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안 어른과 오랜만에 함께 아침식사를 나누던 중 문득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는 말 있잖아 그거 성경 어디에 있지? 영어로는 어떻게 쓰여 있어?" 라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나는 즉시 컴퓨터를 켜고 아래와 같이 그 본문을 인터넷 성경에서 한글판과 영어판을 찾아 복사하고 인쇄하여 보여드렸다.

   [개역한글,막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공동번역]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표준새번역]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NIV]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KJV]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NASB]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영문으로 읽어봐도 별 다른 내용이 없으므로 아무 말이 없으시다. 왜 아침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이 문제가 생각나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안색으로 미루어 보기에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부자에 대하여 언짢은 설교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다. 원체 점잖은 분이라 남의 말을 잘 안 하시므로 더 이상은 나도 물어 보지 않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석연(釋然)치 않은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뒷모습이 영 내 마음에 개운치 않다.

자식 키우느라고 크게 돈을 벌어 으리으리하게 살지는 못하시지만 그런 대로 자녀들 5남매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잘 가르쳐서 목사 박사 의사들을 만들었고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건강하게 자신의 전문직업에 만족하며 종사하고 계시니 이만하면 잘 산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그러나 원래 검소하셔서 남들이 사는 것처럼 넓은 아파트도 없이 비좁은 옛날 주택에서 사시며 아들이 사준 다이내스티 승용차가 너무 사치스러우신 듯 반납하시고 한 참 오래된 찌그러진 중고차를 몰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 잘 산다고 평가할 수도 없겠다.

그래도 가정에서는 노부모를 공경하며 곁에 늘 모시고 사시고, 교회에서는 장로로 평신도들에게 존중받는 분으로, 직장에서도 전문직업인으로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며 자녀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시지 않는 모습을 볼 때는 참으로 잘 사시는 모습이 아닌가 느낄 때도 많다. 그런데 왜? 누가? 이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혹시 이 분이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개연성을 말한 것은 아닐까?

2.

어느 날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을 전하셨다.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는 말을 아예 빼 버리고 "가난한 자는 복
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라고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전하실 때 예수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은 모두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찌든 가난한 자들이다. 병든 자 헐벗고 굶주린 자 어린아이 과부 실직자 낙오자들이다. 이들은 마음만 가난한 자들이 아니고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가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토코스(ptokos)'이다. 이 말은 재물을 적당히 가지고 살면서 약간 아쉽다고 느끼는 정도의 그런 가난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느끼는 정도의 그런 가난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동냥을 하는 '거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부잣집 대문 밖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 구걸하면서 살다가 죽은 나사로와 같은 사람을 일컬어 '프토코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바로 이런 의미로써 가난이란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가난은 복이 아니라 저주스러운 것이다.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신 진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리이시며 빛과 거룩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지와 어리석음, 어두움에 둘러싸인 인간들에게 선언하신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 안에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예수 앞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집안에 태어나서 평생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이 허다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영적으로 가난한 것만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은 성경을 반대로 해석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참고: 옥한음, 빈 마음 가득한 행복, 국제제자훈련원, 2001.7, pp.31-48).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은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말이 아니다. 가난한 자가 천국을 바라보기가 쉽다는 말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도 하나님을 더 쉽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 문제가 없는 부자는 예수를 만나기 어려운 게 아닌가. 돈 많고 권력 있고 자녀들 건강하게 잘 자라 든든한 직업을 갖고 있고 자신도 건강하여 전혀 문제가 없는 무신론자가 있다면 그가 예수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예수를 만나기가 쉬웠고 가난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의 염려를 묶어 둘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가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었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부자가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바람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소망 중에 살아 갈 수 있다면 차라리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 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고 부가 축적되는 바람에 하나님과 먼 관계가 되어 육적인 사람으로 치우치게 된다면 이러한 부는 참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를 누리면서도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며 소박하게 인생 길을 걸어가는 분이라면 이러한 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부가 아니겠는가. 우리 주위에 이런 부를 가진 분들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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