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교회의 김춘기 목사와 민형자 사모. 그들이 13년간 일궈온 목회텃밭은 음지를
양지로 바꿔놓았다. 주민들의 아픔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그들의 사랑과 애정도 함께
있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곡리 대덕산 기슭의 대덕골, 유난히 일찍 해가 떨어지는 산골 마을이다. 겨울 준비하고, 겨울 보내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나가 버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곳 사람들은 이런 환경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음지의 삶에 익숙해 있다. 눈물과 좌절이 낯설지 않은 삶이었다. 거기서 '대덕골 이야기'는 시작된다. 음지의 삶 가운데 희망의 샘을 파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비로소 사람이 희망으로 꽃피는 이야기가 대덕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덕골 이야기'는 이 마을의 이름을 딴 대덕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3년째 대덕교회를 지키고 있는 김춘기 목사(42)와 민형자 사모(38)가 매주 기록하기 시작해 이제 300회를 넘긴 장편소설 같은 논픽션이다. 아직 단행본으로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이 이야기는 매주 대덕교회의 주보에 실려 겨우 독자 80여 명에게 전달되어 읽히는 쪽지 같은 글이다. 어느 산골에서 온 신비한 편지처럼 '대덕골 이야기'는 삶에 지친 이들의 갈증을 씻어주기도 하고, 오염되지 않은 신앙의 푸릇푸릇한 생명미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머리를 깎아야 할 때, 보일러가 터지거나, 갑자기 시내로 나가야 할 일이 생겨 차가 필요할 때, 게다가 누군가 또 세상을 떠날 때, 대덕골 사람들은 으레 김 목사를 찾아 전화를 걸거나 교회로 올라온다. 이런 대덕교회의 풍경을 잘 보여주는 것이 대덕골 이야기 중에 '목사님 손은 가위손'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대덕교회 ⓒ뉴스앤조이 김승범
우리 교회는 주일에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점심에는 식당, 식사 후에는 다방, 목욕탕, 세차장, 피곤한 분들에게는 여관, 가끔은 이발관, 미용실까지…. 다른 것은 다 장소나 재료에 큰 부담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인데 미용봉사는 재료가 꽤 들어갑니다. …역시 손재주에는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의 목사님이 저보다는 훨씬 뛰어나다고나 할까요. 특별한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닌데 몸이 불편한 분들이나 미용실에 갈 수 없는 아이들에게 바리캉 하나 사서 머리를 깎아주다 보니 고정 고객(?)이 늘어났고 미용 기구도 서너 가지 늘었습니다…(이하 생략).

무엇보다도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신자든 불신자든) 김 목사가 뒷일을 봐주는 것이 대덕골의 자연스런 풍경이 되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죽은 사람을 씻기고 염하는 일은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죽은 강아지도 만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사람인데 아내는 오히려 신나라 남편이 시키는 대로 잘도 해낸다. 가냘프고 고운 모습 어디서 저런 대범함이 나올까 싶은데, 김 목사 부부는 이제 이런 일을 '작업'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부를 정도로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초상이 나면 김 목사는 덜컥 걱정이 앞선다. 끝이 좋지 않은 장례를 몇 차례 치렀기 때문이다. 마을에 젊은이가 없어 상여를 매야 할 때면 꼭 인부를 쓰는데 그들이 여간 까탈스럽지 않다. 돈을 뜯고, 심지어 행패도 부리다 보면 어느새 장례 분위기는 험해지고 만다. 언젠가 이 지역 목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김 목사는 "우리들이 장례 때 상여를 매면 좋겠다"고 제안했다가 싸늘한 반응만 받았다. 그래도 목사들이 상여를 매고 찬송을 부르며 장례를 치른다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야 여전히 변함이 없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김 목사나 아내 모두 농촌에서 목회하려는 마음이 일찍부터 있었다. 그들 역시 농촌에서 자라 농촌 교회에서 신앙을 키웠기 때문에 그 사정을 잘 알았다. 무엇보다도 농촌 교회에는 목사들이 한 교회에 오래 머무르며 목회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정들라 싶으면 훌쩍 도시로 떠나버리는 그들을 보면서 마음 한 쪽에 다른 생각을 품고 살았다. 처음 대덕골에 들어오면서 성도들 앞에 "10년 동안은 떠나지 않고 목회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런 어릴 적 아픔 때문이었다.

대개 목사들이 자주 바뀐 교회가 있는 마을일수록 교회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이 곱지 않다. 김 목사가 처음 대덕골에 왔을 때 받았던 차가운 눈길 역시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런 시선을 되돌리는데 3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1년쯤 지나면서 김 목사네는 자연스럽게 대덕골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차츰 주민들 속으로 교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교회당은 북적대기 시작했다. 서울에 살다가 신앙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마을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이사를 와서 대덕교회에 다니는가 하면, 시어른 때문에 신앙을 가질 수 없던 아낙네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밤 김 목사네에 곡식을 이고 찾아와서는 그녀의 쌓인 아픔을 털어놓기도 한다. 어느 성도는 형이 대덕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은 부러운 마음을 못 이기고 대덕골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다.

특히 대덕골의 성탄절은 동네 잔치가 열리는 날이다. 성도들이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함께 음식을 나누고, 마을 노인회 부녀회에서는 교회에다 헌금을 바친다. 교회가 어느 '특정 종교' 기관이 아니라 학교나 우체국처럼 마을 사람들의 '공기관'이 된 것이다. 역시 대덕골 이야기에는 이런 마을 사람들의 마음과 이들 속에서 목회하는 농촌 목사의 흔치 않은 감사의 기도가 들어 있다.

박재옥 집사님 댁에 들렀을 때(심방) 집사님은 할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박 집사님이 건강하실 적에는 할아버지께 함께 교회 나가자고 많이 권유를 하셨다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나는 글도 모르고, 귀도 어둡고, 한 동네 그것도 교회 옆집에 호랑이 같이 무서운 형님이 사시는데 뭐라 하면 안 되고 둘씩이나 교회 다니면 애들한테도 미안하고, 그러니 할멈이나 실컷 다니시오" 하실 뿐 교회는 안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가기라도 하면 발이 저리도록 앉아서 들어야 겨우 끝날 정도로 긴 이야기를 펼쳐놓으셨습니다.

▲대덕교회 성가대 ⓒ뉴스앤조이 김승범
이번에도 "할아버지! 집사님이 편찮으셔서 많이 힘드시죠?" 하는 질문에 발동이 걸려 "말해 뭐하나?"로 시작해 인민군에 끌려가 만주에서 몇 년, 다시 미군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서 3 년, 집에 와서 겨우 남의 집 머슴살이 1년 하는데 다시 영장이 나와 국군에 들어가 3년, 늙어서 이제 좀 사는가 했더니 둘째 아들이 진 빚 갚느라 죽을 고생을 하신다는 얘기까지 두 시간 동안 몇 개 남은 이빨 사이로 침을 튀겨가며 때로는 "씨발 씨발" 양념 같은 욕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듣다 보니 목사님도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할아버지 고생한 얘기 제가 다 들었잖아요. 이렇게 고생만 하셨는데 이제 제 얘기 잘 들으시고 천국 가셔야 돼요." 그랬더니 예수님 영접 기도도 따라 하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열린 마음이 아니고 12년 동안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금씩 열린 마음의 문에 오늘에서야 주님을 영접하신 겁니다. 바보같이 황금 같은 젊음을 시골에서 다 썩히느냐, 아직도 개척교회 수준이면 무능력한 목회자 아니냐, 온갖 자존심 상하는 쓴 소리를 다 들어도 오늘 할아버지가 주님을 영접할 때 그 기쁨과 바꿀 수 없습니다.


또 금세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내리는 대덕골, 거기서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을 생각했다. 뭔가에 쫓기며 조급함에 못 이겨 기도의 자리를 적시는 그들 그리고 이 후미진 산골 마을의 이름 없는 한 목회자가 지닌 거대한 자유, 그 둘의 어색한 공존을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같은 성서에서 나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도 해보았다. 그럴 리 없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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