위한 법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지난해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저자 김지혜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지난해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저자 김지혜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이를 위해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저자 김지혜 교수(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를 5월 13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지난해 7월 출판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 모두에게 차별 감수성의 사각지대가 있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차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 언론의 호평을 받은 데 이어,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는 등 지난해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한 권이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김지혜 교수는 비종교인으로서 기독교 매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된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비종교인이기 때문에 개신교와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신자였다던 김 교수는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중간중간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와 너무 다르다", "종교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라며 개신교가 좀 더 포용적인 종교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헌법의 차별 금지 원칙
구체화하는 차별금지법
"'성적 지향' 삭제하자는 주장,
차별 존재한다는 것 증명"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사회적 에너지 낭비라고 주장하는 개신교인들이 있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차별 중 많은 부분이 실정법으로 해결되는데, 굳이 또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하느냐는 논리다.

헌법 조항은 법률로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교육에 대한 권리가 헌법에 적혀 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많은 법이 존재한다. 학교 설립이나 교원 양성에 대한 법이 있어야, 국가가 그 법을 근거로 역할을 하고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헌법에는 분명 차별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차별받지 않고, 또 차별하지 않고 살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법률로 구체화하지 않았다. 그걸 하자는 말이다.

사회에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기본적 동의가 있고, 이는 헌법에도 나와 있다.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합의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방향에서 어긋나 보이는 행동이 제재받지 않는 것은 법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떤 범죄가 제대로 처벌되지 않으면 개인이 다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너무 많은 사람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법으로 국가 시스템이 정비되어 있으면 그럴 일이 없다. 지금 사회 곳곳에서 차별 때문에 힘든 일이 발생하는데, 매번 각자 논쟁해야 하고, 논쟁의 결도 비슷하고 소모적이다. 이 에너지를 줄이려면 법을 만들어야 한다.

일단 법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권위를 부여한 사람들이 뭐가 차별인지 아닌지 판단할 것이다. 경찰 직무를 수행하는 데 신체 능력이 필요하다고 명시하면 차별일까. 직무와 관련해 신체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차등 대우에 합리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직무와 관련 없는 직종에서도 똑같이 신체 능력을 요구한다면 합리성이 없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의 과정이다. 무조건 되고 무조건 안 되는 게 아니다. 합리성이 없는데 차별하는 것과 합리성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자격을 제한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판단은 굉장히 어렵다. 그 직종이 뭘 하는지 조사도 해야 하고, 얼마나 관련성이 있는지 논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법을 토대로 차별인지 아닌지 건별로 전문가가 판단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이 충분한 검토와 논쟁을 거쳐 논리적으로 사회를 설득할 수 있으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또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금처럼 계속 논쟁만 하고 있으면 개인의 삶에 변화가 없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비판만 해도 형사처벌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가짜 뉴스 중 하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비판만 해도 형사처벌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가짜 뉴스 중 하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성소수자를 차별하자는 건 아니지만, 보수 개신교가 저렇게 반대하는데 굳이 '성적 지향'을 차별 금지 사유에 넣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더디게 할 이유가 있느냐는 사람도 있다. 일단 빼고 법을 제정한 다음, 추후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면 추가해도 되지 않느냐는 거다.

이미 드러난 차별 사유를 삭제하는 건 그 집단을 삭제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차별금지법을 만들고자 할 때 원칙은 평등해야 한다는 것,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원칙에 더해 다양한 차별 사유를 열거하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차별을 똑바로 직시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차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는 의도다.

성별로 인한 차별, 연령으로 인한 차별, 또 다른 무언가로 인한 차별이 있는지 피하지 말고 보는 거다. 법률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어떤 종류의 차별이 있는지 눈여겨보고, 누가 어떤 역할을 할지 계획을 세워서 세밀하게 진행해야 실제로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적 지향'이 논란이 된다고 차별 금지 사유에서 제외하면 이미 존재하는 차별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애초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한 취지에도 어긋난다.

-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현상 자체가 차별금지법의 필요를 역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은 "차별금지법은 동성애자를 보호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동성애자가 실제로 차별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차별이 없으면 법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법으로 폭력을 금지할 때, 그 법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폭력의 피해자다. 폭력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 법이 있거나 없거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 혜택받는 이들은 당연히 현재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기본 전제는 특정 집단만 보호하자는 게 아닌 우리 모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 법이 있으면 내가 소수자가 되더라도 보호받을 수 있다. 폭력과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하지 않아도, 언젠가 나 혹은 가족, 소중한 사람이 이 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법에 동의하는 것이다.

- 서구 여러 나라는 성소수자(동성애자)를 실제 차별했지만, 한국은 그런 적이 없으니 그들을 향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 않나. 일부 언론은 계속해서 코로나19 확진자 중 특정 그룹의 '성적 지향'을 부각하고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사를 생산한다. 질병관리본부나 감염병 전문가들은, 감염병 확산 상황에서는 그 사회에 차별이 없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차별은 방역에 도움이 안 되니까. 감염병 검사를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과 사회를 위해 힘을 내서 검사를 받으러 간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감염병 검사에 그치지 않고 차별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에서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직장을 잃을 수도, 집에서 곤경에 처할 수도, 지인들에게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해진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적어도 성소수자라서 해고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HIV/AIDS도 똑같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감염인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차별할수록 그들이 더 숨어들게 되고, 특정 집단의 감염률이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마구잡이로 비난하면 없어질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다. 우리가 진짜 바라는 게 감염병 확산을 막는 일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해야 한다. 차별적 행동이 공중 보건을 더 위태롭게 하니까.

역사적으로 인류는 사회적 재난, 어려움이 있을 때 한 집단을 타깃 삼아 공격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여론을 보면, 이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이럴 때 특정 집단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위험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방역 당국, 언론이 중심을 잘 잡아야 그런 일 없이 지나갈 수 있다.

한국 일부 개신교는 성소수자를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장소에서 "STOP 동성애" 같은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을 방해하는 이들도 개신교인들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한국 일부 개신교는 성소수자를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장소에서 "STOP 동성애" 같은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을 방해하는 이들도 개신교인들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국가가 종교 통제하면 안 되지만,
세금 지원받는 종교 기관은 달라
기독교는 처음부터 반차별의 종교,
특정 소수자 똑 떨어져 존재하지 않아,
차별 금지 정책은 결국 모두를 위한 것"

- 목사들에게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설교가 감시받고 강제로 동성애자 결혼식을 주례해야 한다는 등 교회가 제약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종교의 영역을 건드리는 법은 아니다. 종교마다 사상의 원칙이 있고, 그 고유한 영역을 국가가 통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듯 종교 영역도 보호해야 하는 측면이 있고, 국가가 침입할 수 없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예컨대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에서 동성애자를 목사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그 교회의 본질적인 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국가가 건드리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특정 종교 교리가 그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맞지 않다. 종교 기관이 운영하는 단체이지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면, 특히 국가 재원이 지원되는 곳이라면 온전한 종교 영역은 아니다. 그런 영역에서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종교 기관이 사회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그것을 나눠야 할 책임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까지 우리 교회 규칙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타인의 종교의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 '종교의자유 침해'는 헌법이 명시한 기본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입장만 바뀌면 그 종교에도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개신교도 상황에 따라 소수가 될 수 있지 않나.

- 개신교인들은 차별금지법이 통과하면 본인들이 핍박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이해했던 기독교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종교는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아주 이기적으로 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해 왔다. 개신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왔다. 그런 맥락에서 그동안 개신교가 그렇게까지 배타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손해 보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이 깊게 박혀,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이익집단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

개신교는 자신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HIV/AIDS 이슈만 봐도 개신교 내부에 잘못된 정보가 너무 많다. HIV/AIDS 감염인을 놓고 혐오를 선동하는 개신교인들 보면, 내가 이해하는 종교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적 측면에서도 아픈 사람을 보면 어떤 이유에서건 먼저 치료부터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 수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싶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이러스를 잡으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 모두 소중한 사람이니까 모두를 지키기 위해 조심하자'는 것이지, 누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어느 사회든 기본적으로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있는데, 왜 특정 질병을 지닌 사람을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는지 이해가 안 간다. 비종교인이 그런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종교인이 더 나서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현상을 보면 종교 역할이 뭔지 의문이 든다.

- 유독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역차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면 개신교인들이 역차별당한다는 것 역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의 주요 논거 중 하나다.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는 것 같다. 개신교야말로 처음부터 약자를 귀하게 여기는 종교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굉장히 급진적인 분이시지 않나. 그 시대 종교의 룰을 깨고 율법이 아닌 사람 중심적 모습을 보이셨다. 모두가 배척하는 한센병 환자를 감싸 안았던 게 예수님 아닌가. 시대적으로 보면 아무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던 약자에게 다가간 분이다.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 모습을 많이 봤다. 과거 개신교는 계속해서 약자를 찾아가는 일을 해 왔다. 시혜적 측면도 있었겠지만, 어땠든 개신교는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을 찾아가려 했고 그들 바로 옆에 있었고 도움을 주었다.

그때는 특정한 사회적 약자를 더 챙긴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역차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사회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평등의 방식을 역차별이라고 여긴다. 신체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고 가정해 보자. 계단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은 '왜 내 세금을 그런 곳에 쓰느냐', '장애인을 위한 특혜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장애인이 그 길을 못 가는 게 불평등한 것이다.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가는 과정에는 기존에 불평등했던 상황을 바꿔 주기 위한, 그 집단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다음에는 괜찮다. 그 과정이 문제다. 어려움 끝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결국 혜택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람'이다. 내가 엘리베이터가 필요한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 과정을 역차별이라 하면서 거부할 것인지, 아니면 평등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연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는 우리 모두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언제든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는 우리 모두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언제든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소수자 집단 고정관념 완화,
다양성 보장하는 공간,
서로 다른 이들 사이 만남 주선해야"

-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옳고 진리에 가깝다는 확신에 찬 경우가 많다.

사람에게는 세대 차가 있는 게 당연하다. 어느 시점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경험한 사회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났을 때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다. 학교에서도 내가 자라왔을 때를 생각해 학생을 지도하면 안 된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다르니까.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겸손함이 있어야지, 안 그러면 큰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미 주류가 된 해석을 경계하고, 사회 질서를 의심하고, '내가 아는 게 다는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함이 있어야 소통이 가능할 것 같다.

- 실제로 성소수자 당사자와 친분을 나눈 적 없는 이들이 '동성애 전문가' 행세를 하기도 한다.

어떤 개신교인들에게는 성소수자에 대해 단순하고 정형화한 이미지만 있는 것 같다. 이런 이미지는 실제 성소수자를 만나면 깨진다. 그런데 성소수자는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 본인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에게 성소수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니 당연히 쉽게 말하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개신교인들은) 점점 더 성소수자를 못 만나게 되고 부정적 이미지만 간직하게 된다. 그러다 언론이 몇 가지 사건을 부각하면 '아 정말 그런가 보다' 하는 거다. 안타까운 악순환이다.

'동성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 '이성애'라는 단어를 줬을 때 바로 두 남녀가 성관계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예쁜 모습, 결혼하는 장면 등이 떠오르지, 불륜을 저지르고 여러 명이 함께 성관계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성애는 바로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왜곡된 이미지다.

지금 상황이 딱 예멘 난민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하다. 당시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예멘 난민을 받아야 하느냐 마느냐 엄청 논쟁했다. 마치 예멘 난민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 때문에 고국을 떠나야 했는지 다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모르면 그들에게 질문부터 해야 하는데,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면서 찬반 논쟁을 벌였다.

이래서 고정관념이 무섭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정관념이 사실인 줄 알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발생했다. 예멘인을 만나 보지 않았으면서도 예멘인은 이럴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우리가 미국 사람을 한 가지 고정화한 이미지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외국인이 한국인을 특정한 이미지로만 못 박으면 화가 나지 않겠나. 특정 집단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고, 인류 역사에서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도 그 이미지를 강화하는 특정 언론, 사람들이 문제다. 이성애자가 성관계하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듯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이 그의 삶 전체를 장악하는 이슈가 아닐 수도 있다. 이성애자도 사람마다 다르듯이 동성애자도 다르다. 고착화한 이미지가 너무 무섭고, 어떻게 깰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결국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하는데, 일부 개신교인들이 성소수자를 만나기 어렵게 만들어 놨다. 모든 공간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

김지혜 교수는 개신교가 조금 더 포용적인 종교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김지혜 교수는 개신교가 조금 더 포용적인 종교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차별 감수성 키우는 첫걸음"

- 차별에 민감해지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시간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게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뭔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안다. 선물 하나 하더라도 '내가 이게 필요한지 어떻게 알았지' 생각이 들 정도의 물건을 주는 이가 있다.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관찰하고 생각하는, 정말 고맙고 소중한 마음이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을 사느라 힘들고 바빠서 다른 사람의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못한다. 장애인 인권 단체가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교통이 지연될 때가 있다. 당장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너무 바쁜데 이 사람들 왜 거리에서 이러지' 같은 반응이 먼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 잠시 생각하는 거다. 장애인에게 그 하루가 어떤 의미인지, 대중교통이 어떤 공간인지 입장을 바꿔 보자는 것이다.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모두가 차별에서 안전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로 이어진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해도 안전하다는 원칙, 그게 차별금지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상황은 늘 바뀌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특정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만 잘살 수 있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 사회 구성원은 불안해진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회가 얼마나 암담하게 느껴졌으면 그랬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모욕당한다거나 갑자기 해고당하지 않을 것이라 느낀다면,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 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기는 하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성서를 읽으면서 알게 된 예수님은 품격 있는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모습이 교회를 통해 많이 보여지면 좋겠다. 종교인이 불쾌감을 자극하는 단어를 쓰고 누군가를 모욕하고 저주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내가 생각해 온 종교와 많이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잘 살게끔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돕는 게 종교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파괴하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건 종교의 역할이 아니다. 누군가를 자꾸 비난하고 저주하는 사람과는 함께 있기 힘들다. 친하게 지내기 어렵고, 나의 고민을 토로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품위 있게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고, 앞서 선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좋겠다. 나는 한때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지금은 종교를 떠났지만, 늘 가슴속에 품고 있는 말이 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내 입에서 누군가를 향한 혐오와 비난과 저주가 나오는 건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지 않나.

교회 안에도 분명 일방적인 반동성애 움직임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더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 그동안 기독교가 정치권을 표로 압박했다고들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에는 다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종교 안에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데 정치인들이 어떤 특정한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정치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종교를 이용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더 이상 종교가 정치에 이용당할 필요는 없다. 신자 개개인이 누구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 독자적으로 판단했으면 좋겠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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