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에 부흥회에서 믿음에 관해 아주 감동적으로 들은 얘기가 있다. 어느 줄타기 명수가 있는데 얼마나 줄을 잘 타는지 아무리 높고 험한 곳에 줄을 매어 놓아도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가로질러서 줄을 매어 놓고 그 위를 가기로 했다고 한다. 수만의 군중이 환호하고 지켜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가 군중에게 묻기를 "내가 이 줄을 타고 여기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였다. 모두들 믿는다고 환호했고, 그는 성공적으로 줄을 타고 건너갔다. 다음에는 의자를 하나 들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다들 믿는다고 환호했고 역시 그는 의자를 들고 무사히 줄을 타고 건너갔다. 그는 이번에는 "내가 한 사람을 업고 여기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고 물었다. 군중들은 모두 믿는다고 했다. 그때 "누가 내게 업히시겠습니까?" 했더니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해지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흥회 강사는 그 이야기 끝에, 그 줄타기 명수는 예수와 같으며,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는 군중은 우리 자신과 같다고 했다. 예수를 말로만 믿는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예수께 맡길 수 있어야 참된 믿음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참 감동적으로 들었기에 지금까지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그 후로 나는 그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믿음이 형편없는 것이라고 탓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새벽기도에도 나가면서 뭔가 믿음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살펴보면 늘 자기 것을 챙기고 있지 전적으로 맡기고 있지는 못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은 은근히 나를 자책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내가 위선자가 아닌가 반성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진정한 믿음인가 싶다. 난 지금도 아무리 훌륭한 줄타기 선수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그에게 업힐 생각은 없다. 내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그런 도박에 나를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를 맡기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지 믿음이 아니다. 왜 우리는 예수를 무모한 요구를 하는 줄타기 선수로 만드는가. 왜 예수를, 우리에게 '베팅(betting)'을 요구하는 도박꾼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믿음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식 투자나 경마 같은 데서는 순간의 판단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잃기도 한다. 벌든 잃든 돈을 거는 그 순간에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스릴 넘치는 믿음, 그런 '베팅'에 익숙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려는 것이 아닐까. 예수를 믿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예수를 가장 잘 믿는 이는 주식 투자가처럼 판단력이 좋거나 도박꾼처럼 베팅을 잘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줄타기 선수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 마태복음 14:22-33에도 나오는데, 이른바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신 이야기'다. 어느 날, 예수의 제자들이 탄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 있었는데,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와서 그들은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예수가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오자, 그들은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는 곧 그들에게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였다. 이 때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였다. 무서워서 소리를 지를 때는 언제이고 금세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온 것일까. 역시 예수의 수제자다운, 용기 있고 믿음 있는 모습인가. 어쩌면 그것은 좀 만용을 부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지금 풍랑 때문에 배가 위험하면 어떻게든 배가 뒤집히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지, 물위를 걷는 것이 뭐 그리 급한 일인가. 예수는 그의 청을 들어주어 오라고 한다. 그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에게로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자, 다급해진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는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였다.

바로 이 마지막 구절 때문에, 이 이야기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바라볼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거센 풍랑을 보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혀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만 바라보고 믿을 때는 물위도 걸을 수 있지만 세상의 시련 때문에 의심을 품으면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물위도 걸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자기 확신 또는 신념일 뿐이다. 무슨 일이든 정신을 집중하여,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면 성공할 확률도 높고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어느 평범한 여인이 자신의 아이가 차에 깔린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괴력을 발휘하여 1톤이 넘는 차를 번쩍 들어올리고 아이를 구해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신력의 힘이요 신념의 기적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요, 예수를 믿는 믿음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이다. 또, 아무리 그런 신념의 기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물위를 걷는 일이 실제 상황에서 가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느 마을에 목사 한 분이 새로 부임해 왔다. 이미 와 있던 선배 목사들이 그를 환영하고 또 동네 구경을 시켜 준다고 그를 데리고 호수로 낚시를 갔다. 셋이서 배를 타고 호수 한 가운데 왔는데, 한 선배 목사가 "아 참, 낚시 바늘을 안 갖고 왔네. 잠깐만 기다리게 금세 가져올테니" 하더니, 물위를 걸어서 호숫가로 가서 낚시 바늘을 가지고 다시 물위를 걸어서 오는 것이었다. 한참 있다가 다른 선배 목사가 "아 참, 떡밥을 잊고 왔네. 잠깐만 기다리게 금세 가져올테니" 하더니 역시 물위를 걸어서 갔다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신참 목사는 한참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물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일까, 내게도 저런 믿음이 있는 것인가……. 그는 고민 끝에 자기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도 "나도 도시락을 잊고 왔는데 금방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물위를 걸어서 호수가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발을 내딛는 순간 물 속으로 풍덩하고 빠지고 말았다. 그때 선배 목사들이 서로 마주보며 하는 말. "이쪽 물 속에 바위 길이 있다고 미리 말해 줄 걸 그랬지……."

우스개 이야기이긴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 일깨워 주는 면이 있다. 이 신참 목사도 베드로처럼 발을 내딛는 순간 의심을 해서 빠져 들어간 것일까. 그가 끝까지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가졌다면 물위로 걸을 수 있었을까. 난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실제로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믿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고 무모한 것이다. 공연히 그런 것을 믿음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공연한 열등감과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늘 '난 믿음이 부족해' 하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신앙의 겸허함은 좋지만, 믿음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하면서까지 스스로 주눅이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믿음의 삶에서 좀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야기'에서, 베드로는 전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만용을 부리다가 우스운 꼴을 당하는 모습이다. 그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과 함께, 머리로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적극적인 사고방식도 침몰하고 있다. 오히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믿음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마저도 그렇게 의심하고 빠져 들어갔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초대 교회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성격 느긋하고, 한번 믿으면 죽어도 의심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거듭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도 돌아서서는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 이야기가 믿음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초점은 다른 데 있다. 이 이야기에서 믿음의 모범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베드로의 성공과 실패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믿음을 가졌을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의심했을 때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29-30절의 헬라어 성서 본문을 분석해 보면,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것과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대조를 이루지도 않으며, 중요하게 부각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두 개의 문장이 나란히 나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29절).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자,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30절).


이 두 구절이 베드로의 성공과 실패를 대조하는 것이라면, 29절은 성공을 30절은 실패를 전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9절에서 복음서 기자가, 베드로가 잠시나마 성공적으로 물위를 걸었음을 전하려고 했다면, 그가 물위로 몇 발짝을 옮겼다거나, 얼마만큼 갔다거나, 또는 지금 걸음을 진행중이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29절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29절의 문장 구조를 분석해 보면, '내려'는 과거분사이니 상황을 설명하는 부수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은 '걸어서'와 '갔다'라는 두 동사이다. 이 두 동사는 헬라어에서 '단순과거'라고 하는 시제다. 이것은 어떤 동작이 계속되거나 진행되지 않고 그저 단순히 발생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동사가 사용되었지만, 베드로가 두 가지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행동을 각도를 달리하여 설명한 것이다. '물위로 걸어서'는 베드로의 발의 위치에, '예수께로 갔다'는 발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서술하는 것이다. 동사가 두 개나 사용되었으니 적어도 베드로가 물위로 몇 발짝은 걸어갔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 단순과거 동사들은 그가 물위에 발을 딛고 예수께로 움직였다는 단순한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확인해 주지 않는다. 베드로가 물위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의심을 하자 빠져 들어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의 상상일 뿐이다.

30절의 초점이 베드로의 실패, 즉 그가 물에 빠져 들어간 것을 진술하는 데 있었다면, 그 구절의 문장 구조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갔다'는 식이 되었을 것이고, '물에 빠져 들어갔다'는 당연히 전체 문장의 주동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30절에서, 전체 문장의 주동사는 '외쳤다'이다.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자'는 과거분사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외치게 된 상황을 설명해 주는 부수적인 것이지 문장의 주된 요소가 아니다. 더욱이 '외쳤다'는 동사 바로 다음에, 그 외침의 내용이 직접화법으로 인용이 되어서, 전체 문장에 박진감을 더해 주고 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는 그 외침은 "외쳤다"는 동사와 한 덩어리가 되어 문장 전체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전체 이야기의 핵심은, 베드로의 성공과 실패를 대조하여 믿음의 모범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져 들어가면서 주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친히 내려와서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다(출 3:7). 부르짖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이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의 특징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바울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일을 두고, 사도행전에서는 그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 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박해했다고 쓰고 있다(9:14, 21). 바울은 '교회'라는 말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동의어로 사용한다(고전 1:2). "교회(ekklesia)"라는 말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동시에 부르짖는 사람이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어떤 고상한 이름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대신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것은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는 말은 초대 교회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힘차게 외치던 구호요, 가장 잘 알려진 선교 용어 가운데 하나였다(행 2:21; 롬 10:12-13).

그들은 적어도 머리로 끄덕이고, 어떤 것을 수긍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누군가를 믿는다고 고백하기 전에 그들은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사람들임을 알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진실한 믿음은 없다. 우리는 누구도 어머니에게 "나는 어머니를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냥 "엄마" 또는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것을 고백하고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다음에,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홀로 남겨진 듯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예수로부터 떨어져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시련을 겪고 두려워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들 자신의 모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부르짖는 동안에, 그들은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를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배의 첫 순서에 나오는 외침이나 그들의 삶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삶의 전부요 그들 자신의 정체성임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인가 생각하다가, 자기들을 뭐라고 부를까 생각하다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서로 부르게 되었다. 그것보다 더 적절하게 자기들의 정체성을 밝혀 줄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분명 베드로는 모범이 되었다. 그건 그가 용기 있게 물위로 발을 내디뎌서가 아니라, 물에 빠져 들어가면서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크게 외쳐서이다.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모범이요, 그런 점에서 믿는 사람의 모범이다. 믿는 사람은 물위로 걸을 수 있고 아무 병이나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어떤 거창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기도 하고, 또는 늘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 볼 일이다. 가장 위급할 때, 또는 가장 기쁠 때, 아니 삶의 순간 순간마다, 나는 내가 믿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는지.

김재성 목사(민들레성서마을 대표)
한신대학교, 한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버밍햄대학교 Selly Oak대학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민들레성서마을(www.mindlle.com)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그 목수> <오실 그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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