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와 아내

▲놀랐고, 한편 멍했다. 왜냐면 명의라는 양반이 아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뭘 했을까,
하는 괴이한 추측이 자꾸만 들었던 까닭이었다. 요망스럽지만, 명의라면 으레 허준을
떠올려온 내게 그런 생각은 어쩔 수 없이 기계처럼 입력되고 말았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아마 아버지가 간암으로 투병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서점에서 이런 저런 정보를 얻기 위해 건강 코너에 놓인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보았다. 서울대병원 방사선과 전문의 박재형 박사.

'명의'라는 목록에 들어 있던 그의 이름은 내게 다른 무게로 와 닿았다. 그는 내가 근무하던 신문에 건강 칼럼을 쓰는 필자였다. 그 칼럼 담당자로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한 터였고, 아 그이가 명의로 불리는구나, 라는 인식을 머리에 새겼다.

그리고 얼마의 기간이 지난 뒤 그의 형제들을 취재할 기회가 생겼다. 그의 형제들은 흔치 않은 신앙 가문을 일구어내고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뇌종양 수술을 받은 그의 아내를 처음 만났다. 힘겹게 남편의 부축을 받아 앉고 일어서는 아내는 이미 언어를 잃은 상태였다.

놀랐고, 또 한편 멍했다. 왜냐면 명의라는 양반이 아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뭘 했을까, 하는 괴이한 추측이 자꾸만 들었던 까닭이었다. 요망스럽지만, 명의라면 으레 허준을 떠올려온 내게 그런 생각은 어쩔 수 없이 기계처럼 입력되고 말았다.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를 만났다. 서울대학병원 병실에서, 이제는 모든 걸 잃어버린 아내를 간호하고 있었다. 결혼 26주년을 자축하는 카드가 아내가 누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흔들며 굳이 아내와 '함께' 우리를 맞았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뒤 그의 일기 몇 부분을 이메일로 받았다(일기와 그의 이야기를 버무려 또 하나의 일기를 만들었다).

1997년 9월10일

0.02, 오른쪽 시력이 급격히 감퇴하고 있었다. 한 달 전에 0.7이었고, 두 달 전에는 1.5였는데…. 뭔가에 뒤통수를 쿵 부딪친 듯한 느낌이다. 두통이 없어 빈혈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안과 장 교수는 망막이나 각막에는 별 이상이 없다며 시신경을 확인하자고 했다. MR 촬영실에서 확인한 영상은 놀라움과 실망 그것이었다. 복병이었다. 뇌종양이 양쪽 전두엽을 누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아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내와 저녁을 먹고 장모님께는 그저 정밀 진단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아내는 아들과 전화했다. 딸아이도 엄마가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 수심이 가득하다.

기도한다.

"주여, 이 시련의 때를 잘 감당하게 하소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1997년 9월13일

긴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지만 여유가 없다. 추석이 지나고 금요일이나 되어야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종양이 뇌의 동맥을 둘러싸고 시신경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약물로만 치료하며 기다린다는 게 부담스럽다.

가끔 헛소리를 한다. 뇌의 작용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안타깝지만 별로 해줄 것이 없다. 무엇일까? 지금 이 상황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씩 밀물처럼 스며오는 생각들, 아내의 자리가 그렇게 소중했다는 것,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며 식사하는 풍경이 또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 한 지붕 아래서 편히 잠들 수 있다는 게 그리도 마음 든든하다는 것, 지금에야, 아내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지금에야 그걸 깨닫고 있는 안타까움….

아내에게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표현하고 아낌을 드러내지 못한 게 후회의 감정을 넘어 마음을 쿡쿡 찍어 내린다. 그 절대적인 결혼을 하고서 나는 아내를 상대적으로 다른 여인들과 비교했다. 지금 내 옆에 누운 아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결코 어느 누구와 비교해서도 안될 내 아내가 아닌가. 그럼 뭘까? 이 사랑의 관계를 비로소 확인하는 절차인가?

이렇게 적어둔다.

▲"기독 의사임에도 어쩌면 과거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을 이처럼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비로소 의사가 된 것인지 모른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우리 식구 모두가 더 감싸주고 결속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랑과 이해의 포용력은 이로 인해서 더 넓어지리라.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사랑할 것인지 훈련받게 되겠지. 다만 주님, 생명을 거두어 가지는 마소서. 우리가 함께 짐 지고 나누어 갈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함께 넘어지고 또 지쳐 울더라도….'

1997년 10월30일

수술 후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3주 째 들면서 아내는 몹시 힘들어했다. 말수는 줄고 먹기조차 힘들어했다. 다시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면 조금 회복됐다. 4주 째는 입안이 완전히 헐어 약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약물 부작용인 듯해 피부과 윤 선생에게 자문을 구하고 이비인후과 김 선생에게 보여줬다. 방사선 치료를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주 그만 둘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아침에 아내와 나눈 말씀이 떠오른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뇌종양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 중인 아내, 그럼에도 감사의 항목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적어 보았다.

'치료를 받고 있어 감사. 세상에는 치료받지 못하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다. 아내의 절대적인 존재를 발견하게 되어 감사. 아내는 우연히 만난 존재가 아니라 섭리 안에서 만나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지금 그 사람이 병중에 있다. 치료 기간 중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 감사. 너무 갑작스런 사고나 병으로 그런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보내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내는 행복한 여자였음에 감사. 사진첩에서 본 아내의 지난날은 늘 행복해 보였다. 평생을 불행하게 보낸 여자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병든 다른 이들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어 감사. 기독 의사임에도 어쩌면 과거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을 이처럼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비로소 의사가 된 것인지 모른다….'

쓰다보니 감사의 제목이 끝이 없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존경 그리고 선교여행

장신대에서 기독교교육을 가르치는 박상진 교수는 그의 동생이다. 형님이지만 존경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다.

"형수와 늘 새벽기도에 참여했고, 매주일 교회에 오면 형님은 형수를 업고 교회 계단을 오르내린다. 부끄러워하거나 위축되는 것이라곤 아주 없다. 퇴근해 집에 오면 형님은 형수를 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인사를 했다. 형님은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형수께 다정하게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형님은 환자들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신앙으로 투병하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형님이 형수와 떨어져 있는 기간은 매년 설 연휴 때다. 이 기간 형님은 인도 단기선교사로 주위의 다른 이들과 팀을 이루어 선교여행을 떠난다. 형수님이 누우신 뒤에 생겨난 전통이다. 그해 형제들은 명절을 맞아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예전처럼 형제들이 함께 연휴를 즐기기에는 형님 가족이 부담이 되었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통해 연말연시 휴가를 차라리 인도 선교여행으로 보낼 것을 결정했다.

우리는 4년째 이것을 실천해오고 있으며, 형님도 이때만은 형수와 떨어져 선교여행에 나선다. 오랫동안 기독의사회를 이끌며 후방에서 선교운동을 해오신 형님이 이제는 직접 현장에 나서게 된 셈이다. 시련을 또 다른 삶의 희망으로 일구어내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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