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학교 홍순명 선생 ⓒ뉴스앤조이 김승범

1998년 여름, 어느 대학교 강의실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글을 통해 읽은 풀무학교는 차라리 수도원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런 거리감 때문이었을까? 그 더운 강의실에서 원고를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던 홍순명 선생(당시 풀무학교 교장)의 강연은 그야말로 하나 하나가 기독교교육의 진정한 대안으로 다가왔고, 심지어 내 신앙의 둔탁한 끄트머리까지 노출시키며 방향 잃은 희망이 가야 할 길을 열어 놓는 듯했다. 2002년 겨울, 낡은 파일에 꽂아 둔 그때 선생의 강연원고를 다시 꺼냈다.

“성서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모든 교과는 목적과 필요를 알아야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성서는 모든 교과의 정신을 가르칩니다. 종교 과목은 영과 진리를 가르칩니다. 국어는 진정한 대화를 위해 필요합니다. 외국어는 세계가 다르면서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윤리과목 속에 악을 선으로 이기는 정신을 가르칩니다. 마지막 사람에게 품삯을 주는 사회경제, 정신적 전통의 존중과 완성을 가르치는 문화사, 현상 속의 법칙과 경외를 가르치는 과학, 세계가 질서와 평화를 지향하듯 정연한 사고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수학, 찬미를 하는 음악, 남을 섬기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는 직업, 생명을 가꾸고 생태를 살리는 농업 이렇게 모든 교과의 정신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수학을 배움으로 정연한 사고의 즐거움을 누렸던가? 나의 사회경제 교과는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공평한 품삯을 준비하도록 다그쳤을까? 입시와 취직의 도구가 돼버린 ‘영어’에서 나는 나와 다른 세계와 만나며 그 다름이 어울리는 하나됨을 한 번이라도 의식하거나 탐구하려 했던가? 나는 비로소 그 무거웠던 책가방, 그 많은 교과목들의 무게를 지탱해 줄 낯선 목적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교실을 떠나버린 지 오랜 그 때늦은 시간에.

그해 여름 이후에도 선생을 만날 수 있었던 장소는 이런 강의실이었다. 취재 허락을 얻기도 힘들어 내 기사는 언제나 이런 강의실 풍경에다 선생이 낸 책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풀무학교 이야기>(내일을여는책 펴냄)에서 풀무학교 풍경을 퍼다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취재 허락을 받아 선생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선생은 며칠 전에 있은 37회 창업식에서 정년 퇴임한 뒤 곧장 유기농업 전문 교육과정인 ‘풀무학교 전공부’(풀무학교가 작은 학교이듯 전공부는 작은 대학인 셈이다)로 자리를 옮겼다. 작년에 생겨서 아직 터가 잡히지 않은 이 곳에서 선생은 다시 바쁜 ‘퇴임 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라니...

▲ⓒ뉴스앤조이 김승범
선생은 1937년 강원도 횡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대대로 서당의 훈장을 하던 집안에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우연히 형의 서가에 꽂힌 책을 통해 비로소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함석헌의 신앙과 사상을 접했다. 운명 같았다. 열 일곱 살에 교사자격시험을 치르고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군복무를 하면서 풀무학교의 개교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길은 이미 결정됐다.

제대 후, 1960년 풀무학교가 개교한 지 세 해째 되던 해 선생은 스물 넷의 총각 선생님으로 이 학교에 부임했다. 그리고 42년째인 올해 정년퇴임을 맞은 것이다. 풀무학교가 있는 홍동면의 사람과 결혼해 육 남매를 낳았고, 아이들을 모두 풀무학교에서 수업시켰다. 또 풀무학교의 첫 창업생(졸업생)부터 올 해 창업생에 이르기까지 풀무에서 생활한 모든 제자들을 떠나 보내고 또 새로운 풀무의 소년들을 만나 함께 산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선생은 풀무를 떠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은 물론 그들의 가정형편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을 정도다.

취재 중 으레 던지는 질문을 선생에게도 던졌다. “선생님 그 많은 졸업생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 있을 텐데, 그 중 몇 사람만 사례로 들어 이야기해주십시오.” 우문(愚問)이었다. 제자를 떠나보내고도 그들의 풀무생활을 죄 꿰고 있는 분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라니... 그런 느낌에 어울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 눈에는 다들 특별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크고 작은 것들이 어제 일처럼 기억나요. 그러니 어느 누구의 특별한 이야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풀무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창업식(졸업식)이 가까워 오면 아이들에게 선배들 이야기를 합니다. 1회부터 한 사람 한 사람씩 되짚어 내려오지요. 그러나 잘 하면 겨우 3회까지 내려오다 중단합니다. 그 많은 아이들을 모두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모자라지요.”

제자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같은 무게의 인격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교사가 품어야 할 지당한 마음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런 교사의 마음을 만나기란 흔치 않다. 제자들에 대한 선생의 이런 남다른 기억들은 모두 풀무학교의 아름다운 교육정신과 연결된다. 교육이란 ‘성역’이 온갖 탐욕과 무지 속에서 왜곡되고 수난 당하던 시각, 풀무학교는 결코 ‘성역’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늘 거기서 교육의 문제가 처음에 담고 있던 핵심들을 매일매일 되새기며 갈 바를 비켜서지 않고 걸었다. 어두운 밤 홀로 빛나는 등대처럼 풀무학교는 천천히 그러나 변함없이 꾸준하게 5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곧 이런 ‘풀무의 생각’이 곧 선생의 생각이 됐고 풀무의 변천이 곧 선생의 삶으로 나타났다. 선생에게 풀무학교는 학교공동체이자 동시에 가족이었고, 교회였고, 마을이었다. 그리고 풀무의 길이 옳은 길이었음을 성실한 거북이의 승리처럼 선생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풀무학교 이야기를 선생의 삶과 따로 떼 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성서 위의 작은 학교'

▲ 풀무학교제공

풀무는 무엇보다 ‘성서 위의 작은 학교’이다. 여기서 출발하지 않은 어떤 시각도 풀무학교를 보는 시각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성서 위의 학교는 ‘성서 위의 인간’인 교사로부터 시작됨은 말할 나위 없다. 역시 학교가 교사이고 학생이며, 신앙의 도와 교사의 도를 떼 놓지 못한다.

“보통 성서는 기독교 학교에서 주당 몇 시간 수업시간에 포함되고, 성서과목은 교목이 따로 있어 지도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 위에 학교’란 일주에 몇 시간 담당교사가 성서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학교의 모든 목표와 교과와 운영이 성서의 정신 위에 있고, 성서의 정신이 학교 구석구석에 스며 있으며, 성서의 정신이 학교를 끌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은 무엇보다 인간관의 문제이며, 성서는 다른 인생관과 달리 인간을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은 복수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하나 단수의 인간, 사람 눈에 아무리 하찮은 인간까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봅니다. 재능, 계급, 국적, 지위, 소유가 성서 속의 예수에게는 아무런 판단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인간은 온 세상보다 귀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감동적인 사상입니다. 유럽의 그 거대한 박물관, 남태평양의 위대한 자연, 다국적기업의 상상할 수 없는 부, 그리고 뉴욕의 마천루..., 이 모든 것을 합쳐도 인간 하나 하나가 갖는 가치를 압도하고 능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북 오산학교 출신으로 저희 학교 서무과장을 지낸 분은 임종을 맞는 침상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구절을 되풀이해 외며 감격하였습니다. 이런 하나 하나의 인간을 존중하고 그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이 바른 교육의 목표입니다. 이런 인간교육은 과거 유교에서도 열심히 했지만 수직적 인간관계와 온정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구약인 유교주의의 도덕성과 가족제도 위에 기독교의 신앙, 보편성, 합리성, 영원한 진리를 접목시켜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 사회와 교육의 영혼을 형성하고 시대 사상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풀무의 성서는 매우 구체적이다. 삶과 한 뼘의 간격도 두지 않으려 한다. 아침마다 성서를 읽는 것은 물론 매주 한 시간씩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모둠을 짜서 요약하고 소감을 말하며 토론하는 성서시간을 갖는다. 언제나 성서는 현실을 움직이는 원칙이어야 함을 놓치지 않는다. 바람직한 인간상, 직업선택의 기준, 노동, 가정생활의 태도, 운동의 정신, 학문의 목적, 공동체의 규칙... 이런 모든 것을 성서에서 발견하도록 가르친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더불어 사는 평민’, 곧 풀무학교의 교훈이다. 졸업생이 평범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평민으로 산다면 풀무학교의 교육은 성공이라고 말한다. 입시교육이 비집고 들 틈이란 애당초 없다. 학교생활은 바로 이런 평민의 삶을 연습하는 일이다.

그러니 학교는 일반 사회의 척도여야 하고, 구성원도 사회처럼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공부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으며, 장애인도 있고 비장애인도 있다. 많은 가난한 사람과 적은 부자가 있다. 그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공동학습을 하며, 서로 다른 특별활동과 동아리 활동을 한다. 일과 공부를 함께 하며, 땅을 경작하는 손으로 인터넷을 항해한다.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전통을 강조하며, 현실에 마음 두는 만큼 꿈을 꾸어야 한다. 풀무엔 여느 학교처럼 학우회가 있고, 학부모회와 교사회가 있지만 모두가 주인이며, 주인으로 마땅히 참여한다.

파파 스머프

▲ⓒ뉴스앤조이 김승범
‘평민’론과 관련해 선생은 풀무학교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찬갑 선생의 말을 소중히 여겼다. “평민은 진실 순박하고 근면하며 사랑 고민 슬픔 눈물이 많다. 겸손하고 부지런하며 이마에 땀을 흘려 하늘에 가깝다... 그러나 진정한 평민은 자기를 깨닫고 영원을 발견하여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기쁨에 넘쳐 하는 사람이다. 예수가 바로 그 본이다.” 그래서 풀무학교의 ‘첫 평민’은 교사여야 했으며, 선생에게도 그 ‘첫 평민’으로서의 거룩한 짐을 생활 속에서 언제나 떠올려야 했다.

풀무학교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선생은 늘 “교장이 교사와 다른 것은 단 하나, 숙직을 안 서도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장도 수업을 하고, 모든 결정은 함께 하며, 임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풀무 졸업생들이 선생을 추억하며 떠올리는 장면은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긴 빗자루를 들고 학교 마당을 쓸던 선생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선생을 ‘파파 스머프’라 불렀다. 그리고 이런 선생의 얼굴이 모든 풀무학교 교사들의 얼굴이었다. 교사란 곧 학생들에게 있어 진리탐구의 동반자란 자리를 지키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예수와 같은 호칭을 갖는 영광스런 직업입니다. 한편 예수는 교사의 책임이 큰 만큼 크게 질책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안하고 남을 시키는 것, 겉에 나타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 근본보다 지엽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 때문입니다. 교사는 예수 같이 학생을 좋아하고 총체적 생활에서 학생과 같이 하고, 진리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풀무가 한결같이 ‘작은 학교’이기를 고집한 까닭도 여기 있다. 학생과 교사가 대화하고 마음의 교감이 이뤄져야 하며, 학생 하나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의 개별화, 교육 주체의 참여는 ‘작은 학교’의 틀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풀무’는 땅에 심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자라 이제 아름드리 ‘큰 풀무’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지역학교로서의 풀무를 통해 ‘큰 풀무’의 규모를 볼 수 있다. 풀무학교가 있는 홍성군 홍동면은 어쩌면 ‘풀무의 마을’이다. 유기농업을 하는 농군들의 모임인 정농회가 있고, 신용조합, 소비자 생협, 지역신문, 출판사, 지역사회 연구회, 우리밀 제분소, 한우 사육 가공 공장 등이 세워졌으며, 이들은 모두 풀무학교 공동체로부터 출발해 차츰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지역기관이 됐다. 무엇보다 홍동이란 땅은 친환경농업이 이뤄지는 땅이 됐다. 마을 주민들은 아예 2004년부터는 전체 농가가 모두 친환경농업을 하기로 결의까지 해 둔 상태다. ‘풀무학교 전공부’의 탄생 또한 홍동 주민들의 친환경농업 의지를 북돋우고 이를 학문적으로까지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풀무학교를 퇴임한 선생 역시 지금의 바쁜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또 하나의 홍동 농민으로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풀무학교 교정 ⓒ뉴스앤조이 김승범
“지역사회는 물론 학교 시설은 아니지만, 열려 있는 교과서이고 교실입니다. 그리고 지역 주민은 곧 교사들입니다. 또 학교는 지역의 일부가 되어야 바람직합니다. 세계화의 우선 과제는 지역화입니다. 지역이 세계의 기초단위이고 범지구적인 환경문제도 세계에서 통하는 가치와 제도도 결국 지역공동체에서 실천되고 창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학교는 좋은 지역사회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학교는 지역의 교육력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학교 주변의 불량 업소를 못 마땅해 할 것만이 아니라, 지역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란 경계석 푯말 하나만 달랑 길가에 쪼그리고 있을 뿐 교문도 간판도 없는 ‘작은 풀무’가 거대한 형식을 버리고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작게, 형식을 떠나서, 우리 힘으로’라는 가치였다. 누구나 ‘현실은 이렇다’는 논리만 내세운 채, 한낱 도덕책 속의 윤리로 처박아 둔 것들을 ‘작은 풀무’는 ‘이것이야말로 현실이다’고 증명한 셈이다.

교육학자들이 ‘대안학교의 모델’로 꼽는 풀무학교, 그러나 선생은 정작 그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바른 학교, 바른 교육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선생은 모든 일이 그렇듯이 교육에도 원칙이 있고 원칙을 무시하면 피해가 클뿐더러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말하고 지킨 그 원칙으로 인해 풀무학교야말로 ‘대안학교’의 모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 생각한다.

그래서 풀무학교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성서로, 성서 위의 학교로. 일그러진 세상과, 그런 세상에 다를 바 없는 신앙과, 학교의 우상인 입시교육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성역’으로서의 풀무로. 거기서 마치 평생을 하나의 원칙에 몰두하며 세상의 대안을 말하는 수도자처럼 ‘첫 평민’ ‘첫 학생’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로...
▲홍순명 선생이 퇴임 후 일할 풀무학교 전공부 건물 ⓒ뉴스앤조이 김승범


취재 후기

감기가 심하게 든 선생을 붙들고 오래 시간을 끌기가 송구스러웠다. 선생은 <뉴스앤조이>의 선택에 고마움도 표했다. 정작 기사를 만들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문제는 선생의 개인 이야기를 쓰면 금세 풀무학교 이야기가 돼버린 까닭이다. 취재수첩을 다시 읽고, 선생의 강의 원고를 읽고, 책을 읽으면 더욱 경계가 흐려져 버렸다. 그러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깨달았다. 왜 분리하려는가. 선생의 고민과 기도와 삶이 곧 풀무학교인 것을... 참고로 풀무학교의 홈페이지는 http://www.poolmoo.or.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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