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와 모처럼 오붓하게 패스트푸드점에 갔다. 이틀 전쯤이었다. 집사람은 학생들 피아노 가르치러 나가고 작은 딸아이는 친구네 놀러가고, 큰 아이와 나랑 동그라니 보온밥통의 찬밥처럼 집안에 담겨져 버렸다.

일찌감치 둘이서 저녁밥을 먹고 Toys R Us라는 어린이 장난감 파는 가게에 갔다. 우리는 거기 자주 간다. 장난감을 사러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러 간다. 가서 자전거도 매장 안에서 씽씽 타고 자동차 책 온갖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래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다. 게임도 하고 신나게 놀다가 게임에 너무 열중해서 놀다가 나중에 영업 끝났다는 소리도 못들었다. 아마 정책적으로 그렇게 놀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부럽다, 그 풍요가.

그렇게 놀다가 맥도널에 갔다. 맥도널에 가서 2불 내고 프렌치프라이와 치킨너겟 6개 가져왔다. 거기다 1불짜리 딸기소스를 얹은 아이스크림 그리고 작은 콜라 한 잔을 시켜서 아이와 나는 참으로 배부르고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도 만족, 나도 만족
아이와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목이 말라서 콜라를 조금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콜라를 리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다 못먹으니 반만 달라고 했다.

그러자 백인 종업원아가씨 half냐고 다시 되묻더니 콜라를 들고 자동기계 앞으로 간다. 그런데 가만 보니 콜라를 하나가득 채우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가득들은 콜라를 들고 조금씩 버리는게 아닌가? 한번 두번 세번 조금씩 버리면서 반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체크하더니 결국 딱 반에 맞추어 내게 내민다.

내가 반만 달라고 한 이유는 콜라가 아까워서였다. 한 잔 가득 리플해주는 콜라는 너무 많아 먹고 버리기가 아까워서 반만 달라고 한건데 이 아가씨는 반만 달라는 나의 주문을 어떤 내 개인의 취향으로 알아듣고 딱 반을 맞추기 위해서 애써서 나에게 서브해준다.

이 지구상에 맞은 사람이 있지만 어떤 이들은 생존권 때문에 투쟁하고 어떤 이들은 안락을 위해 투쟁한다.

콜라 반 잔을 채워달라는 말에서 절약을 생각하는 사람과 콜라 반 잔에서 취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게 우리가 사는 이 땅이다.

콜라 반 잔에서 절약을 생각하는 사람은 콜라 반 잔에서 개인의 취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또 반대로 콜라 반 잔에서 취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콜라 반 잔에서 절약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도 역시 쉽지 만은 않은 법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이해하고 사는 법의 모범을 보이셨다. 하지만 이해하고 사는 모범의 희생은 예수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은 듯도 하다.

교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교회는 그들 나름대로의 교회의 존재 정의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존재정의가 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의 경험과 삶의 느낌과 그들의 철학이 교회의 존재정의의 요소를 이루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한 것은 이해와 배려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며 사는 것도 우리에게는 몹시 중요한 일일 뿐더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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