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문대 변호사(43)는 80년대 말 서울대 기독교문화연구회 출신으로 노동· 교회 전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2004년 5월, 최초의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 보좌관이 탄생해 화제를 모았다.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일하던 강문대 변호사(43)가 그 주인공. 이후 변호사들의 국회 보좌관 진출이 줄을 이었다.

강 변호사는 롯데호텔 노조 성희롱 사건,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전환 사건 등 굵직한 노동 사건에 관여해 노동 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회 부위원장, 한국비정규센터 이사, 전국사무금융조합연맹 자문변호사로도 일하고 있다.

그런데 강 변호사의 대학 시절 활동이 이채롭다. 1986년에 서울대 기독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기독교문화연구회’(기문연)에서 활동했다. 기문연은 사회참여를 고민하던 복음주의권 청년들의 해방구 역할을 한 단체다. 기문연은 1990년 이적 단체로 규정되어 회원들이 구속, 수배되면서 해체했다. 강 변호사도 이 때 수감 생활을 했다. 그 후 기독교 운동단체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9월부터 <복음과상황>에 교회 분쟁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했다. 어떤 연유일까. 7월 23일 강문대 법률사무소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 신앙 여정에 대해 말해 달라.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신앙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1986년 서울대 종교철학과에 진학했다.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교단 신학교에 가서 목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학 재학 당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내 신앙의 틀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고 신앙과 사회문제를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당면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목사 되는 것을 포기했다.”

- 그런 고민이 대학까지 이어졌나?

“1986년은 아시안게임이 있던 해였다. 정부는 게임 기간 중 소요사태를 우려해  20일 정도 방학을 명령했다. 나는 방 안에 틀어 박혀 책을 읽었다. 고민을 풀고 싶었다.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공부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읽던 사회과학 책도 섭렵했다. 그 때의 독서는 기독교신앙과 사회운동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중 대학 2학년 때 기문연를 만났다. 그곳에서 신앙과 사회참여를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학과와 동아리 활동이 뒤바뀔 만큼 열심히 활동했다. 회장까지 역임했다.”

- 당시 기문연은 빈민지역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등 급진적인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졸업하면 빈민지역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기문연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 곁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과도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신념이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활발하던 모임이 정체된 이유기도 했다.”

- 1990년에 ‘기독교문화노동연합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 강문대 변호사는 "교회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해냈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경찰이 기문연을 주시했다. 회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신앙공동체이면서도 빈민지역에서 생활하고 생활협동조합 형식의 두부공장을 운영해서 빈민을 돕는다는 것을 경찰이 수상하게 여겼다. 경찰은 공안정국을 만들기 위해 기문연을 표적으로 삼았다. 결국 기문연 회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나도 6개월 간 복역했다.”

- 수감생활은 어땠나?

“대학 생활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성과 성찰을 강요당했다. 수감 생활 이후 기독교 신앙과 사회운동을 접목시키는 것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군대에 가고 사회 진출을 고민하면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기문연 활동 때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 기독교 신앙을 떠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그렇지만 이치와 상식에 맞지 않는 설교를 듣는 것이 힘들었다. 기독교 단체에서 일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2~3년 전부터 삶의 한계를 경험하고 밑바닥에 닿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성경 공부와 영성 훈련을 하면서 해묵은 신앙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 노동 전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교회 분쟁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

“교회 분쟁에 관해 묻는 주위 분들에게 답을 주기 위해 교회법을 공부했다. 그것을 계기로 2008년부터 교회 분쟁 사건을 변론했다. 신앙의 안정도 교회 분쟁을 다루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다. 교회 문제를 무조건 회피하는 것에서 벗어나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겼다.”

- 교회 분쟁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는 무엇인가?

“목사 지위에 관한 내용이다. 목사가 교회에 청빙 받아 부임하면 노회에서 철회하지 않는 이상 교인들이 목사를 탄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누가 교회의 대표인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생긴다. 교인들은 목사를 실질적인 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목사는 형식적인 교회 대표의 권한을 가지게 된다.

교회 정관이 없는 것도 문제다. 교회 정관이 없으면 교단 헌법이 문제에 바로 적용되어 갈등이 커지고 복잡해진다. 개별 교회가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상회(노회·총회)가 분쟁에 곧바로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분쟁 당사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 노회가 교회 분쟁에서 공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현재로서는 그렇게 보기 힘들다. 노회는 엄격하게 절차와 규정을 지키고 집행해야 한다. 그래야 노회의 판단과 결정이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노회가 상황논리에 휘둘려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는 사례가 많다. 노회 결정에 불복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 각 교단은 교회 문제를 사회법정에 가져가는 것을 금기시한다.

“교회도 국가를 구성하는 사회조직이기 때문에 사회법에 따라야 하는 부분이 있다. 법원도 교회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사회적 의무에 관련된 것은 사회법으로 다룬다는 입장이다. 판례를 보면, 노회가 장로를 수찬 정지와 제명으로 징계한 사안에서 법원은 수찬 정지는 사회법 판단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제명은 법적 판단을 내렸다. 제명은 교회 재산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까지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법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 교단 내에서 분쟁을 다룰 수 있는 세부절차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법정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은 교회 내 약자의 권리를 침해할 여지가 있다.”

-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할 때는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부끄럽고 화나는 경우가 더 많다. 법정에서 서로 욕하고 비아냥거리는 일은 다반사다. 목사는 교인들을 ‘사탄의 자식’이라고 저주한다. 교인들은 목사를 ‘삯군 목사’라고 비난한다. 판사가 장로와 목사를 호통 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서 나를 전도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판사도 봤다.”

- 변호사로서 교회 분쟁을 다루는 것에 어떤 어려움이 있나?

“변론을 위해 한 쪽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나님의 편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일단 당사자가 문제를 호소하면 법률가로서 최선을 다해 변호하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회적 발언을 할 때는 제3자로, 전문가로, 신앙인으로 말하고 싶다.”

- <복음과상황>에 교회 분쟁에 관한 글을 연재한다고 들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교회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일반 법원의 판례를 교인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회 분쟁의 상당수는 법원 판례를 몰라서 생기는 불필요한 다툼이다. 교인들이 사회법정에 가져가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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