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이 담장 위로 솔솔 불어옵니다. 민들레 잎파리를 조심스레 흔들며 아무도 모르게 옵니다. 담장 밑에 키 작은 채송화는 솔바람을 이불 삼아 덮고 어느새 곤히 잠이 듭니다. 밭두렁 씀바귀는 바람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며 춤을 추듯 신나 해 합니다. 저 멀리 강가에 갈대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제 몸을 흔들며 흐느낍니다.

  "나야! 나. 솔바람."

속삭이듯 민들레 몸을 흔들며 솔바람은 악수를 청합니다.  언제나 솔바람은 소리 없이 찾아옵니다. 울보바람은 웅!웅! 울며 오고, 칼바람은 쌩!쌩! 잔가지들을 칼로 치듯 무섭게 오지만 솔바람은 이 세상을 포근한 솜이불로 덮듯이 옵니다.

  "솔바람 아저씨! 아저씨는 어디에서 오셨어요?"

민들레는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평소에 궁금해했던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몸 중에서 유난히 긴 잎파리를 부산스레 흔들며 묻습니다.

  "어디에서 오긴, 바람이 모여 사는 바람마을에서 왔지."

  "바람마을이요?"

꽃마을, 새마을은 들어 보았지만 바람마을은 처음 들어 봅니다.

  "음. 파란 강물을 따라 흘러서, 다시 파란 산을 따라 구름처럼 두둥실 날아 가다보면 파란 하늘과 만나는 곳에 바람이 모여 사는 바람마을이 있단다."

민들레는 솔바람 아저씨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파란 강? 파란 산? 파란 하늘?'

민들레는 잎파리 하나를 머리에 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지만 파란 하늘과 만난다는 바람마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음. 바람마을까지 가려면 몇 밤 걸리나요. 하룻밤? 이틀 밤? 사흘 밤? ....?"

  민들레는 자기 몸에 있는 잎파리들을 하나 둘 들어 올리며 날을 세어 봅니다. 열 개도 채 되지 못하는 잎파리로는 셀 수가 없어 자기 몸의 새끼 잎까지 만세를 부르듯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리며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그럼! 이 만큼 밤이면 되나요?"

솔바람 아저씨는 허!허! 웃으십니다.

  "바람마을은 하루면 갈 수도 있고, 아니면 10년이 넘게 걸려도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하시네?'

민들레는 파란 하늘이 만나는 곳에 있다는 바람마을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솔바람 아저씨! 바람마을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네?"

민들레는 뿌리까지 놀랄 정도로 온 몸을 들썩이며 솔바람 아저씨께 조릅니다. 솔바람 아저씨는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민들레 몸을 포근히 감싸 안았습니다. 그리고 솔솔솔 노래하듯 바람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바람마을에는 생명을 다스리는 분이 계시단다. 그 분은 당신의 숨을 불어 바람을 만드시지. 그리고 그 바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어요. 바람은 이 세상 처음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일에서부터 무럭무럭 잘 자라도록 돌보는 일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는 그 분의 품으로 데려오는 일까지 모두 한단다."

어느새 솔바람 아저씨의 바람마을 이야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잠자던 채송화는 귀를 쫑끗 세우고, 춤추던 씀바귀는 다소곳이 앉아 듣습니다. 소리 없이 흐느끼던 갈대들도 바람마을 이야기에 슬픔을 다 잊은 듯 파란 잎에 더 푸른빛을 띠우며 듣습니다. 하늘 높이 올라가 쫑알거리던 종달새도, 앞산에서 뛰어 놀던 산토끼도 내려와 민들레 곁에 앉아 듣습니다.

  "바람을 만드신 그 분은 보드라운 솔바람, 꽃향기 가득한 꽃바람도 만들지만 섬뜩한 칼바람, 돌개바람, 그리고 천둥번개를 섞은 도깨비바람, 많은 비와 돌개바람을 함께 섞어 만든 태풍이라는 무시무시한 바람도 만드셔요."

칼바람, 돌개바람 소리에 모두 섬짓 놀랍니다. 칼바람이 부는 날이면 모두가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봄 어느 날, 햇살도 따사로이 내리던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느닷없이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갈대 잎이 꺾이고, 들풀들은 너무 너무 무서워 아예 바닥에 몸을 깔고 지내야 했습니다. 종달새는 바위틈에 꼭꼭 숨어 있었고, 산토끼는 토끼 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솔바람이 불어와 꺾였던 잎파리를 치료해 주고,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워 준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고마운 일입니다.

  "언젠가는 꽃바람이 불다가도 강한 칼바람이 불고, 돌개바람이 불다가도 솔바람이 부는 것은 다 생명을 다스리는 그 분의 큰 뜻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사람은 태풍이 불고 많은 비가 내려 피해를 입으면 그 분을 원망하지만, 그것 또한 이 자연과 생명을 다스리기 위해 하시는 그 분의 일인거지."

솔바람 아저씨의 말씀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솔바람 아저씨는 다시 한번 바람을 살랑! 살랑! 일으키더니 하
늘의 비밀을 알려주듯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바람이 하는 일은 그 분의 숨을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전하는 거란다. 그 분의 숨을 받아서 모든 생명이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지. 바람을 통해 그 분의 숨을 받은 생명 안에는 그 분의 생명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민들레야! 바로 네 몸 안에도 그 분의 숨이 들어 있으니, 네 몸 안에는 이미 그 분이 들어와 계시단다!"

솔바람 아저씨의 말씀을 숨죽이며 듣고 있던 민들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몸 속에 불덩이가 들어온 것처럼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네 몸 안에 이미 그 분이 들어와 계시단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은 이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달새는 너무 놀라 푸드득 날개 짓을 했고, 산토끼는 앵두알처럼 빨간 눈이 더 빨게 졌습니다. 갈대들은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는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습니다.

씀바귀는 눈만 껌벅인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고, 채송화는 조그만 몸이 더 오그라든 듯 작아 졌습니다.

  "놀랄 것 없단다. 그 분은 너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너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셨으니까. 단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이란다."

  "음. 바람 아저씨 ... 그러니까 ...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그 분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거군요."

민들레 옆에 있던 종달새가 좀 정신이 들었는지 이 놀라운 사실을 다시 확인하려는 듯 힘주어 물어 보았습니다.

  "그렇단다. 종달새야! 너도 네 안에 계신 그 분의 힘으로 살아가는 거란다."

민들레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구름 가족이 이사를 가는지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해님은 벌써 민들레 이마 위에까지 와 있습니다. 저 하늘에만 계실 거라고 믿고 있었던 그 분이 보 잘 것 없고 먼지 낀 자기 몸 안에 계시다는 솔바람 아저씨의 말씀은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내 안에 그 분이 계시다고?'

  "얘들아!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내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너희에게 그 분의 숨을 불어넣어 주고 가마."

솔바람 아저씨는 입안에 잔뜩 그 분의 숨을 모으더니 푸- 푸- 길게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얘들아! 또 오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 분을 잘 모시고 있어야 한다. 그럼 안녕!"

솔바람 아저씨는 살랑! 살랑! 손을 흔들며 저 산 너머로 날아 가셨습니다. 솔바람 아저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민들레는 좀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이 내 몸 안에 이미 와 계시다고?'

  '그 분을 잘 모시고 있어야 한다고?'

그 때부터 민들레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분을 잘 모실 수 있을까?'

이런 고민에 빠진 것은 민들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채송화는 아예 돌담에 머리를 기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고, 씀바귀는 기도하듯 땅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산토끼는 너무 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깡충깡충 뛰어 가기만 합니다. 종달새도 역시 하늘 높이 올라가 노래 부르는 것도 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민들레는 예쁜 잎파리들을 한 곳에 모으고 그 분께 기도를 합니다.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 하나님! 제 몸 안에 계셔서 보잘 것 없고 어리석기만 한 저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제 몸 안에 생명으로 계신 하나님을 잘 모실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세요. 하나님!"

민들레의 기도는 간절했습니다. 해님이 서산에 너머 가고, 별들이 하나 둘 별밭을 일구는 밤이 될 때까지도 민들레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민들레의 몸에 이슬방울이 맺혔습니다. 그것은 민들레의 몸 속에서 흘러내리는 땀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와 민들레의 땀을 식혀 줍니다. 민들레는 바람 따라 온 몸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민들레의 마음 한가운데에서 그 분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민들레야! 네 안에 있는 나를 잘 섬기는 것은 바로 네 몸을 맑고 깨끗하게 닦고, 소중히 여기는 거란다.'

솔바람 아저씨가 올 때처럼 아무도 모르게 들려 오는 그 분의 음성은 너무도 포근했습니다.

  '민들레야! 네가 작은 잎파리를 흔들며 춤을 추면 나도 너와 함께 춤을 춘단다. 네가 목  말라 긴 목을 축 늘어뜨리고 울먹이면 나도 너와 함께 울고, 네가 꽃망울을 터트려 예쁜 꽃을 피우며 환한 얼굴로 웃으면 나도 너와 함께 웃을 수가 있지. 민들레야!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단다.'

이제는 민들레의 몸은 자기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그 분의 것입니다. 민들레는 하루를 살아도 자기 마음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계신 그 분을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남의 것을 탐내면 꼭 그 분의 얼굴에 그늘이 질 것 같아 그런 생각은 이제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민들레야! 네가 예쁜 꽃을 피우면 나도 너와 함께 웃을 수가 있단다.'

민들레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분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쁜 꽃을 피워 자기 안에 계신 그 분에게 맑은 미소를 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민들레는 자기 몸에 남아 있는 힘을 꽃망울에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뿌리에서 줄기까지, 줄기에서 꽃망울까지 모든 힘을 모읍니다. 땀이 비 오듯 하고, 현기증 같은 것이 일기도 하지만, 그 분에게 작은 기쁨을 줄 수만 있다면 이까짓 고통은 다 참아낼 수 있습니다.

꽃망울이 곧 터질 듯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꽃망울을 터트릴 힘이 없습니다. 이대로 쓰러져 죽을 것만 같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잃고 쓰러진 민들레를 일으켜 세워 준 것은 솔바람 아저씨였습니다. 민들레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에는 이미 노란 민들레꽃이 아름답고 눈부시게 피어있었습니다.

솔바람 아저씨가 민들레에게 그 분의 숨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숨을 말입니다.

  "민들레야! 장하구나. 너는 그 분이 주신 생명을 잘 가꾸었구나."

솔바람 아저씨는 민들레 잎파리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며 말했습니다. 민들레는 지친 어깨를 솔바람 아저씨에게 기대었습니다.

  "솔바람 아저씨! 내 안에 계신 그 분의 얼굴에 작은 미소짓는 모습이 보여요.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민들레야! 이제 너도 그 분의 숨을 불어 주는 바람이 될 수 있단다. 네 꽃잎 사이로 흘러나오는 향기는 바로 네 몸 안에 계신 그 분의 숨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란다. 민들레야! 너의 향기에 가득 담긴 그 분의 숨은 이 세상에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단다. 너는 이제 그 분의 숨을 전하는 바람꽃이 된 거야. 바람꽃!"

민들레는 온몸으로 솔바람 아저씨를 꽉 끌어안았습니다. 민들레꽃은 자기의 향기를 솔바람 아저씨와 섞었습니다. 민들레의 향기는 솔바람과 함께 파란 강을 따라 흐르고 흘러, 파란 산을 넘고 넘어 파란 하늘이 만나는 곳까지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의 숨으로 만들어진 바람이 모여 산다는 바람마을은 민들레가 바람꽃이 된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민들레는 생명이 죽어 가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찾아가 그 분의 숨을 불어 주는 바람, 바람꽃이 되어 날아갑니다.

채희동/온양벧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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