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단순히 문제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향하고
있는 만큼 매우 낯선 실험이기도 하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최근 우리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단순히 문제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는 민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향하고 있는 만큼 매우 낯선 실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이 문제는 외국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내부에서도 소수가 고민해 온 사안이다. 이번 좌담회에 함께 참여한 성공회대학의 세 교수들 역시 그에 속한다. 1월 24일 성공회대학교 새천년관에서 가진 좌담회에는 퀘이커교도이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했던 박성준 교수와 진보적인 언론개혁운동에 나서고 있는 사회과학부의 김동춘 교수, 신학을 가르치는 부총장 양권석 신부가 함께 참여했으며, 본지에서는 한종호, 박명철, 양정지건 기자가 참여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 된 배경이 무엇인가?
또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박성준 교수 ⓒ뉴스앤조이 김승범
박성준 교수(이하 박성준)=그 동안 한국 사회에 적잖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역을 거부하며 감옥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했으며, 그들의 병역거부를 서구 사회처럼 평화적 삶의 양식이나 양심적 결단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없었다. 이상한 종교집단이 사이비 교리 때문에 속박 당하고 있다는 식의 인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 문제는 오히려 오태양 씨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소위 소수자, 인권, 평화 등의 문제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한국 사회가 세계의 흐름을 외면하고 홀로 고립되어 있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적인 추세가 이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소수자, 인권, 평화의 문제와 결부해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런 배경에, 오태양 씨의 등장이 하나의 출발신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김동춘 교수(이하 김동춘)=지금 박 선생님 말씀대로 이 현상은 자기 양심의 자유를 국가안보나 국가의 명령보다 우선시 하는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그 동안 개인의 양심이나 신체 자유를 국가의 명령보다 상위에 두는 사고방식이 위험시 됐다. 남북이 분단된 준전시 상황인 우리 사회에서 감히 국가의 명령에 거역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국인은 국가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조세저항이 선진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일제부터 100년에 걸쳐 지속되어 왔다. 1980년부터 83년 사이에도 운동권 학생들이 강제 징집된 사례가 있었다. 그때는 군대에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고 징집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기보다 국가의 무리한 명령을 피하려는 행위였다. 우리 사회에서 군대 문제는 일종의 금기다. 이런 상황에서 매년 수 백 명의 군 의문사가 발생했고, 그 사망자를 합치면 광주에서 공개 학살된 숫자를 훨씬 넘어선다. 군대에서 죽으면 개 값도 못 받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나의 신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체의 자유는 곧 생존권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은 국가에 종속돼 있었다. 지금의 병역거부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양심과 신체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양권석 신부(이하 양권석)=김 선생님은 그 동안 병역거부에 대한 역사적 흐름이 있었다고 했는데,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병역 비리 역시 꾸준히 있어 왔다. 군대 가는 사람은 돈도 빽도 없으니 간다는 말을 공공연히 떠돌았다. 어떤 면에서 기득권층이 군대라는 절대가치를 만들었지만, 또한 그들이 이 가치를 붕괴시켜온 셈이다. 유승준 문제도 이와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행동에 물론 여러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전향적으로 그에게 국적 선택권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나.

▲김동춘 교수 ⓒ뉴스앤조이 김승범
김동춘=병역은 곧 국가의 동원체계다. 전쟁의 목적에 맞게 인적 자원을 동원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분단상황에서의 병역이다. 이는 도덕적 책무이기 전에 의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군에서는 인간이 도구화할 위험성이 있다. 이는 북이나 남이나 마찬가지다.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고, 사회를 군대 원리로 운영하고, 인간을 전쟁수행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상황에서는 국가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혼동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만약 국가적인 동원이 공적 성격을 지니고 지도층이 이 일에 앞장선다면 참여하는 국민에게도 자발성이 있었겠지만, 병역에는 이것이 부족했다. 한국전 당시에도 장정을 동원해서 얼어 죽였고, 수없이 반복되는 군 부패와 비리가 명령의 정통성을 훼손해왔다. 그것을 이제서야 공개적으로 거론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단체의 문제로 볼 수 있는지?
이와 관련해 한국 교회의 무관심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박성준=개인적으로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처신의 어려움이 있다. 난 퀘이커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퀘이커 신앙에는 평화고백의 전통이 있다. 실제 미국의 퀘이커 신자들은 월남전쟁 때 반전평화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 중에도 퀘이커 신자가 상당수 있었다. 그들이 인권평화 사회정의 운동에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미국사회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형성돼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는 미국과는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적 조건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걸어온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양심, 이성적 판단, 가치관에 비추어본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 찬성하는 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하나의 운동이라고 했을 때,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준비는 아직 안 돼 있다. 스스로 어떤 문제에 대해 나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고 이에 대응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양권석 교수 ⓒ뉴스앤조이 김승범
양권석=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것 아닌가?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안은 오태양 씨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구분이 될 것 같다.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이 법 테두리 안에서 대화를 요청하고 있다면, 여호와의 증인은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물론 이런 행동조차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하지만….

박성준=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생각은 좀 다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 이 문제를 논의할 가능성 자체가 봉쇄돼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오태양 씨가 누리는 분위기를 누리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더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오태양 씨는 현재 변호사나 언론, 시민단체의 옹호를 받고 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특권이라 할 수는 없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런 가능성조차 전혀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그 동안 벽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는 그들의 양심의 이야기, 개인적 신앙의 이야기도 햇볕을 봐야 한다고 본다. 오태양 씨만큼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둘 사이의 형평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독교 역시 뼈아픈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고민해야 한다. 기독인들은 지금 병역거부자들을 통해 양심의 거울 앞에 서 있다고 본다.

양권석=죄책고백(KNCC가 1988년 발표한 '통일선언'에 포함되는 내용)에 보면 한국 교회가 분단 이데올로기와 동조했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이름으로 동족을 살해하는 것을 합법화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교회 반성의 단초는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을 복권시켜서 빛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분단이데올로기에 야합해 온 기독교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박성준=죄책고백을 말씀 하셨는데, 자기 성찰은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의 양심에 도전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에서 이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씨가 가는 길은 이제 사회와 역사의 평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발신하는 메시지는 이미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슴에 있었고, 그들 속에 오고간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는 완전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체로, 마치 오씨가 처음으로 이 문제를 꺼낸 것처럼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기독교도 뿐 아니라 불교도와 시민단체도 이 문제에 대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오태양 씨에 대해 마음의 공감을 갖는다면 여호와의 증인의 삶에 대해서도 반응해야 한다. 아무튼 우리는 한 시대의 맑은 거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거울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체복무제도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자.
또 새로워진 안보환경과 이에 따른 전력의 재해석도 중요한 것 같다.


김동춘=우리 사회는 자기와 사상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이 탄압 받을 때, 그를 지지하면 함께 한통속으로 몰아갔다. 한총련 탄압이 법리적으로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쪽은 워낙 골수니까" 하면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당연시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에 대해 동조하지 않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상하니까, 군대를 안 가면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빨갱이 사냥과 똑 같다.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의 인권은 지켜줘야 한다. 오씨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군복무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오씨의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인터넷에 나타나는 현역복무자들의 격렬한 반대 행동 역시 그렇게 길들여져 온 데 따른 피해심리와 보상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도 무조건 나와 같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고, 이런 권위주의에 갇힌 한국의 남성 문화가 가져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양권석=정서적으로 보면 그렇고, 크게 보면 안보개념이나 냉전 이후의 변화 요구나 갈등까지 개입된 문제라 생각한다. 가령 새로운 형태의 안보개념이 필요한 것 아닐까. 우리가 80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이 새로운 안보환경에 적절한 것이냐의 문제가 제기돼야 한다. 군대유지는 통일 후에도 필요한데 지금 정도의 병력이 현재의 방식으로 동원돼야 하는가, 그리고 이 것이 효율적이냐,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병력 수만 단순 비교해서 안보 위기 하는 것은 위험하다. 실제로 군비의 규모라든지 전략의 힘이 되는 경제를 비교해 보면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또 우리 법이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고 이를 확보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는가도 봐야 할 것 같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런 운동이 제도 또는 종교와 만나는 계기가 없다면 망한다는 이론이 있다.

박성준=우리 사회는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하다. 새로운 제안, 가치관, 삶의 양식, 행동이 사회에 수용되고 제도화되어 가는데는 일정한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과정을 지나는 벽두에 서있다. 사회가 갖고 있는 공포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을 주어진 현실로서 일단 인정하면서 지금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서구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서구사회도 대체복무를 열어줄 때까지 갈등의 시간이 필요했다.

병역거부란 문제 자체에서 머물러선 안 될 것 같다. 왜냐면 이 문제는 보다 다양한 문제들, 가령 냉전, 통일, 병역 등에 대한 다양한 논리들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안으로 확대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박성준=병역거부 문제를 탈냉전의 관점에서 풀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양심의 문제로 심화시켜서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 있는 방법이다. 이 문제를 체제에 대한 저항의 운동에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운동과 질적으로 다른 양심과 신앙의 문제로, 우리 사회가 전혀 조명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으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김동춘=일제 말 신사참배를 거부한 보수교단의 경우를 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신앙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 이를 역사 정치적 차원에서는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큰 틀에서 보면 자신의 신앙을 절대적 우위에 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사회과학적으로 보면 자기의 어떤 양심에 따른 행동을 사회 역사적 차원으로 일치시킬 때에 신앙이 꿈꾸는 좋은 세상 만들기에도 기여한다고 본다. 병역거부 문제를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선 군 의문사 문제와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군대에서 많은 사람이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체 사망했는데도 아무도 말 한 마디 못했는데 이를 공개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운동적인 의미가 있다.

박성준=여성평화운동에서 보내는 서구의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들의 결단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수준보다 훨씬 더 깊은 결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티즌 가운데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놈들아"라며 쉽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다. 진실과 아픔의 깊이를 보지 못하고 상식적 수준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민주화투쟁, 사회변혁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영역이고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익숙치않은 부분이다. 이 문제를 보는 우리들도 상식적 수준에서 이 문제를 보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 월남전 때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은 "우리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비겁자가 아니다. 다만 총을 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어려운 일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노동수용소에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부과 받았다. 군대복무의 어려움은 비교가 안 된다. 군대 가는 게 쉽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쉬운 게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병역거부 하는 것은 가시밭길 가는 것이다. 결코 병역기피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김동춘=이 문제를 계기로 그 동안 성역화 된 군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 성역 있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성역 있다고 국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군 전력의 문제, 재래무기 문제, 장교, 하사관 문제, 사기 문제, 군이 사회에 미친 긍·부정의 영향까지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병역거부란 문제를 기독교와 접목해 보자. 한국교회는 아직 비폭력이란 가치나 평화의 가치로 이 문제를 보기보다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이란 한 '이단 종파'의 행위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짙다.

김동춘=기독교가 이미 사회 권력재생산의 중요한 기둥이고 지배체제의 축이니까 평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사회 변혁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 전체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끊임없이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과, 돈과 권력을 좇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가,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남이 하는 대로 그 가치를 좇아가는 게 유리하니까, 가는 것이다.

박성준=기독교가 인권, 양심, 한 개인의 존재가 하늘만큼 우주만큼 소중하다는 인식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양심의 명령에 따라 결단했을 때 그 결단의 의미가 하늘만큼 소중하다는 이해가 우리 기독교에 있는가? 어떻게 보면 한국 교회는 공동체보다는 집단을 중시한다. 집단에 매몰된 개인을 본다. 한국 교회는 개인의 문제를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통로 자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비폭력이라는 주제가 비로소 등장했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비폭력이란 주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평화라는 단어는 썼지만 비폭력이란 단어는 많이 안 썼다. 폭력적 방법으로도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논리였다. 폭력에 의해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도 평화를 말했다. 그에 비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비폭력이란 다른 차원의 평화를 제기한 것이다. 갈 길이 멀지만 비폭력은 간디의 운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비폭력이 힘이 없는 게 아니다.

양권석=목사직 세습 문제가 나올 때도 생각했지만, 교회가 현재 공공성이나 공익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에 종교성이 없다는 말이다. 수구적이고 기득권의 자리에 선 교회가 맞는 위기는 근원적으로 종교성의 위기에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엉뚱하게도 교회에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당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통탄할 노릇이다. 단군상 훼손, 종교간의 대화 부재, 종교 집단주의를 넘어서서 근원적인 자기 성찰을 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작금의 교회를 보면 자기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모든 교리를 중세보다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 포장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교회는 지금 전 사회가 자신을 공격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 이상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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