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사회는 복음과 이데올로기의 혼돈 가운데 있다. 기독교 복음을 각기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부분적으로 이용하거나 왜곡해 특정 세력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논쟁이 있다. '복음'(gospel)이라는 말은 '좋은 이야기'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god-spell'에서 유래하며,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이야기'를 뜻하는 라틴어 'evangelium'과 그리스어 'euangelion'을 번역한 것이다. 복음은 넓게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며, 유대교와 이슬람은 구약을 인정하며, 기독교는 신약을 주로 인정하며 구약까지 포괄한다. 요한복음을 뺀 복음서들(마태·마가·누가)에 병행된 본문이 많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비슷하게 다루고 있어서 18세기 말부터 3개 복음서를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고 불렀다. 흔히 복음은 십자가 죽음, 구원, 제자들의 전도 등을 포괄하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핵심으로 한다.

이데올로기(이념理念; 독일어, ideologie; 영어: ideology)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 또는 허위의식을 가리킨다. 프랑스 혁명기에 철학자 데스튀트 드 트라시(A. Destutt de Tracy, 1754~1836)가 자신이 사용한 '관념의 과학'의 약칭으로 도입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데올로기는 '아이디어(Idea)'와 같은 어원으로 말뜻 자체로는 '생각'이나 '관념'이다. 그러나 단순한 아이디어와 달리 이데올로기는 여러 생각과 관념이 체계적 틀을 갖고 뭉친 덩어리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개념을 가장 처음 명확히 규정한 사람은 마르크스(K. Marx)다. 그는 "이데올로기는 사회 현실의 토대인 경제구조에 따른 모든 사회적 의식 형태"로 보고, 사회의 하부구조(unterbau)인 경제적 토대가 종교·예술·도덕 등 정신적·문학적 상부구조(uberau)를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도식에서 이데올로기를 토대 위에 솟아 있는 '법적·정치적 상부구조' 전체로 보았다.

이데올로기는 철학자·정치가·경제학자 개인의 포괄적 이론 체계를 가리키기도 하며,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이 체계화한 틀을 말하기도 한다. 스미스(A. Smith)의 자유 시장 경제 이론과 마르크스의 계획 경제 이론 등을 경제적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대중과 국가의 통치 체제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정치·경제적 사상과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기제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등을 제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많은 문학·인문학·예술·사회과학 등에서도 사상적 흐름과 틀을 이데올로기로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에게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사회적 관점에서의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과 갈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좌우 개념은 본래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때, 급진적인 자코뱅당은 의회 왼쪽에, 온건한 지롱드당은 오른쪽에 앉으면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이라는 큰 목표 아래 좌우 이념이 크게 갈등하지 않고 협력하거나 공존해 왔다. 광복 이후에 사회주의 계열을 좌파, 자본주의 계열을 우파라 하며, 상이한 입장을 갖게 되고 결국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좌파, 우파 구분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바뀌며 보수(conservative)와 진보(progressive),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자유주의적(liberal) 등의 개념과 혼동하여 쓰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보수와 진보(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좌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북한에 대한 시각, 미국과 중국에 대한 시각, 통일에 대한 관점 등이 주요 요인이다. 경제적으로 성장과 분배에 대한 관점, 재벌·대기업·중소기업·소상공인·자영업에 대한 관점, 사회적 복지와 소외 계층(가난한 사람, 장애인, 외국인 등 다문화 계층, 소수자 등)에 대한 관점 등도 주요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보수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관점에서 북한을 괴뢰 집단, 군사적 관점에서 주적主敵, 타도·멸절해야 할 대상(국가보안법상 접촉 금지 대상), 김정은을 타도 대상 등으로 보다. 미국 중심 안보, 경제체제를 강조한다. 중국을 북한의 배후, 동조자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요주의 국가로 보며, 미중 갈등 시 미국 편을 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낮은 동의를 보이며 통일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문 조사 응답이 많고, 통일해도 실익이 적으며 남한에 엄청난 부담과 피해가 예상된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성장을 통한 부의 증대와 그 결과로 낙수 효과(trickle down)를 기대하며, 대기업 등의 성장을 통해 파이를 크게 한 후 더 많은 파급효과와 분배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기업의 국제경쟁력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국가의 부를 키우고, 중소기업으로 그 파급효과나 전후방 효과가 확장되어 전체적 국가 부를 늘릴 수 있다는 보며, 자율과 시장 경쟁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이 향상되면서 좀비 기업들이 퇴출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소상공인과 자영업들도 대기업과의 상생 협력으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적으로는 선택적 복지 틀에서 국가가 최소한의 복지 기반을 제공하면 되고 본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더 나은 복지와 혜택을 누리는 게 옳지, 모두에게 복지를 확장하는 것은 국가적 비효율과 생산성을 낮추는 결과를 낳고 게으름뱅이와 사회적 무노동 분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외 계층을 향한 배려와 국가적 혜택 제공도 제한적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비해 일반적인 진보적 관점은 북한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것을 통해 남북 쌍방이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어려움 속에서도 평화와 통일의 길로 더 전진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군사적으로도 DMZ을 평화적 이용, 적대 행위 저감을 위한 노력 제고 등을 제시한다. 미중 관계에서 미국을 최고 우방으로 우대하되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익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주장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국도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입장이며, 한중 무역이 우리 교역에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통일에 대한 필요성과 전향적 정책에 높은 동의를 보인다. 통일은 민족 필연의 과제이자 소원이며, 필요시 남한이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북한을 돕고 남북 경제 협력과 의존도를 높여야 함을 더 크게 주창한다. 경제적 성장도 중요하나 분배와 공평의 헌법 정신(헌법 제119조)을 강조한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가 정경유착과 IMF 사태를 불러온 주요 원인으로 생각해 대기업·중소기업의 협력과 공정거래를 강조하며,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산업 참여를 조정·제한해서 중소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적 복지를 더 넓게, 관련 예산을 더 많이 편성·집행하며, 특히 노인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강조한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지향점들은 지난 역사에서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문제는 극우와 극좌 성향의 지나친 주장과 이를 이용하는 정치 세력과 집단 이기주의 등으로 양측의 간격이 심화하는 것이다. 상대를 향한 비판이 강화되어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상대 주장을 무시하며 오히려 적대시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의 삶의 시대(기원전 3~기원후 30)와 이후 제자들이 신약성경을 완성한 초대교회 시대와 로마 가톨릭 시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및 근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에서 변함이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나 좌우 이념은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무려 1700년 이상을 훨씬 뛰어넘는 긴 시간과 간격이 있다. 성경과 예수님의 복음은 작금의 이념 논란과 상관없이 이미 거의 1800년 전에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진리와 가치체계를 가장 아름답고 명료하게 제시했다. 예수님은 산상 복음으로 참진리를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셨다. 다음과 같은 복음의 진수를 제시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의 십계명도 1~4계명의 하나님 사랑과 5~10계명의 이웃 사랑을 우리에게 명징하게 명령하신다. 그리고 구약의 핵심 진리 중 하나인 여러 제사 제도와 안식일 제도 및 희년(Jubilee) 제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와 공동체적 공존과 가치체계를 오래전에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마:20:1-15)로 일찍 온 품꾼이나 나중에 온 품꾼이나 동일하게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을 주어 삶의 기본 조건의 필요와 제공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으며, 동시에 열심히 일하여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의 높은 성과를 창출한 청지기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며 상 주셨다(마 25:14-30). 성경과 예수님의 복음은 오늘 우리의 갈등인 자유와 평등의 가치라는 좌우와 진보·보수의 문제를 이미 완전하고 통전적으로 해결하시며 방향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런 완벽하고 오묘한 진리 체계를 후대에 스미스나 마르크스 등의 학자, 또는 정치가·이론가가 성경의 근본 사상을 원용하거나 일부 이용하는 것으로 자신들 이론을 정립했다. 이후 형성된 진보와 보수, 또는 좌우 이념으로 복음을 끌어들이고 자신들 이익을 위해 복음을 재단하는 선동가나 거짓 예언자들의 언행은 복음의 근본에서 매우 멀다. 복음을 특정 파당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라는 좁고 작은 틀로 제한하는 행위는 자의적이며 부질없는 일이다. 복음의 통전적 이해보다 특정 정파 이익을 위해, 또는 반대 정파를 비판을 위해 복음을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국론을 나누어 갈등을 심화하는 행위는 허망하며 위선적이고 거짓되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종교개혁가 장 칼뱅(J. Calvin, 1509~1564)의 경제 윤리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님 중심적 접근으로 신본주의적 경제 윤리를 제시하며 세속주의적 경제관을 지양止揚했다. 단순히 이윤 목적(a profit-oriented science)보다 봉사 목적(a service-oriented science)으로 하는 과학을 제시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더 근원적인 목적이 경제의 지향점이라고 강조한다. 칼뱅의 경제 윤리를 보면,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커다란 신학적 틀 속에서 인간의 경제활동은 물질세계와 관계된 하나님의 창조(문화) 명령(cultural mandate) 수행이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청지기적 사명이 기초가 되나,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이웃을 자신 탐욕으로 이용하여 경제적 불균형과 부정의가 초래됨을 지적했다.

그의 경제사상은 이후 베버(M. Weber, 1864~1920)를 통해 자유경쟁과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로 이해가 강조되어 미국을 통해 우리에게 전파되었으나, 다른 한 축인 비엘레(Andre Bieler, 1914~2006)와 트뢸치(E. Troeltsch, 1865~1923) 등의 공동체 경제사상 등은 우리에게 간과되었다. 종교개혁자 칼뱅 등의 개혁과 예수님의 복음과 초대교회로의 회복과 실천이 인류 정책과 제도에 이루어졌다면, 이후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인류가 그렇게 많은 피와 아픔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삼 새롭기도 하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복음의 실천에 게으르며 포기한 시대에 평등의 기치를 든 공산혁명과 이후 70여 년의 냉전과 억압의 시대가 불가결하게 되었다. 다니엘 벨(D. Bell, 1919~2011)이 "새로운 의견 일치가 지식인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복지국가를 용인하고, 권력 분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혼합 경제체제를 인정하는 다원론이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이 지나고 구소련과 동구의 몰락으로 이데올로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도 이념 과잉의 시대에 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의 기도처럼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며,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 실현되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요 10:10)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가 선한 청지기의 삶과 일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 공의와 사랑의 구약 근본 원리를 회복하고, 적어도 초대교회와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편취하며 상대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복음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복음을 대체하는 것은 아파트에 사는 바퀴벌레 안에 아파트를 욱여넣는 것과 같다"라고 한 정치학자의 말이 새롭다. 복음은 온전하며 인류의 온전한 삶과 구원과 영생에 온전한 길을 제시한다.

김홍섭 / 인천대학교 동북아물류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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