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코로나19 사태와 주일성수 논쟁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중국 우한에서 발병했던 전염병이 한국을 비롯해 이제는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곳곳으로 퍼져 가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의 증가세는 무서울 정도다. 이미 사망자 수는 중국을 넘어섰고, 확진자 수도 최고 기록을 갈아 치울 기세다. 이탈리아의 치명률은 거의 10%에 육박하고 있어 더욱 공포스럽다. 어떤 전문가는 모든 국가가 이탈리아 뒤를 따를 것이라고 불길한 예고를 하기도 했다. 13세기 흑사병이 온 천지를 뒤덮었을 때 사람들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한국 기독교계는 이 바이러스가 만들어 낸 엉뚱한 사이드 이펙트(side effect)로 곤욕을 겪고 있다. 다름 아닌 '주일성수 논쟁'이다. 31번 확진자 이후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점을 전후로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236년 역사상 최초로 전국 교구의 미사를 중단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역시 전국 모든 산문의 폐쇄 조치를 단행했다. 개신교회도 주요 메가 처치를 중심으로 비슷한 조치를 했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의 교회가 현장 주일예배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교회는 새로운 집단 감염지로 떠오르는 중이다.

이에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주일예배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리려 하고 있다. 확진자가 나온 교회를 대상으로 구상권 청구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종교 탄압이라며 볼멘소리를 내기도 한다. 전북의 한 목회자는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코로나19가 왔다고 설교했다. 시민들은 이런 모습에 분개하며 개신교회를 향해 '신천지와 뭐가 다르냐?'며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지난 150년간 한국 개신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었던 신앙적 가치는 주일성수일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가 경험하는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교회들이 처음 온라인 예배로 전환할 때만 해도 한두 주 정도면 상황이 개선될 줄로 알았으나, 지금은 언제 다시 교회당 문이 열릴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에 하나 이런 상황이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이어진다면 한국교회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 그때까지 교인들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니 여러 언론 매체나 소셜미디어에서 이 문제를 두고 여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바이러스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며 반드시 주일예배에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가정이나 일상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각자 지금 상황을 기원전 6세기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성전 예배를 하지 못했던 유대인의 바벨론 유수 시절에 빗대기도 하고, 성경 속 역병에 관한 본문을 살펴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신앙의 선배들이 보였던 태도를 소환하기도 한다. 이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이 예배가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고, 신앙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것 같다.

전례 없는 상황

필자는 작금의 사태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 코로나19 사태는 종교적 차원뿐만 아니라 문명사적으로도 지대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는 현 사태가 전례가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전례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코로나19는 신종이기는 하지만 유사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비근한 예로 메르스나 사스, 신종플루 같은 대형 전염병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4세기 유럽 인구의 1/3의 목숨을 앗아 간 흑사병, 잉카제국 인구의 90%를 휩쓸어 간 유럽발 전염병, 20세기 초 5000만 명의 생명을 빼앗은 스페인 독감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코로나19는 아직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전례가 없다는 말은 바이러스가 아니고, 바이러스를 대하는 인류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에서 프랑스령 알제리의 오랑시를 휩쓰는 흑사병에 대해 썼을 때, 흑사병은 부조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조리는 일체의 합리성이 결여한 것인 동시에 인간의 절대적 한계 상황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전염병은 늘 그랬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발병하여 이유나 목적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 건강과 생명을 앗아 갈 때, 인간은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죽음의 유령이 공기 속을 활보하며 다닐 때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그래서 <페스트> 속 파늘루 신부는 하나님이 흑사병을 통해 인간의 죄를 심판한다면서 회개하라고 설교했고, 오랑시 주민들은 교회로 몰려가 회개하며 강복을 기원했다.

서구 역사를 보면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종교는 흥행을 거두었다. 죽음의 영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닐 때 불안을 달랠 수 있는 곳은 종교뿐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교도가 신전을 찾아가 사제들에게 왜 신이 노했는지 이유를 묻기도 하고, 제사하면서 주술에 의지하기도 하고, 부적을 사기도 했다. 기독교인들도 별다르지 않았다. 1630년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시민들은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성당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해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전염병이 창궐하면 종교는 부흥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는 그런 공식이 깨졌다. 물론 아직도 파늘루 신부처럼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복을 주셨는데 한국 사람들이 교만해져서 이 바이러스를 보내셨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를 핍박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신천지를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성애, 종교 다원주의, WCC 참여 등에 대한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며, 생태계 파괴, 맘몬 숭배에 대한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여러 주장 중 압권은 지금 상황을 요한계시록의 종말적 재앙에 빗대며 하나님께서 이 질병을 통해서 정결한 14만 4000명을 걸러 내고 있다는 신천지식 주장이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주장들이다. 누가 아는가? 하나님은 생각이 많으시니(시 40:5) 이 모든 생각을 어느 정도는 다 조금씩 가지고 바이러스를 보내셨을지….

우리 시대 사람들은 오랑시 주민들과는 다르게 이제 이러한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들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가 왜 신이 노하셨는지 이유를 묻지 않는다. 회개하거나 강복을 기원하거나 예배당을 봉헌하지도 않는다. 지금 코로나19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영화관보다 더 끔찍한 흥행 참패를 겪고 있다. 사람들은 목회자나 교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제발 모이지 마라!'

필자가 전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뭔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코리안 모델(Korean Model)

이 상황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대상은 '코리안 모델'로 불리는 한국의 방역 및 의료 체계이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한국이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방식은 동시대적으로 봤을 때도 독보적이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전례를 찾을 수 없다. 어쩌면 2020년의 코리안 모델은 문명사적 신기원으로 평가받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처 방식, 코리안 모델은 전염병의 일반적 진행 패턴을 바꿔 놓았다. 전염병의 일반적 진행 패턴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의 확진자 수 그래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천천히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일단 환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팬데믹, 대유행의 단계까지 멈출 수 없다. 대유행 단계가 와서 걸릴 만큼 전염병에 걸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면역력이 증가하고, 전염병의 독성은 약해져서 토착화하는 것이 기존 전염병 진행 패턴이라고 한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얼마 전 인터뷰에서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했을 때,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가 대국민 담화에서 "매우 많은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독일 총리 메르켈이 한술 더 떠서 "전문가들은 세계 인구의 60∼70%가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될 것"이라고 했을 때, 한국의 신종감염병중앙임상위원회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 이들은 모두 전염병의 일반적 진행 패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모두 팬데믹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매우 다른 그래프를 보여 준다. 30번 확진자까지 확진자 수는 매우 천천히 증가했다. 그러다 31번 확진자 이후 하루 900명까지 확진자 수가 폭증했다. 한국도 바야흐로 팬데믹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확진자 수가 8000명에 이를 때까지 수직 상승하던 그래프가 꺾이기 시작해, 일일 확진자 수가 100명 선까지 다시 내려왔다. 강제적 도시 봉쇄나 이동 중지 명령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실로 경이적이다. 때문에 한국의 확진자 그래프는 다른 국가들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시대적으로만 봐도 독특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그래프다. (물론 아직까지 그러하다는 말이다.) 전례가 없다는 필자의 말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독특한 대처 방식을 흔히 개방성·투명성·민주성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특징들을 한마디로 '전염병의 시각화'(visualization of epidemic)라고 규정하고 싶다. 한국에서 코로나19는 눈으로 볼 수 있다. 코로나19의 단백질 구조, 그것이 주로 비말 감염을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 정도는 전 세계 사람들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그에 더하여 모든 확진자 번호가 전부 공개되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확진자들 지역 분포와 집단감염의 군집 크기도 볼 수 있으며, 집단감염지 위치도 볼 수 있다. 심지어 각 확진자들 동선까지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는 이 전염병이 어디에 창궐하고 있으며, 반대로 어디가 청정 지역인지, 전염병이 현재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진행 경로도 눈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실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전염병을 볼 수 없었다. 기껏 볼 수 있는 것은 피 흘리며 죽은 쥐 떼나, 병상에 누운 환자,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들뿐이었다. 전염병을 볼 수 없기에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압도되며 공황(panic) 상태에 사로잡혔다. 이 때문에 죽음의 유령이 공기 속을 활보하며 다닐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만질 정도로 죽음의 유령은 가까이 있었다. 지금까지 전염병은 늘 그러했다. 지금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이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미신과 주술과 부적을 찾았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가 흥행을 거둘 수 있는 환경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사재기 현상은 그러한 불안의 표현이다. 이들은 코로나19를 보지 못하고 있기에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사재기하는 것이다. 사재기는 어쩌면 위기를 당한 고대인이 부적을 찾는 것과 비슷한 행위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분유를 사재기하고, 일본에서는 화장지를 사재기하고, 미국에서는 총알을 사재기한다고 한다. 총알 사재기는 참 미국적인 현상이다. 아마도 총은 미국인의 주물숭배(fetishism) 대상인 모양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사재기하지 않을까? 혹자는 한국인의 탁월한 시민의식 발현이라고 한다. 글쎄… 시민의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신천지도 한국인이다. 어떤 사람은 국민이 정부를 신뢰해서라고 말한다. 글쎄… 정부가 무슨 일을 해도 믿지 못하겠다는 국민이 1/3 정도라는데, 정부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사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사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전염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직까지 한국에서 전염병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시민들이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확진자가 적은 도시의 시민들은 불안하지만, 조심스럽게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직은 사재기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도 다 아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과 다른 나라의 다른 점이다. 전염병이 닥쳤는데도 사람들이 종교를 찾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다. 시민들은 도리어 교회를 찾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교회를 더욱 멀리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전염병을 볼 수 있게 되었나? 전염병을 시각화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의학만 발달해서 될 일이 아니다. 한국보다 의학이 더 발달한 나라는 많다. 그런 나라에서도 전염병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코리안 모델만이 전염병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진단 키트 개발을 비롯해 다양한 의료 기술, 보편적 의료보장 체계, 인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배치할 수 있는 지방 및 중앙정부의 행정 기술, IT 기술과 빅데이터 기술 등이 동시에 필요하다. 이러한 개별적 테크놀로지들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질병관리본부를 컨트롤타워로 하여 방대하게 결합해야 한다. 거기에 드라이브 스루나 워크 스루 같은 새로운 기술이 기동성 있게 기존 테크놀로지 체계 안으로 편입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핵심은 이질적인 테크놀로지들의 방대한 결합이다. 이것이 전염병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전염병에 맞서 이렇게 잘 작동한 시스템은 아직까지 없었다.

성인된 세계

코리안 모델에 담긴 문명사적 의미는 지대하다. 종교가 더 이상 테크놀로지가 고도화한 사회와 공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종교의 종말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코로나19 사태는 특이할 정도로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신천지, 개신교회와의 관련이 그러하다. 패륜적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와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개신교회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을 불편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두 종교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 앞에서 두 종교는 '종교'라는 점에서 별 차이 없음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한계 상황에 마주한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초월자 도움으로 채우려는 시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필자가 말하는 종교다. 이런 종교는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을 본 원시인이 신에게 도움을 청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절대적 한계 앞에 서게 되면 본능적으로 신을 찾고, 신에게 의존하고자 한다. 이것이 종교다. 전염병은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 한계 상황을 절감하는 대표 사례 중 하나이며, 그래서 전염병이 몰아닥칠 때마다 종교는 부흥했다.

그런데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의료 방역 체계는 전염병이 닥쳤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교회당을 찾아가 기도하는 대신 TV나 스마트폰을 보고, 사제의 설교가 아닌 정은경 본부장 브리핑에 귀를 기울인다. 전염병이 닥칠 때마다 흥행했던 종교가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 흥행에 참패를 겪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리안 모델에서 종교는 불필요하다.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다.

종교만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러 전통적 가치들도 부정되거나 약화된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흑사병에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고 있다. 하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영웅적 저항이다. 카뮈는 두 가지 방식 중 후자가 더 낫다고 말한다. 카뮈는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종교로 도피하기보다는, 차라리 '보건위원회'를 조직하여 페스트와 감연히 맞서 싸우는 영웅들의 이타적 헌신이 더욱 아름답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코리안 모델에서 영웅들은 엑스트라일 뿐이다.

정부는 '참 이상한 나라'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코리안 모델을 홍보하고 있다. 동영상 속 한국인들은 <페스트>의 '보건위원회'를 연상하게 한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며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대구 의사와 간호사들, 하루하루 사투를 벌이는 중대본과 질본 관계자들, 대통령, 관료들, 지방 및 중앙정부 공무원들, 성금과 자원봉사를 아끼지 않는 한국인의 헌신적 노력은 <페스트> 속 베르나우 리우와 장 타루의 영웅적 면모와 오버랩된다.

그러나 그런 류의 영웅적 헌신은 '우한 짜요'를 외치며 서로를 격려했던 우한 시민들이나, 발코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서로 위로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코리안 모델의 핵심은 영웅들의 헌신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이고, 그것들의 결합이다!

카뮈는 흑사병을 부조리의 메타포로 사용했다. 그러나 코리안 모델은 전염병을 더 이상 부조리 영역에 방치하지 않는다. 코리안 모델은 전염병을 합리성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실제로 한국의 감염병 전문가들은 이 사태가 터지기 6개월 전 이미 모종의 전염병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이를 토대로 신속하게 진단 키트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코리안 모델은 전염병을 예측하고, 분석하며,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여 전염병은 부조리도 아니고, 한계 상황도 아니다. 이처럼 합리성 영역으로 포섭된 전염병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코리안 모델은 80년 전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성인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옥중서신>에서 그는 바야흐로 '성인된 세계'가 도래하리라고 내다봤다. 성인된 세계는 인간의 능력이 신장되어, 더 이상 초월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능력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초월자를 의존하던 방식으로서의 종교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본회퍼의 예언과 달리 종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0세기 말 세계는 거대한 종교 르네상스를 경험했다. 개신교회에서는 메가 처치 현상이 세계를 휩쓸었으며, 이슬람교를 비롯한 다양한 근본주의 종교들이 폭발적으로 부흥했으며, 동양 종교들 및 유사 종교들이 큰 흥행을 거두었다. 종교 르네상스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본회퍼의 예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지금 우리는 코리안 모델을 통해 성인된 세계의 도래를 목도하고 있다. 코리안 모델을 통해 성인된 세계에는 종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코리안 모델이 예표하는 성인된 세계에서 종교는 불필요하다.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신천지나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개신교회들이 보여 주듯 종교는 천덕꾸러기로 간주된다. 바야흐로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와 비슷하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알파고는 한 명의 프로 바둑기사를 이긴 것이 아니라 바둑 자체를 붕괴시켰다. 비슷하게 코리안 모델도 종교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아마도 코리안 모델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 같다. 코리안 모델이 가지는 효율성과 경쟁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코리안 모델은 일종의 테스트 베드로서 테크놀로지의 광범위한 적용이 전염병과 싸우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온 세계에 확인시켜 주었다. 하여 코리안 모델은 확대될 것이다. 그 와중에서 사생활·인권·민주주의 등에 관한 논쟁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2·제3의 코로나 사태가 터진다면 결국 코리안 모델은 일반화할 것이다. 방대한 테크놀로지의 결합과 적용이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이며, 그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는 더욱 궁지에 내몰릴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주일성수의 필요성이 아니다. '과연 성인된 세계에서 기독교는 생존할 수 있을까?'이다. 본회퍼는 종교의 옷을 벗는다면 기독교는 성인된 세계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것을 '기독교의 비종교화'(religionless Christianity)라고 한다. 본회퍼는 지금까지 기독교는 종교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성인된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는 종교의 옷을 입고 있을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만일 기독교가 인간의 능력 결핍을 초월적 신의 도움으로 극복하려는 종교로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한다면, 이 기독교는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교의 옷을 벗을 때에만 생존이 가능하다.

이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종교의 옷을 벗은 기독교는 어떤 형태를 지닐 수 있을까? 물론 종교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여전히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발달이 종교의 기반을 점차 침식하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의 옷을 벗은 새로운 기독교를 상상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종교의 옷을 벗은 기독교의 형태를 상상하기 위해서 네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이 새로운 기독교는, 첫째로 모임이 가능할까? 둘째로, 예배가 가능할까? 셋째로, 기도가 가능할까? 넷째로, 전도가 가능할까?

첫 번째로, 새로운 기독교는 모임이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가능할 뿐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는 진정한 모임을 추구하는 기독교일 수밖에 없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참 모임이 아니라 유사(pseudo) 모임이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적 모임은 한곳에 모여 있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이 개별적인 종교적 욕구로 한 장소에 모였다가, 각자 알아서 은혜를 받고, 개인으로 흩어진다. 겉만 모임이지 참 모임이 아니다.

새로운 기독교적 모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몸의 일부분으로 결합되어 예수라는 하나의 집단 인격을 이루는 공동체로의 모임이다.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모임, 곧 코이노니아는 새로운 기독교의 표지다. 영화 '두 교황'에서 보수 성향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성당에서 홀로 기도할 때 기도는 하늘로 상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 반대되는 진보 성향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축구를 관람하고 맥주를 마실 때, 그들의 코이노니아는 하늘에 상달됐다. 이것이 새로운 기독교적 모임의 한 사례 아닐까.

두 번째로, 예배는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새로운 기독교는 참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예배는 제의(ritual)로 압축된다. 제의는 특정 시간, 특정 장소, 특정 사람, 특정 형식으로 구성된다. 제의는 형식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다. 주일성수도 결국 제의적 문제다. 하지만 제의는 예배 형식이지 본질이 아니다. 예배(worship)의 본질은 가치(worth)를 인정하는 것(ship)이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 가치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새로운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여러 절대 가치들, 곧 돈·권력·명예·성(sex) 등의 우상을 해체를 동반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해방을 초래한다.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가장 큰 우상은 어쩌면 첨단 테크놀로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독교 예배는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테크놀로지의 우상성에 대항하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특정 시간, 특정 공간, 특정 사람, 특정 형식을 넘어선다. 이는 일상과 일터로, 그리고 세상으로 확대될 것이다.

세 번째로 기도는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에서 기도는 소원 성취 수단이었다. 새로운 기독교의 기도는 다른 종류의 기도를 올려 드리게 될 것이다. 아마도 기도자가 벗어 버리기 어려운 세상성과 세속성, 죄성, 중독, 다양한 억압과 투쟁하는 기도일 것이다. 우상숭배의 습관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악에 대한 회개일 것이다. 아마도 그 기도는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게 해 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일 것이다.

넷째로 전도는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어쩌면 전도는 새로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열두제자를 갈릴리 인근 마을에 파송하시면서 전도하라고 명하셨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전도할 때 늘 귀신을 내쫓았다.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거라사 광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광인이었으며,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자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앉게 되었다. 전도란 이런 것이다. 죽은 자와 방불한 자,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자를 찾아가 그들을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치유하는 것. 한 사람 안에 있는 신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도록 돕고 치유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기독교가 해야 하는 전도일 것이다.

에필로그

현재 코로나19 사태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죽어간다. 신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이웃의 고통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염병에 걸려 아파하는 이웃들, 경제적 불황으로 고통받는 이웃들, 방역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과 의사, 간호사들, 코로나19 사태로 힘겨워하는 이웃들과 함께 울고,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 게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들이 주일성수를 고집하며 논쟁하는 것은 참 민망한 일이다. 어쩌면 이 논쟁은 아픈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하는 논쟁이나 다를 바 없다. 예배(worship)는 정말로 중요한 것(worth)을 택하는(ship) 행동이다. 주일 오전 11시에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운집해 은혜롭고 감동적인 예배를 기어이 드리는 주일성수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중 무엇이 더 가치가 있을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든 교회가 기꺼이 제의를 중단할 수 있는 것, 이웃을 위해 자신이 살 수 있는 마스크를 사지 않는 것, 재난당한 이웃에게 헌금을 보내는 것, 임대료를 깎아 주는 것, 손님 끊긴 단골 가게를 애써 찾아 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주일성수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 참 예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기독교를 준비하는 태도가 아닐까.

신광은 / 열음터교회 목사, 고백아카데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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