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이다. 비단 연일 신문지면상을 가득 메우는 여야의 대선 경선 후보들의 출정식 등, 그 들의 행로를 일일이 훑어보지 않아도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 'DJ의 말투와 걸음걸이'가 각종 방송 매체에서 조금은 덜 보이는 것이 그것의 반증이리라.

여기저기 떠들석 하니 말도 많다. 미디어의 발달로 공중파 방송과 인터넷 등지에서는 연일 그들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고, 그 내용의 분석과 해설 등으로 이미 선거는 '본선괘도'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여론정치란 말이 새삼 실감이 난다. 여야의 대변인들이 당의 정견발표나 혹은 논평을 낼 때 혹은 개인적 사견을 발표하는 정치가들조차 항상 '민심'이란 말로 시작한다. 정치인들 어록중에 가장 자주 들어가는 단어가 아마도 이 '민심'이란 단어가 아닐까.

'民心'
말그대로 백성의 마음이란 뜻이다. 좀더 고상하게 말하면 '여론'이다. 그럼 여론정치는? 백성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들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정치다. 백성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것 필요 없다. 백성들과 같아지려고만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될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럴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말만 '민심'이고, 행동은 '잿밥'을 위하고 있는 것 같다. 여론을 파악하기 보단 여론을 조성하려고 하는 것 같다. 여론은 따라가는 게 옳지 따라오게 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다. 박정희의 3선개헌 후 선거에서 잘못된 여론몰이를 한 탓에 '망국병'인 지역주의는 아직도 그 끝맺음이 요원해 보이지 않는가.

요한의 말을 풀이하면 이렇다.
"아니 세례는 내가 당신에게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렇다. 예수는 아무 죄가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한 의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 세례를 친히 받으셨다.


'국가보안법' 이란 것이 있다. 일제시대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현재 100여명이 넘는 '자기 양심에 정직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내몬 법이다.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국가보안법의 개정 및 철폐도 혹시 잃을지도 모르는 '보수표심'을 방패삼아 아랑곳하지도 않으면서 그것보다 더 강압적일 수도 있고 그 누구도 원치 않는 '테러 방지법'에 '미국'이라는 배경논리에 부화뇌동하는 그들에게 '민심'은 과연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얼마간을 모르는 채 지내왔는가. 해방 후 50년 이상 혹은 그 이전부터..
달리 생각하자.
여론은 '민심'이다. '민심'은 우리 생각이다. 우리가 바꾸려고 하면 언제든지 바꿀 수가 있다. 당장은 불편하지 않지만, 당장은 억울하지 않지만 그 사슬의 옥죔은 우리를 가리키지 말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민심을 따라야 하는 것은 비단 위정자들에게만 속한 일은 아니다. 우리 역시 '민심'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억울함, 우리가 외면한 그들의 어려움. 우리가 크리스챤이라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 됨을 선포했다면 주님의 뜻을 따라 그들과 같아지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시인 김수영은 서슬퍼른 70년대 '1%가 결한 자유는 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라고 말했다. 주님은 버림받고 억울한 1%들을 위해 이땅에 오셨다. 진정 민심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표'를 주고 힘을 주자. 주님의 뜻이 이 땅에 거하기를 바란다면 진정 1%들에게도 거하기를 바래야 하지 않는가.

'이 땅의 황무함'을 바꾸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기 위한다면 우리가 나서자. 더 이상은 '우리가 뭘 하겠어'라는 말을 우리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돌려주자.
'우리 맘도 모르는 너희들이 뭘 하겠어.'

입으로는 '민심'이며 몸은 '천상'에 있는 사람들.
천만 기독교인들의 나라 치고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다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 해야 한다.
-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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