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행동,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가?

전병욱 목사가 꼽는 균형있는 신앙의 두 번째 요소는 <행동>이다. "행동력 있는 신앙"이란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 자기가 옳은 소리를 한다고 옳은 사람이 아닙니다. 옳은 것을 지지한다고 해서 옳은 사람이 아닙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 몸 바치는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 전체를 집어던지고 자기의 믿는 소신대로 또 자기의 믿는 확신대로 자기 믿는 말씀대로 우리 삶 전체를 다 드릴 수 있는 움직이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고, 행동력 없는 신앙으로 입만 살아있는 오늘의 교회를 일깨우는 육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든 예를 통해 그의 행동개념이 얼마나 심각한 가치혼란을 담고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최근에 그 공화당, 미국의 그 대통령 후보들이 있는데, 공화당의 후보 중에 존 맥케인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조지 부시하고 경합을 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기를 조지 부시가 압도적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다, 존 맥케인이 뭐꼬? 이런 식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의 예비선거를 보니까 존 맥케인이 이겼단 말이예요. 그리고 지난 번 타임 그 표지인물도 존 맥케인입니다. 시티즌 맥케인 해가지고, 시민으로서의 맥케인 표지인물의 특집으로 10페이지 가까이 다루어 주고, 그리고 최근에 존 맥케인이 물론 대통령 선거하려고 만든 책이겠지만 자서전 하나를 썼거든요. 자서전 제목이 <내 조상의 신앙>이라는 제목이예요. Faith of my Fathers. 내 조상의 신앙, 그러면서 그 스토리가 쭉 나오는데 이 책 한권 때문에 존 맥케인의 인기가 점점 더 올라가고 있더라는 거예요....1967년 월남전 당시에 하노이 상공에서 폭격기를 조정하고 있다가 격추되어 가지고 포로가 되어 잡혔습니다. 5년 반 동안,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 비밀을 알아내려고 온갖 회유, 협박, 고문 막 당했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존 맥케인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존 맥케인이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전쟁영웅이라고, 나는 애국자라고, 나는 이렇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존 맥케인의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거예요."

독자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월남전과 존 맥케인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맥케인이 자신을 전쟁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그 사건 속에 월남민중들의 희생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선 월남전은 월남인들의 민족해방투쟁의 과정에 미국이 개입하여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려 했던 전쟁이라는 것은 오늘날 양심적인 현대사가들이 일치된 견해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에 폭격기를 조정한 그는 월남 양민들의 머리 위에 대량학살의 폭탄을 던진 존재이다. 물론, 당시 그는 군인이었고 따라서 명령에 따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고 하자. 세월이 흘러 월남전의 진상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미국의 공습이 월남양민들의 삶에 어떤 피해를 끼쳤는가가 확인된 현실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그와 같은 <더러운 전쟁>에 자신의 청춘이 희생된 것을 통회했어야 했다. 그리고 희생된 월남양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를 했어야 옳다.

그러나 그는 월남전의 의미를 여전히 정당화하고 있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월남민중들의 희생에 대해여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다. 그의 정치적 배경에는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그는 공화당의 군사주의 노선의 강경파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그가 믿는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 생명과 자유를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짓밟고도 반성할 줄 모르며, <전쟁영웅>이라는 식의 오만을 버리고 있지 않고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군사주의자의 신념과 행동이란 기독교 신앙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존 맥케인 류와 같은 기독교 우파들의 종교화된 "폭력적인 행동주의"가 미국의 역사 속에서 본토 원주민들에 대한 가공할 <행동력 있는 학살>을 자행하게 했으며, 흑인 노예노동 시스템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전병욱 목사가 이 같은 각도에서 존 맥케인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면, 그는 역사 공부를 좀더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존 맥케인의 신앙과 행동을 모델로 내세운 것에 대하여 깊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는 민권운동의 차원에서 시작하다가 월남전 반대를 통해 인간의 양심과 권리,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신앙과 행동, 필립 베리건 신부의 희생적 행동주의 등을 보다 중요한 보기로 들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나 필립 베리건 신부와는 완전히 적대관계에 있었던 전쟁주의자의 신념과 행동을 행동력 있는 신앙의 예로 들고 있으니, 그의 신학적 자리와 현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그는 과거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면서 아부했던, 그리고 그것을 조찬기도회의 방식으로 "행동화"해나갔던 유명하다고 자처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그는 십자가적 희생과 예언자적 양심, 용기에 근거한 행동의 차원에는 눈을 뜨고 있지 못하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사렛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행동지침을 주신 그 본체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뿐인가?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권력의 불의와 폭력에 맞서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범>은 얼마나 많은가? 가령, 장준하 선생의 신앙과 행동은 그야말로 당대의 불의와 폭압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옳은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 몸 바치는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다"의 예와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가? 오늘날 매향리 폭격장 철거문제로 온몸을 던져 나서고 있는 행동하는 신앙인들은 또 어떤가?

어찌하여 전병욱 목사는 이러한 보기보다는, 역사의 정의나 양심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들을 그렇게 주목할까? 우선 그는 미국의 주류매체가 주입시키고 있는 승리주의, 또는 제국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흡수되어 있다. 십자가가 로마 제국주의의 사형틀이었으며, 나사렛 예수께서 이들과 예루살렘의 기득권 세력의 결탁에 의해 반란자로 지목되어 사형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는 마땅히 이러한 폭력체제의 악마성에 눈을 뜨고,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용기 있게 증언할 수 있어야 했다.  

기껏해야 극우 전쟁주의자에 불과한 존 맥케인의 폭력적인 신념을 신앙과 행동의 틀 속에서 해석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그의 태도는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전병욱 목사가 만일 월남의 독실하고 양심적이며 민족을 사랑하는 기독교 신자였다고 해도 여전히 존 맥케인을 신앙의 위대한 용사로 떠받들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의 행동, 그 기준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선이다. 이것을 위해서 현실의 대세와도 맞설 수 있는 용기, 이것이 오늘날 청년 기독 신앙인들에게 불러 일으켜야 할 내용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관은 역사의 진실을 배반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십일조에 대하여 이를 <행동의 범주>에 넣어 강조하고 있다. 십일조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결코 아니다. 구약의 다른 요구는 다 제쳐두고 오로지 이 십일조의 윤리만 붙들고 있는 한국교회가 낳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형교회의 비리와 부패, 성장주의이며 세습의 논리이다.

십일조는 신정(神政)체제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위해 그 물질의 분배를 결정한 당대의 방식이다. 오늘날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는 현실에서 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재물증대가 목표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는 두 번째 강좌에서 "헌금이 헌신의 기초라고 성서가 가르치고 있다"고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했는데, 실로 헌금은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하면 되는 것이지 그 비중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맞추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십일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가난한 처지도 있는 법이다. 이들에게 종교적 갈등을 일으키게 하고,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기성교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젊은 목회자로서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닌가? 십일조의 문제는 논란이 많은 문제이기에 특별히 전병욱 목사의 경우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판을 하려는 생각은 없다. 이 문제는 향후 새로운 기회에 집중적으로 해부할 계획에 있다.)



(3) 무엇을 위한 초월적 능력인가?

지식과 행동, 이런 것만으로는 신앙의 세계를 구성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을 전병욱 목사는 강조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여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역이 존재함을 언급하고 있고, 이로써 기적의 성취를 주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럽에 지금 대단한 태풍이 한번 불었습니다. 지금 미국에도 토네이도가 돌고 있습니다. 그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이 있다할지라도, 200년 된 나무, 300년 된 나무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그 나무들이 다 뽑혔다 그러잖아요? 저는 그 유럽의 태풍소식을 들으면서 그러한 기도를 했습니다."

자, 전병욱 목사가 무슨 기도를 했을까? 태풍에 의한 피해는 막대하다. 나무가 뽑히는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의 인생의 터전이 뽑혀 비극적인 현실에 직면하고 만다. 하여 이때 드리는 기도의 요체는, 그러한 태풍피해로 해서 누군가가 어려운 고난을 겪지 않도록 바라고, 혹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곧 일어서서 삶의 위기를 극복해나가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을 잇고 있다. "하나님, 이러한 성령의 바람을 이 한반도에 주십시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물론 그 정도로 강력한 풍속을 지닌 성령의 바람이 있어야, 신앙의 장애물을 뽑고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리라. 그 정도로 우리가 말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풍으로 인한 피해로 신음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서 이런 식의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바람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고난의 현실에 무감각할 수가 있을까?

이번에 우리 나라에도 태풍피해가 적지 않았는데, 만일 수해지구에서 전병욱 목사가 이런 식의 설교와 함께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본적으로 전병욱 목사는 인간의 고난, 그 삶의 아프고 쓰린 사연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그런 처지에서 잘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곤고함에 대하여 이해가 빈곤하다.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근본적인 자질에 중대한 결함이 된다.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태풍의 강속을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는 성령의 바람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없이, 그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기도하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강좌를 끝맺고 있다.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란 그 분의 마음이 이루고자 하시는 바가 있다면, 인간의 헤아림을 넘어서 이루시고 만다는 믿음과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초월성이 지향하는 바를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이 힘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른바 "믿음 안에서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의 강변으로 연결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은 한마디로,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그 성령의 임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증언하신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 초월적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 임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이후 앉은뱅이 걸인을 그의 주저앉은 삶에서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초월적 능력은 <기적적 놀라움>이라는 징표에 집착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그리도 개탄하고 우려했던 바였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자, "너희들은 내가 그런 이적을 베풀었다고 믿는가?" 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초월적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이다. 이 마음과 만나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과 사탄의 초월적 능력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혼돈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전병욱 목사는 초월적 능력에 깃든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는 일에 대하여 역설했어야 한다. 나사렛 예수께서 바로 그 점을 갈파하고 지적하고 계시지 않는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 가진 존재가치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하는데 실패하면, 신앙은 신비적 이적주의에 빠지거나 외형적인 카리스마의 강력함에 휘둘려 진정 이루어야 할 일은 이루지 못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초월적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의와 선, 그리고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을 돌파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폭력적인 권력, 착취를 일삼는 경제질서,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문화, 범죄의 온상으로 자라나고 있는 사회, 진실한 자기실현을 하지 못하는 실존적 고뇌 등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득 차서 이 땅에 <믿는 사람의 온전한 능력>을 펴나갈 수 있도록 도우시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 바로 이 초월적 성령의 힘이다.  

전병욱 목사의 강좌는 결말에 가서 이 초월적 능력에 대해 다루면서 별로 구체적인 내용이 진전이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는 그 결론에 있어서 이러한 초월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흥>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엉뚱하게도 <교회 성장론>으로 빠지고 있다. 청년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늘의 역사를 변혁시키고 한국의 미래를 감당해나가는 지혜롭고 성숙한 존재로 커나가는 방향으로 이끌기보다는, 교회 성장의 도구로 쓰이게 해달라는 식의 수준으로 결말이 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균형있는 신앙론>의 실체가 이렇게 교회성장을 위한 동기부여의 전제라는 점은, 그의 강좌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순에 대한 도전과 돌파가 전혀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건 상관없이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인 것이다. 물론 그는 성서를 통해 각종 언론매체의 내용을 접근하고 세상을 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 접근의 기본목표 역시 이 사회의 변혁과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교회성장으로 귀결하고 있다. 이는 전병욱 목사의 신학과 신앙논리가 위기에 다가가고 있는 한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청년세대의 양육보다는, 교회성장 전도자의 양육이라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인 것이다.

그러한 논리와 주제의 방향은, 좀더 밀고 나가면 그렇지 않아도 대형교회의 문제와 세습 등 여러 가지 논란에 부딪힌 교회현실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도, 한국교회의 미래상을 그의 강좌에서 발견할 수 없음을 우리는 단언할 수 밖에 없다.

실망스러운 것은 특히 이 세 번째 강좌에서는 특별한 내용 없이 공부해라, 행동이 뒤따라야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지 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의 뻔한 "설교"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신학적 재고가 빈곤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총평

이번의 글까지 포함하여 세 번에 걸친, 그의 강좌분석에서 우리는 단지 전병욱 목사 개인의 신학적 방향과 그 한계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승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깊이 물든 교회는, 신앙이라는 깃발을 들고 성취욕을 부추기고 그것을 이루는 의지를 강화하는 것으로 나사렛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이 사회에서 가난하고 억울하며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아픔과 그 사연은 철저하게 외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민중들과 유리되고 있으며,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꿈을 불어넣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전병욱 목사는 바로 이 신분상승의 욕구를 강렬하게 지피면서 청년대중들에게 <하면 된다>식의 논리로 일관된 성공주의적 기득권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러한 기득권 질서와 정면으로 대치했던 나사렛 예수의 삶을 배반하는 신학이 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데, 그의 언어가 경박하고 오만한 느낌을 주는 것을 그의 개성적 스타일이라고 봐줄 수도 있으나 그것이 인간모독과 인간추궁이라는 각도와 방식으로 전개되는 한, 목사로서는 실격(失格)이다.  

우리는 이 세 번에 걸친 비판에서 단지 전병욱 목사의 오류와 한계를 거론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엿보이는 공동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를 극복하는 사고방식의 한 예를 보이기 위해 노력해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적 논쟁이 부족하고, 세뇌 되다시피한 교리적 언어에 익숙한 청년기독교인들에게 자극과 도전을 주기 위한 의도 또한 있다.

이로써 한국교회와 청년신앙인들, 그리고 신학도들이 하나의 사물, 또는 하나의 역사, 그리고 성서를 읽고 생각하며 새로운 발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해명하고 이루어나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이제 전병욱 목사의 강좌비판을 그치고, 그의 책을 선정하여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오류와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는 기준을 통해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 분석해 볼 것이다.


전병욱 목사에 대한 이성규 기자의 글들은 [목회면] '지난기사 리스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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