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통해 두 가지를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하나는 주일예배 중단 결정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지점이며, 다른 하나는 이 새로운 경험이 교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이다.

미리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는 주일예배의 일시 중단이 그리스도적 결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결정의 동기로 작용하는 자기희생과 자기방어 논리 사이의 미묘한 차이(틈)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예배 중단의 결정은 또한 교회와 교인 사이의 건강한 거리로 - 혹은 분리(틈)의 경험이자 신뢰 형성의 시간으로 - 경험될 때, 긍정적으로 해석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이 시간들은 교회가 자신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어떠한 그룹들과 같이 배타성(exclusivism)과 동일성(sameness)으로 무장한 집단인가, 아니면 개방성(openness)과 차이(difference)를 기반으로 한 집단인가를 도전받는 시간이다.

대면 예배 중단, 어떻게 볼 것인가

교회는 지금, 전에 없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급격하게 확산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중 모임을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또한 여러 대형 교회를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교회가 예배당 안에서 진행하던 주일예배의 일시 중단을 결정했다.

교회들은 다양한 대안들을 준비했다. 예를 들면, 예배 영상을 미리 녹화해서 교인들에게 보내거나, 실시간으로 예배를 중계하거나, 혹은 예배 자료를 통해 가정 예배를 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우리가 다 알 만한 혹자는 - 다만 이름을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은 - 주일예배를 중단하는 이들에게 '정신이 나갔다'며 비난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와 다르게 행동했다. (물론 그러지 않은 이들도 여전히 있다.) 이들은 교회 내 예배의 일시 중지가 국가와 사회, 나와 이웃을 위한 책임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와 같은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교회는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는 교회의 중심이지 않은가. 예배는 마치 교회의 심장과 같아, 예배 없는 교회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따라서 교회가 예배를 잠시 중단한다는 것은 현 상황이 주는 긴박성과 합당성을 떠나 본질적으로 매우 어려운 결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주일 대면 예배 일시 중지라는 결정이 무조건적으로 선한 결정으로 인식되는 것 또한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의 중단은 결정만큼이나 동기도 중요하다. 이 결정은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하는 국가적 노력에 참여하고, 교인과 지역사회를 보호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괜한 고집을 부리다가 신천지와 같이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는 자기 보호를 위한 선제적 대응인가. 예배 중단 결정이 내려진 회의 안에서는 과연 무엇이 논의되었을까. '중단이냐, 아니냐'라는 결과의 문제와 어떻게 대체 예배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만을 논의했는가. 아니면 이 결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신학적 사유와 성찰도 동반되었는가.

즉, 예배 중단이라는 결정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이 결정은 '마지못함'이나, '교인의 불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공적 책임, 그리고 이웃 사랑을 위한 실천으로서 고백으로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다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나'를 버리는 결정이기도 하면서, '나'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계속해서 내뱉어 보고 되새겨 봄으로, 그 미묘한 차이, '틈'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틈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예배 중단'이라는 중대한 결정이 자기희생적이고, 이웃 사랑을 위한 역사적인 결정이 되며, 이 결정이 결코 이기성(selfishness)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자각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교회와 교인의 관계 성찰하는 시간 되어야

교회의 이러한 자기희생적 결정이 교인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무엇이 궁극적 동기가 되었든 이제 많은 그리스도인은 주일예배 중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완전한 예배의 중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공간 안에서의 주일 대면 예배의 일시 중단은 부득불 교회와 교인 간의 일정 거리를 만들어 낸다. 지금의 질문은 '이 거리 발생의 경험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다소 평범한 답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교회와 교인 모두 이 벌어진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경험하고, 서로를 분리시키는 좋은 계기로 삼으라고.

교인은 어떻게 이 벌어진 틈을 향유하고, 활용할 것인가. 사유와 성찰, 생각과 질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매주 습관처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던 교인 A는 컴퓨터 앞에 앉아 1시간 만에 예배를 마칠 것이다. 이후 그/그녀는 약간의 공허한 마음을 안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그는 이런 질문들과 마주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주일성수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치 몇 년 전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추석을 맞이하여 썼던 매우 해학적인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위기의 상황(혹은, '특이한 상황')은 우리가 평소 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시간이 된다. 교인 A는 다른 교회의 예배를 살펴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에 대한 다른 사람들 생각도 읽어 보고, 헌금을 계좌로 이체하는 것에 대한 생각도 해 볼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무엇인가 알아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바이러스 확산과 이단 혐오는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가 생각해 볼 것이다.

이러한 거리, 이러한 시간은 교인들이, 많은 한국교회가 그간 가르쳐 온 다소 과격한 형태의 자교회 중심주의로부터 물리적으로 벗어날 매우 드문 기회이다. 이 틈에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휴가를 다녀오느라 교회를 빠졌던 나는 왜 눈총을 받아야 했는가. 물어봐야 한다.

어떤 교회들은 다소 공격적으로 이 시간에 교인들이 틈을 갖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대면 예배와 최대한 흡사한 예배 경험을 주고자 노력할 것이고, 늘 해 오던 모든 사역을 최대한 온라인과 다른 대안을 통해 대체하고자 할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교인들이 교회 출석이나 예배 출석에 대한 헌신이 약화될 것을 걱정할 것이다. 심지어 교인들이 원래대로 돌아올까 염려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간 해 오던 사역들의 추동력(momentum)이 사라지거나 깨지는 것을 걱정할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이 교회를 튼튼히 세우고자 하는 사역의 본질이자 열심인 것은 일견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 교인이나 교회나 - 때때로 이것들이 교회가 교인을 향한 소유욕의 표현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지금은 성찰해 보아야 할 때다.

강한 소유욕의 부모는 자녀가 건강한 독립적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런 부모 아래서 아이는 분리에 실패한다. 부모에게 과도하게 의존적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분리불안장애를 경험하기도 한다. 자녀의 건강한 분리와 성장은 - 에릭슨에 따르면 - 신뢰를 기반한 관계에서 가능하다. 나는 이것도 역시 '틈'이라 표현하고자 하는데, 이 틈을 통해 자녀는 성장한다. 인간은 이 틈을 통해 탐구의 자유를 경험하고(루소), 새로운 자극의 수용을 훈련하고(피아제), 지속적인 통합의 과정을 통해 새로움(novelty, 화이트헤드)과 서사성(narrativity, 리쾨르)을 경험한다.

교회와 교인의 관계도 어떤 면에서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약 교회가 교인을 부모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처럼 묶어 두고, 외부와의 소통 및 자극을 과도하게 차단-조절하며, 개교회에 배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종교인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신천지와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마치 아동 학대와 같다. 교인은 교회의 부속이 아니며, 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 생활과 등가이거나 완벽한 포함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교인과 교회가 남남인 것도 아니다. 교회는 교인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책임과 의무가 있다. 다만 성숙한 성장의 결과가 동 교회의 장로이자 권사로 귀결되는 등의 닫힌 결말은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최근에 많이 회자되었다. 그런데 흩어지는 교회란 단순히 대형 교회가 자신의 몸을 쪼개 작은 교회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흩어지는 교회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신앙인으로, 성숙한 실천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내보내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교인들은 교회를 벗어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교회는 교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느슨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면, 이 모두 분리불안의 징후들이다.

이 불안은 교인과 교회 사이의 '틈'이 연습되고, 다시 만남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극복할 수 있다. 서로 간의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신뢰를 확인하면서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 지금의 거리, 지금의 틈이 중요하다.

우리는 첫째로 코로나19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며, 서로서로 불안하고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 내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 벌어진 시간을 눈과 귀를 막고 인내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봐 왔던 것들에 대해 낯설게 보기를 실천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살펴보기를 실천한다면 이 틈의 경험은 교회와 교인 모두에게 성숙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철 / 피스모모평화/교육연구소 연구실장, 전 퍼시픽종교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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