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물들 가운데, 다윗만큼 유명하고 높임을 받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적 블레셋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넓히고,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의 중심으로 삼아서, 나라를 부강하고 안정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시에 뛰어났으며 신앙심도 깊어서 시편에 수록된 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화려한 경력 때문에, 그의 인간적 면모가 가려지는 면이 있다. 성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에 대해 많은 것을 전해 주며, 그러한 것들을 살펴보면 그런 화려한 경력들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한 악성 두통 같은 것을 앓은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은 누가 곁에서 수금을 타면 그 증세가 나으리라 생각하고 사람을 찾았는데, 다윗이 뽑히게 되었다. 다윗은 수금을 잘 탔는지, 그가 수금을 타면 사울의 증세가 가라앉곤 했다고 한다. 사울은 다윗을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지도 않고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삼았다. 요즘 말로 하면 경호실장쯤 되는 셈이다. 궁중악사로 불려갔는데 금세 경호실장 자리에 오른 것을 보면, 왕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사울은 나중에 다윗과 경쟁관계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적대시하기는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늘 다윗을 아들 같이 대하고 좋아하였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유명하다. 요나단은 제 목숨을 아끼듯이 다윗을 아끼어,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기로 굳게 언약을 맺었다. 그는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게 되자, 거의 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계획을 짜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준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만나서 먹을 것을 구한 적이 있다. 제사장은 보통 빵은 없었지만 다윗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제사장이나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인 제단 빵을 그에게 주었다. 이 일로 그는 나중에 사울에게 처형을 당하게 된다.

민심도 사울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기울고 있었는데, 개선하는 병사들을 환호하며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불렀다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 18:7). 사울이 아직 왕좌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 앞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으니, 다윗의 인기가 얼마나 하늘 높이 치솟았는지 알 만하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다윗을 좋아하게 하였는가? 이 노래에서 나타나듯이,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것도 대중적 인기를 모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이유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는다. 어찌하여 아히멜렉은 자기 목숨을 걸고 다윗을 구해 주었으며, 요나단은 아버지를 배반해가면서까지 그를 도와주었는가. 어찌하여 사울은 다윗을 평생 경쟁자요 원수로 여기면서도, 다윗을 ‘나의 아들 다윗’이라고 부르면서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가(24:16; 26:17, 21, 25). 이것은 다윗에게 가까이 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자신만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서의 몇 몇 언급들을 통해서 그의 인간됨의 비밀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는 주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물건을 전해 주러 갔다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쾌거를 거둔다. 그가 싸우러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형도 말렸고, 사울 왕도 걱정을 하였다. 골리앗은 가소롭다는 듯이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고 하면서, 돌 하나를 무릿매로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서 쓰러뜨린다. 어린 소년이 장비 같은 장수를 쓰러뜨렸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이야기를 다윗의 용맹을 보여 주는 무용담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흐르는 주제는, 다윗은 골리앗에게 객관적인 전력으로 봐서는 질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싸움은 칼과 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한다는 것이다. 일개 목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성서에 자주 나오는 것이지만, 특히 다윗을 묘사할 때 자주 나오며, 그래서 마치 다윗의 특성처럼 되어 버렸다(16:18; 18:12, 14, 28).
다윗과 대조를 이루는 인물은 사울이다. 그는 전투의 능력에서나 성품에서나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제사장 사무엘의 권한을 침범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일로 사무엘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났다(16:14). 그런 다음에는, 그가 왕좌에 앉아 있어도,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다윗은 주님의 영이 그와 함께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해처럼 떠오르게 되었다. 사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난 것은 그가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하신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사무엘이 새 왕을 세우기 위해 다윗의 집에 갔을 때, 그는 주님이 정하신 인물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 집 아들들을 하나씩 데려오라고 하였다. 사무엘은 첫아들의 인물이 준수하고 키가 크므로, 바로 그가 주님이 세우시는 인물이구나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사무엘에게 그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고 하신다. 그리고 나서 다윗이 오자 바로 그라고 하셨다. 다윗은 겉모습보다는 중심이 좋은 사람이라 하겠다. 중심이 좋은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며, 믿음직한 사람일 것이다. 요나단이 그렇게 다윗을 믿고 또 좋아하여 자기 자신보다 더 아낀 것은, 그 만큼 다윗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거나, 진실하지 않고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윗은 일 속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다윗은 어려부터 베들레헴 근처에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치면서 자라났다(17:15). 사무엘이 왕을 세우려고 다윗의 집에 갔을 때도 다윗의 형들은 다들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었다. 집안에서는 막내지만 일하는 데서는 절대로 막내가 아니었던 셈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을 때, 사울 왕은 다윗에게 ‘네가 너무 어려서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했지만, 다윗은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 ……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17:34-37).

아무리 어린 사람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 사울도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자신의 투구와 갑옷과 칼을 주어 출전하게 하였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의 용맹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그의 믿음도, 모두 그가 양 떼를 치면서 맹수들과 싸운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일 속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다윗은 매사에 일을 잘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는,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든지, 맡은 일을 잘 해냈으며, 그리하여 사울이 다윗을 장군으로 임명하였을 때도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그 일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18:5). 그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나거나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지만, 일 속에서 단련되고 경험을 쌓고 성숙해가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질을 갖춰나간 것이다.

셋째로, 다윗은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다. 그는 형을 일곱이나 둔 막내이다. 어려부터 형들에게 치이면서 자랐다. 귀공자로 자란 것이 아니라 양 떼를 치면서 자랐고, 그가 말하듯이 그렇게 사자나 곰하고 싸움이나 하면서 컸다. 그가 인간관계가 좋은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치이고 낮은 자리에 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얼마나 다급했으면 원수인 블레셋 족에게로 가서 자신을 의탁한 적이 있다. 그 곳 왕은 다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받아 주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에게 다윗은 위험인물이니 그에 대해 경계심을 풀지 말라고 하였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서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하였다. 그는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21:11-13). 꼭 중국 고사에 나오는 것 같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윗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위기를 많이 겪고 고생을 많이 했는가 알 수 있다. 그렇게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그는 거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넷째로, 다윗은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성서는 다윗의 허물을 감추지 않는다. 다윗은 자기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좋아하여 그를 왕궁으로 데려다가 정을 통하였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알고서 다윗은 그것을 감추려고 하다가 잘 되지 않자, 야비한 방법으로 우리야를 죽게 만든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자기의 아내로 삼는다. 예언자 나단은, 다윗의 이런 행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심판을 선포한다(삼하 12:10). 실제로 그 후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큰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그 복수로 암논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난다. 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을 왕궁에서 쫓아내고, 다윗의 후궁들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을 하는 수치스런 일이 일어난다. 이러한 다윗의 허물은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다윗의 모습에서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지도 모른다.

끝으로, 다윗은 광기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수도로 정한 다음에, 그 곳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법궤를 싣고 가던 소들이 뛰고 법궤에 손을 댄 사람이 죽는 등, 그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법궤를 성 밖의 한 곳에 머무르게 했다가, 석 달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성 안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다윗은 너무나 기뻐서 큰 축제를 벌였다. 그는, 법궤를 멘 사람들이 몇 걸음을 옮겼을 때,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다. 그리고 다윗은 모시로 만든 작은 옷만을 걸치고, 법궤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6:14).

한 나라의 왕이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는 것은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춤을 추었던지, 또 그것이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꼴불견이었던지,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에게 빈정거리며 말한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한다.

“주께서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6:22).

다윗이, 자기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한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는 본래 목동으로 자랐고, 명절이나 축제 때면 신명나게 어울려 춤을 추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춤을 추며 자랐을 것이다. 그가 시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가 ‘끼’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다. 본래 그런 끼를 타고났고 또 어린시절부터 그런 끼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살아 온 사람이 왕이 된다고 그 끼가 어디 가겠는가. 그러나 왕이 된 후로 그는, 왕의 체면 때문에 아마 그렇게 신명나게 춤을 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날은, 그의 아내가 그렇게 그를 업신여길 정도로, 왕의 체면을 다 던지고 열광적인 춤을 춘 것인가? 법궤가 자기 뜻대로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뻐서인가? 그것만이 이유라면, 그렇게까지 열광적으로 춤을 출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점잖게 앉아서 찬양할 수만은 없다고 한다. ‘주님 앞에서’라면, 좀 창피스럽고 천박해 보여도 좋으니, 자기 자신을 잃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춤추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 그의 춤은 그저 그의 끼를 발산하는 춤이라기보다는, ‘주님 앞에서’의 춤이다. 성서는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6:14). ‘주님 앞에서’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왕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여전히 양치는 목동이요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도 때로는 양치기 목동으로 돌아가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그는 그 모든 것을 벗고 벌거벗은 존재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양치기에서 왕이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시련을 겪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환호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죽임을 당했는가. 그의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는 무엇인가.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일이 이보다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그런 죄나 실패가 꼭 그 일 이후에만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누구 앞에서도 자기를 풀어헤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누구 앞에서도 풀 수 없는 물음들을 안고 사는 존재이기에, 그는 주님 앞에서 더 힘차게 춤을 추었는지도 모른다.

<희랍인 조르바>라는 영화를 보면, 늘 사업계획을 하거나 책만 보고, 전혀 웃거나 춤을 추지도 않는 진지한 모습의 ‘대장’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책 같은 것은 보지도 않고 풍류를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조르바가 등장한다. 언뜻 보기에 조르바는 게으르고 약속도 잘 지키지 않고, 무엇 하나 도움 되는 게 없는 사람 같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들 그를 좋아한다.

그들의 사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 대장은 허탈한 심정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두 사람이 석별의 정을 나누는데, 문득 조르바가 대장에게 말한다.

“대장은 모든 걸 가졌어. 한 가지만 빼고. 광기야. 사람에게 광기가 없으면 밧줄을 자르고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

이 말을 듣고 나서 대장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는 춤 같은 것은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로 춘 적이 없는 사람이다. 둘은 그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음악에 맞추어 덩실 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조금 전에 사업이니 실패니 했던 것들은 해맑은 웃음에 실어 날려 보내면서. 푸근한 안소니 퀸의 표정과 그의 어깨춤은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해 준다. 샌님 같던 대장은 조르바를 따라 춤을 추면서 비로소 구원을 받은 듯한 웃음을 짓는다.

어쩌면 다윗은 조르바의 원조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광기가 있었다. 그를 얽어매는 모든 밧줄을 끊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광기. 어쩌면 그것은 그의 삶에 나타난 모든 것들의 원천일 것이다. 수금을 타고,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시편에 있는 그런 주옥 같은 신앙시들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신앙으로 산 것도, 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출 수 있는 광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사랑을 받은 것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자기를 열어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재성 목사(민들레성서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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