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길 떠남은 기적이나
요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으로 자기의 땀으로 걸어가는 길, 그래서 신앙은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가는 순례의 길이다.ⓒ뉴스앤조이 김승범

이제 우리는 사순절 절기에 들어섰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는 절기이며, 부활절을 기다리는 40여일 간을 말한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수난 금요일’에 절정에 이르며 이 날 예수가 못 박혀 죽으심을 기억하고 끝난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아주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하루에 한끼니 저녁식사만 하되 육식은 피하고 채소와 생선과 계란 정도만 먹고, ‘성주간’ 동안은 꼬박 금식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주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과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순절의 고난을 감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주님께서 하나님 말씀의 길을 몸소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변화산 경험이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비로소 당신의 아들임을 알리셨다. 변화산 경험을 통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변화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과 그 분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위대한 변화였다.

산 정상에서 내려오신 주님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 정상에 올라 가셨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에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고 그의 옷은 눈부셨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광경을 본 베드로는,“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살으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주님, 여기 좋사오니, 여기 이 정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말을 듣고 산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없었고, 십자가의 길도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산 정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변화된 사람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가 길을 떠나는 자이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야 제 맛을 잃지 않듯이, 주님의 길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길 떠나는 순례의 길이다.

바람이 언제나 신선하고, 생명을 깨우는 생명의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방 팔방으로 자유롭게 불어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의식과 신앙도 한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길 떠나는 순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어른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것은, 어른은 고정된 생각, 어떤 틀에 짜여있는 관념과 전통으로 말을 해 오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이 아버지하고, 말이 안 통해. 아이 엄마하고는 이제 말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요즘 신지식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옛날에 만들어진 철학이나 과학이론을 외우고 암기하여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새시대,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철학과 기술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술가들은 일상의 고정화되고 규격화된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신앙이란 마치 개척정신과도 같다. 우리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움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 주님처럼 아늑하고 평탄한 산 정상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산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길로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부활을 맛보며 살 수 있다.

하나님 나라 이외에 우리의 정상은 없다

우리는 주님처럼 정상에 섰다고 하는 순간에 바로 내려가기를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는 사람 사는 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가 진정한 정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그 곳이 정상인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 이외에 우리의 정상은 없다. 교회 건물을 높이 세웠다고, 그곳이 정상인가.

우리는 인생의 정상을 향해 땀흘리며 살아간다. 많은 물질과 명예, 그러나 그것이 신앙인의 정상은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인생의 정상을 그런 곳으로 잡았다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그런 정상에 올랐다면,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정상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그 정상에서 발길을 돌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산, 진정한 산을 향한 등산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변화산 정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오심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참 뜻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은 산 정상에서 내려와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고, 그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다. 예수님은 산 정상에서 내려오심으로 진정한 정상을 오르셨고, 마침내 걸어서 하늘 끝까지 이를 수 있었다.

예수님은 어쩌면 저 높이 솟아있는 산꼭대기가 정상이 아니라 바로 가난하고 헐벗어 신음하는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마을, 이 낮고 천한 땅, 더 이상 내려 갈래야 갈 수 없는 밑바닥,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정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전에 바라보았고, 우리가 지금 동경하는 저 산꼭대기가 정상이 아니라, 바로 가난한 이웃과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여기, 바로, 여기가 정상이라고 말이다.  

김민기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것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결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자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를 뿜으며 가고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에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우리가 오를 산정상은 저 높은 봉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땀흘려 살아가는 여기,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자리, 바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가, 우리가 올라야할 봉우리이다.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순례의 길

▲걸어간다는 것은 남이 대신 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내 발로 걸어가는 것이다. 걸어간다는 것은
돈으로, 물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려 가는 것.
돈으로도 힘으로도 총으로도 갈 수 없는 것.
ⓒ뉴스앤조이 김승범
주님은 산 정상에 안주하지 않고 내려오셨다. 변화한다는 것은 길을 떠난다는 것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언제나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변화된 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길 떠남은 기적이나 요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으로 자기의 땀으로 걸어가는 길, 그래서 신앙은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가는 순례의 길이다.

걸어간다는 것은 남이 대신 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내 발로 걸어가는 것이다. 걸어간다는 것은 돈으로, 물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려 가는 것. 돈으로도 힘으로도 총으로도 갈 수 없는 것.

걸어간다는 것은 함께 간다는 것이고,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고 간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가용을 타고 간다면 혼자 가지만, 뛰어 간다면 이웃을 앞서 가지만, 걸어서 간다는 것은 이웃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은 걸어서 하늘까지 가셨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뛰어가지도 않으셨고. 십자가를 마차나, 다른 것에 싣고 가지도 않으셨다.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서 가셨다.

걸어간다는 것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신앙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야만 한다. 내 십자가가 무겁다고, 감당할 수 없다고 내동댕이치고, 내 십자가를 누가 대신 짊어져 주지는 않을까, 또 자가용이나 마차에 싣고 갈 수는 없을까하지만, 그러나. 내 십자가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임 당할 것이라고 베드로에게 수난 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 안됩니다. 주님께서 어찌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렸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내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구나”하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사람의 일은 무거운 십자가를 하루 빨리 벗어버리고 던져버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수난을 당하는 일이다. 자기 십자가를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자식을 키울 때도 통하는 하늘의 진리이다. 친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을 위해 여러 어려움이 당연히 있게 되는데, 자기는 그 어려움을 지지 않고 친구에게만 맡긴다면, 누구 자기와 그 일을 함께 하겠는가. 함께 일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는 부모의 십자가를 짊 수 있어야 자식을 키울 자격이 있고, 자식은 자식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부모는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자식에게만 강요하면, 그 자식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보면 “주님, 내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를 어서 빨리 거두어주십시오. 주님, 내게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신앙이란 자기 십자가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런 찬송가를 불러야 하리라.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원해 주리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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