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담론이 한국 사회를 유행처럼 휘젓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고 결국은 감옥으로 끌려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 대한 다큐멘다리 기사와 뉴스가 여기저기 선을 보이고 있다. 군사 정부 하에서 결코 회자할 수 없었던 주제가 문민 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얼마 전부터 오태양이라는 청년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타이틀하에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인권 운동의 기수처럼 불쑥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진보라 자칭하는 그룹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양심적 병역거부' 논의가 인권 운동의 메뉴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오태양을 지지하며 여론을 형성해 나간 것이다.

그 동안 여러 명의 청년들이 '집총거부'라는 이유 때문에 형무소와 사회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들을 보면 가슴이 아픈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3년 짜리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7년씩이나 옥살이를 했다는 기사는, 이 나라 법이 지닌 불인(不仁)함과 불합리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형평성대로 하자면 3년 정도의 옥살이면 족한 것 아닌가? 그가 평생을 매달고 다녀야 전과자라는 딱지로 말미암아 겪어야 할 사회적 불이익까지 감안한다면, 결코 3년의 옥살이가 적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생계적 차원에서 볼 때, 공무원뿐만 아니라 사기업에서도 취직이 안될 터이니, 개인의 인생으로 보아 그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가 않다.

병역복무라는 것

-1966년 유엔에서 채택되고, 1990년 우리나라가 가입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CCPR)에 의하면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개인의 권리이자 인권의 요소이다.

멋드러진 선언이다.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 시달려온 한국사회에서 '양심'이라는 말이 지니는 상징적 권위는 남다른 데가 있다. 세속적인 이해 관계를 초월한 숭고함이 배어나는 말이다. 게다가 인권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역시 파우어가 대단하다. 현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인류사적 이념 중에 인권이라는 개념을 능가할 만한 게 별로 없다. 환경이라는 말이 요즘 인류사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권이라는 말이 지니는 추상적 함축성과 영역적 포괄성에는 현저하게 못 미친다. 환경 문제 역시 인권이라는 개념 하에 포섭되어질 수 있는 일개 영역에 불과하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총을 들지 않겠다는 생각은 공동체의 생존에 엄청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공동체 구성원 중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다. 너도나도 양심을 내세워 하지 않으려 한다면, 과연 그 공동체는 존속할 수 있는가?

실감나는 얘기다. 전쟁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보듯이 군사력의 약화는 결국 한 국가를 약탈과 식민화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대응 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가치를 내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밥 먹는 것을 절대적 가치로 숭상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밥 먹기를 그만둔다면 이는 바보 같은 일이다. 먹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으로 지켜야 할 어떤 가치가 있다면 먹는 것을 일시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게 일상으로 일반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병력자원으로의 효용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다른 측면에서 활용한다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오히려 이득이 될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는 현역복무자의 희생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하는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들을 감옥에 넣어두느니 다른 영역에서 뭔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다. 병역을 대체할 만한 일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되, 군대에서 훈련받는 것보다 더 고되게 또 시간적으로도 좀더 오랫동안 복무하도록 한다면, 군대 가기 싫어서 농땡이 치려는 부류도 걸러낼 수 있고 한 개인의 양심의 자유도 살려주고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이 논리에는 함정이 있다. 평화시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안이다. 하지만 전시를 고려할 때에는 그렇지가 않다. 전쟁이 벌어지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후방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고 '현역복무자'는 언제 죽음이 찾아들지 모를 전선에 총알받이로 나서야 한다. 한 인간의 생명이 걸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누가 무엇으로 생명을 대신할 만한 '형평성 있는 혜택'을 줄 수 있을까? 좀더 고생하느니 생명의 안전을 더 보장받을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상황에서 병역복무를 선택하는 인간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합리적인 선택을 할 정도의 식견이 없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단은 전쟁 중이 아니니까 가보자는 부류의 사람들이나 가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공동체를 위해 의무를 다하겠다는 숭고한 책임 의식을 지닌 사람들도 가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결국 군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불리한 상황에 처한 약자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빈민굴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전제해야 할 조건은 전시 상황이다. 전시 상황을 배제한 상태에서 논의되는 '대체복무제'는 '생존권'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전쟁의 본질은 '생존권'과 연관되어 있다. '현역복무'라는 것이 단지 젊은 시절에 군대에서 2-3년 썩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서는 올바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현역복무'는 사실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맡기는 것이다. 내 인생 전체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젊은 시절 한 때의 생명을 국가라는 공동체에 헌납한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봉사 차원의 행동으로 환원해서는 곤란한 부분이 감추어져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양심적 거부'라는 수사학

이 논의가 합의 가능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먼저 분명하게 정의해야 할 것이 있다. 병역거부를 '양심적으로' 한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종교적 교리 때문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생명을 죽이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는 철학적 성찰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인가? '양심적'이라는 개념이 지닌 모호성을 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되는 논의는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무수한 공론을 양산할 뿐이다. 명료화되지 않은 개념을 가지고 행하는 논의에서 제대로 된 합의가 도출될 리가 만무다. 서로의 입장만을 되풀이 주장하며 가치 선언만 내세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 저는 도저히 늙으신 부모님을 버려 두고 군대에 갈 수 없습니다.

이 청년의 고백은 양심적이 아닌가? 왜 아닌가? 종교의 교리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적 성찰이라는 현학적 껍데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늙으신 부모를 내버려두고 갈 수 없다는 고백만큼 더 처절하고 양심적인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땅에 가난한 집 자녀들이 어려운 살림을 늙은 부모에게 혹은 병든 부모에게 맡겨두고 군대로 가야만 했을 때, 그들이 마음에 품게 되는 한과 고통은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당장 끼니를 이을 쌀은 어디서 얻을 것이며 노인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누가 돌보나 하는 갖가지 생각에 가슴이 아파 오고 목이 메는 아들의 마음에는 절실한 양심의 호소가 흐르고 있다. 핏덩이 같은 자식을 한시도 버려 두지 않았던 부모가 이제 늙어 보살핌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를 모른 채 하고 떠날 수는 없다는 의무감 속에는 인류애라는 거창한 구호가 가능하게 되는 원초적 사랑의 뿌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 사랑하는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 청년의 고백은 어떤가? 사랑하는 그녀는 '종교적 교리'나 '철학적 성찰'보다 가치적 비중이 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그 청년에게는 그녀가 인생의 전부인 상황에서 말이다. 전시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군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좀더 실감나지 않는가? 제 인생의 전부인 그녀를 떠나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전쟁터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약점 때문에 유교 공동체에서는 '효'라는 가치 규범과 더불어 '충'이라는 가치규범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늙은 부모를 남겨두고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는 자식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냐 는 논리까지 가능했다.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이 생존권에 대한 싸움이기에 그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 싸워야 한다. 전쟁에 나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부모의 생존권을 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약자에 대한 고민

그러나 우리가 서구로부터 도입해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는 시민사회라는 범주에는 그런 가치의 유기적 연계가 무시되는 경향이 짙다. 개인의 인권이라는 깃발 아래 공동체적 의무나 가치가 인권 억압의 대명사처럼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민사회라는 것이,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을 모두 해결한 상태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도 여전히 세금과 병역이라는 의무조항들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의무조항들은 어떻게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시행되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그 사회 구성원 중 지식이 없는, 혹은 발언권이 약한, 혹은 경제적으로 무력한 약자들쪽으로 은근슬쩍 떠넘겨지는 형태로 제도화된다. 그래서 법률 고문이나 세무사를 동원할 만한 능력이 되는 인간들은 세금을 합법적으로 포탈하고 그럴 능력이 안 되는 인간들은 꼼짝없이 봉급에서 받아보기도 전에 떼인다(원천징수제도). 개인은 벌금 몇 천 원만 체납해도 집이 차압 들어가는 판에, 권력이 쎈 언론은 몇 십 년째 세금 포탈해먹다가 걸려도 언론 탄압이라고 위세를 떨며 자신을 방어하고, 설령 재수가 없어 사주가 구속되어도 능력 있는 변호사 덕택에 집행 유예나 가석방 형태로 적당히 풀려 나온다.

병역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병역이라는 그물을 피해갈 다른 방도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양심에 따른 자율적 선택'이라는 명목 하에 슬쩍 넘겨주는 것은 아닐까? 결국 군대 가려는 사람이 줄어들면 모병제로 가야 할 것이다. 사실 모병제는 군대를 안 가도 할 일(?)이 많고 먹고 살만한 부류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제도다. 예전에 농사일 대신 해줄 머슴을 부리듯, 전쟁을 대신해 줄 전사를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결국 이래저래 취직도 못하고 당장 끼니도 어려우니 군대라도 가서 밥이라도 먹어야 하는 약자들의 몫으로 병역의 의무가 떠넘겨지는 것은 아닌지, 이 시대의 인권 운동은 진지한 반성을 해봐야 한다. 갖가지 부정한 편법으로 병역의 의무를 비껴가는 부도덕한 상류층의 행태에, '양심적 거부'라는 수사어를 내세워 슬쩍 동참하는 것은 아닌지 심도 있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깃발 아래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논지는, 일부 소수 무리가 돈과 권력을 이용해 부정하게 비껴가던 것을, 좀 배우고 먹고 살만한 다수의 무리가 상대적 약자들에게 지식과 돈을 이용해 합법적으로 떠넘길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생산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토대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돈 있고 빽 있는 신의 아들들만이 전쟁터에서 빠졌지만, 앞으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어둠의 자식들만이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리고 능란한 말재주에 아는 것도 많은 지식인들은 이를 '자유'나 '다양성'이라는 말로 그럴 듯 하게 포장하며 그 상황을 합리화하지 않을까?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하여

이 사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구속 수감 이외의 어떤 대응안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와 개인이라는 양자의 관계에서 한쪽에만 짐을 지우는 것이다. 병역을 거부하는 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인간적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병역을 복무한 자들에게 '우린 뭐냐, 우린 인간적 대우를 받았냐'는 상대적 차별감을 갖게 한다.

이 차별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달리 대응할 방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양쪽에 똑같이 제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달리 대처할 대응 방안이 없는가' 하는 점이 쟁점화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이 문제에 대해 달리 대처할 방안은 없는가' 하는 점도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 즉 병역거부 외에는 달리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방법이 없는가 하는 점도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사회 전체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가 용이해진다.

이런 것은 어떨까? 군대를 간다. 똑같이 훈련도 받는다. 전쟁이 발생하면 똑같이 전선에 투입된다. 하지만 총은 쏘지 않는다. 적어도 사람을 맞추어 죽이기 위한 살인 행위는 하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허공을 향해 총을 쏠 수도 있지 않을까?

굳이 병역을 거부해야만 '생명의 존엄'이라는 자기 양심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단지 사회 공동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할 것인지만을 논의하는 것은, 병역복무자들에게 또 다른 차별감을 심어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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