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는 최근 젊은 신앙인들에게 삶에 대한 도전의식과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그가 다양한 현실의 소재를 활용하여 이 세상에서 힘차고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길에 대한 역설을 하고 있다는 점은, 자칫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낙오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청년세대들에게 호소력을 가질만한 면모라고 하겠다. 그는 유난히 ‘성취에 대한 동기부여’를 중요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주도권이 확보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나 글들은 현실, 즉 ‘시장’에서 성공한 예를 주시한다. 상업적 성취가 그에게는 매우 중대한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복음적 근거를 가진 메시지인가
그러나 이것이 과연 복음적 근거를 가진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생존경쟁과 능력, 효율 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시장의 법칙과 낮은 자리, 섬김, 희생 등을 강조하는 복음의 원리는 기본적인 모순의 관계에 있다. 하여 전병욱 목사는 시장의 논리를 거부해야 할 복음을 시장의 상품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신학과 설교에는 성서가 지향하는 의로움과 선함,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십자가적 고투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고 멸시 당하지 않는 성공한 자로서의 강력한 성취를 이루는 길에 대한 해법을 성서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눈으로 보자면, 나사렛 예수야 말로 철저히 실패한 존재일 터인데 그는 어떻게 이 모순된 논리를 감당하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전병욱 목사는 한국의 근대사에서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 동원되었던 ‘하면 된다’ 식의 반윤리적 밀어부치기식 성장논리를 신학화시키면서 마치 야전(野戰)의 승리를 이룰 수 있는 듯이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령, 그가 <목회와 신학> 2000년 3월호 ‘다보스 포럼’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이를 대가(大家)의 모임이라고 극찬하고 이러한 대가들과 접하는 기회를 통해 자신의 수준을 높이라고 설파하는 것은 그의 역사 의식과 세계 인식이 얼마나 오류에 차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뿐만 아니라, 낮은 자들과 함께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보기인 것이다.  

다보스 포럼의 대가(大家)를 닮아라?
<다보스 포럼>은 이른바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지구적 지배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오늘날의 세계에 빈부격차의 심화와 약소국 민족경제를 해체시키고 있는 세력들의 집회이다. 따라서 그가 기독교인으로서 직시하고 발언해야 할 바는 세계에서 최고의 교육과 금력,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세상의 작은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일이 되었어야 한다. <다보스 포럼> 한편에서는 바로 이들의 지배로 말미암아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그의 자리는 언제나 세상의 상석(上席)을 지향하고 있다.  

자신들의 지식과 힘을 초국적 금융자본의 지배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이들을 대가라고 칭송하는 전병욱 목사는 아마도 일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일본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동경대학출신 수재들의 실력을 또한 대가라고 칭송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힘있는 자들에게 핍박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의 의(義)일진대, 그에게는 이러한 면모가 발견되지 않는다. 전병욱 목사에게는 성공한 권세자들만이 눈에 들어오고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 대한 선지자적 예지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신앙은 오늘날 현세의 금력과 권력의 결탁에 눈뜨지 못하며, 도리어 그를 추구하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반(反)예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는 이들 소위 대가들이라는 자들이 짜놓은 세계경제의 불평등한 구조 밑에 깔린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혹 듣는다 해도 그에게 그것은 대가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의 한심한 처지가 될 뿐이다. 바로 이러한 그의 시각과 자세가 그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오만함의 뿌리가 되고 있다. 그는 전혀 겸손하지 않으며 경박한 언어를 구사하고 이를 자신의 특유한 성품과 연결된 자유로 착각하고 젊은이들의 신앙에 탁류를 쏟아놓고 있다. 이러한 이를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신앙적 용기와 희망을 주는 목자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중대한 불행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출발
<목회와 신학> 2000년 7월호에 실린 그의 영화 <글레디에이터>(Gladiator) 읽기도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이 영화의 첫 몇 분이 관객들의 눈길을 강하게 끌고 있는 점을 주목하고 이 영화의 성공적 요인을 분석하고 있다. 문제는 첫 5분의 성패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는다 해도 그 첫 몇 분간의 긴장과 치열함, 그리고 흥미유발의 능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교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 점을 기독교인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마치 첫 5분을 놓치면 복음의 미래는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말은 과장되어 있으며, 묵묵히 인내 속에서 복음의 실천을 하는 존재들은 아예 무시되어 있는 것이다. 첫 몇 분의 시선에 집착하는 자들은 흥미에 몰두할 수밖에 없으며 경박해지며 시선을 끄는 일이 최우선의 가치로 되어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시청률 우선의 방송이 얼마나 많은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보아도 이는 증명된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첫 몇 분간의 장면은 매우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살육의 장면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그가 말하는 처음 몇 분간의 시선끌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강렬한 충격성을 동기로 하여 사태를 주도하겠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의 윤리성은 따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속도감을 강조하는 압축 성장론’의 한 변형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몇 분간이 아니라 도리어 최후의 몇 분간을 보다 중요시 한 분이다. 그분의 첫 등장은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으며, 단지 갈릴리 촌구석의 몇몇 초라한 신분의 어부들과 죄인이라고 불린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있던 이들과 창녀들이 그와 어울렸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줄로 알았던 그의 미미한 움직임이 어느새 시간이 흐르면서 겨자씨가 자라는 것처럼 커지고 최후의 시각에 예수께서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신다.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길이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며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을 기다리는 믿음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전병욱 목사의 ‘첫 몇분론’은 이런 믿음의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며, 신앙을 조급하고 경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첫 시작을 보고 그대로 결론을 내려버리는 죄를 저지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급하고 기다릴 줄 모르며 신앙인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에 대한 자세가 흐려지고 있는 이 때에 교회의 지도자는 바로 이러한 자세를 바로 잡아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전병욱 목사의 이러한 논리와 자세는 오늘날 교회가 가장 배격해야 할 면모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제국은 선하지 않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로마 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잔혹한 폭력을 쓰고, 그 폭력으로 성취된 권력을 둘러싼 쟁투가 벌어지며 이 과정에서 지배자의 정치적 기반을 대중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검투사 광장’이 요구되었던 맥락을 그는 전혀 짚어내지 않는다. 물론 그의 목적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목사이며 바로 이 로마제국의 지배체제하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예수의 제자로 자처하는 이가 아닌가?  

오늘날 강대국들은 모두 이 로마제국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식민지를 지배해왔고, 전쟁을 구경거리로 제공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문제삼아야 할 바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제국은 결코 선하지 않다. 성서는 그것을 우리들에게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애굽을 비롯하여 바빌론,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등 약자 히브리 민족을 괴롭힌 제국은 그 어느 하나 선한 제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로마제국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마치 제국을 의로운 자의 손으로 구출한 듯이 만들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것을 간파하지 못한 글레디에이터 읽기는 우리를 제국의 신민(臣民)이 되도록 하는 길에 봉사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읽는다면 그 사람은 누가 되든지 제국의 선전자이지, 세상의 작은 자를 위해 자신을 바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없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면, 마땅히 첫 장면의 폭력성에 토를 달아야 하며, 제국이 함부로 동원하여 희생시켰던 검투사들의 운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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