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란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행복함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행복이라는 것을 밖에서만 찾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요인들이 만족스럽게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차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집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이 많고 집이 있는 사람도 결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보릿고개를 상징하는 60년대 보다 지금 우리는 배부르고 넉넉하게 살지만 그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전에, 내가 스스로 행복해 지기 전에, 내 마음이 가난해지기 전에 누구도 무엇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 보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
  
우리가 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를 잘 다니고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도 자기 마음을 가난하게 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하늘 나라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욕심과 허영심과 교만을 가득 채워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한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할줄 아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부자의 근심과 불행

주님은 언제나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다.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이들이 있으면 그들을 그저 안아 주셨다. 주님의 가난한 마음은 그 분의 삶 속에 그대로 드러나서 세상을 청빈하게, 아름답게 만드셨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 주님은 언제나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셨다.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청빈한 삶을 사셨던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으나 하늘을 산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확신에 찬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들의 곳간에 쌓인 재물 때문에 부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많이 가지면 마음의 근심이 더 많은 법.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인해 근심이 생기고 마음이 불안해져 구원의 본질을 잃게 된다. 많이 가진 자는 재물에 노예가 되어 사람도 잃고 사랑도 잃고 웃음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게 된다.
  
노후를 보장해 주는 사회 복지와 잘 정돈된 생활 시설, 아름답게 단장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서구 유럽 사람들은 외부적인 삶의 환경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지만,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민들은 다름 아닌 우리가 가난한 나라요, 후진국이라 일컬었던 스리랑카, 네팔, 인도와 같은 나라의 국민들이라고 한다.

현대교회와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

부유한 교회, 배부른 교회는 더 배부르고 거대할 꿈을 꾸기에 나눔을 실천하지 못한다. 더 높은 종탑, 더 커다란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 설교와 찬송만 커질 뿐, 현대교회에서 우리는 하늘의 마음인 가난한 마음과 그 나라는 볼 수가 없다. 많이 가지면 마음의 근심이 더 많은 법.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인해 근심이 생기고 마음이 불안해져 교회의 본질을 잃게 된다.
  
자기의 소유를 내어놓으니 가난한 사람 하나 없었던 초대교회(행 2:43-47)처럼 교회는 가난을 선택함으로써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의 영성은 부자의 영성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영성, 가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부자 삭개오가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구원을 이루었듯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것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가난을 선택한다면, 그에게는 이미 가난한 마음이 있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자신의 좌우명: 나의 바른 삶 살기>에서 일생을 가난한 마음으로 살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했다. 그의 좌우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座右銘 : 바로 살려는 노력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 열 가지를 정하여 바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장공의 좌우명을 보면 한결 같이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다짐하고 행할 수 있는 좌우명이요, 가난의 영성으로 새겨진 좌우명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생을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던 장공은 가난의 영성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의 가난과 청빈의 영성은 위대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늘 나라를 맛보았던 것이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지난 10월에 북산 최완택 목사님과 함께 안동에 사시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처음 권 선생님이 사시는 집을 본 순간 마음의 큰 충격을 받아 한 동안 숨이 멎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익히 선생님의 청빈한 삶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이 사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는 너무나 큰 신앙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쓰러져 가는 흙벽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 네 명이 들어가 앉으면 서로 무릎이 닿는 조그만 방, 그 집에서 걸레라는 뜻을 가진 강아지와 단 둘이 사신다. 나는 선생님이 사시는 곳이 어떤 암자나 수도원보다도 거룩하고 순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토록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 수 있다니. 선생님은 가난을 스스로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눈물>, <강아지 똥>, <몽실언니> 등과 같은 선생의 기독교적 영성을 담고 있는 동화들은 한결 같이 가난의 영성을 통해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에 한국에 돌아와 가족과 헤어진 뒤에 교회 옆 지금의 흙집에서 40년 동안 홀로 종지기로 사셨다한다. 일생을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찾는 수도사처럼 가난과 청빈한 삶을 선택하신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 수도원과 같은 권정생 선생님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내 귀가에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내 방 안에 있는 난(蘭)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 들고 있는 가느다란 잎과 그 한가운데로 영롱하게 빛나는 한 송이 꽃을 피웠다. 한 주일에 한 모금의 물과 약간의 햇볕만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난(蘭)은 차고 넘치게 물을 먹거나, 햇볕을 자기 것이라 잡지도 않으며, 그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살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리고 매일 기도한다. “하나님, 한 송이 꽃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나도 매일 매일 이런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이 풍요와 포만의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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