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일성수 과연 성경적인가?

1.1 롬14장 말씀

롬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이 말씀을 포함한 롬14:1~12 의 요지는

특정 음식을 안먹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과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하며 즐길줄 아는 자유하는 믿음을 가진 자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앞에 거리낌이 없는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또한, 한 날이라도 굳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서 "성수"하겠다는 사람과 모든 날을 주의 날로 알고 하루 하루 작은일에서 부터 주를 의뢰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을 지표로 하여 특정날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자유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서로를 비난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는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즉, 어느 특정한 날에 절대적이고 계율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주의 시간임을 인정하는 청지기적인 자세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값없이 주신 새생명의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주 앞에서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 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본질적인 특정 음식, 특정 날에 대한 다툼으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이며 어떤 정형화된 형태를 고집하고 그외에는 모두 이단이라는 식으로 정죄하는 태도야말로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모두 나의 적이다라고 외치는 인간의 편협하고 옹졸한 집단이기주의적 발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개별적 차이를 인정할 줄 모르고,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원인이며 비 본질적인 것을 신앙의 지표로 삼아 복음과 신앙의 본질을 흐리는 어리석고 죄악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쪽도 절대적이지 않으니, 단지 이로 인해 서로 비난하지 말것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믿음이 약한자들의 의심하는 것 (즉 특정 음식과 날에 메이는 것)을 용납하고 받으라고 한 것이다. (롬14:1~3)

1.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요4:6~26)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누신 대화의 결론적 부분으로서, 물을 좀 달라는 화두를 통해 다섯 번이나 결혼하며 세상적 안정과 세상것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의 영적 황폐함을 일깨우시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만이 그 여인의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길임을 말씀하시는 중에 돌발적으로 발생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영적 필요를 깨닫고 돌연 예배문제를 꺼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19~20)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위 인용된 요4:21~23)의 뜻은, 하나님을 예배함은 이스라엘이 주장하듯 장소적 개념에 속박된 것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왜 돌연 예배장소의 문제를 물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마음 깊은 곳에 갖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예화의 교훈이 있다. 즉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강조할 때 그것은 오히려 믿음으로 나아오려는 이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장소적 제약(민족적 제약)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의 본질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어디 장소적 제약으로부터만 자유한 것이랴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3 예수님의 깨우치심 (마12:1~13)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안식일에 대해 논쟁한 것에 대해 가장 깊게 다룬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비판하였는데 그들은 출16:23~30장 말씀의 만나 사건을 떠올리며 자신들의 비판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윗이 성전안에서 안식을 범한 것을 하나님이 용납한 전례가 있음을 언급하시고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5~7)

이는 성전안에서는 안식일의 규범에 의해 인간의 정당한 행위들이 제한을 받지 않으며 성전보다 크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이미 참 안식을 얻은자로서 제사적 행위를 구함보다 사랑의 실천과 이웃에 대한 온정을 구하는 참된 안식한 자의 삶의 모형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1.4 주일성수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의 무익함과 본질적 예배의 의미

(행20:6-7)을 예로 들어, "주기적 안식일의 다음날, 즉 주일에 특별히 떡을 떼는 것과 여행을 하지 않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는 주장은 참으로 위험한 억측이요, 성경해석 접근방식의 심각한 오류이다. 전도사역의 일환으로 먼길을 여행하여 방문한 곳에 하루 이틀 더 유한 것이 주일성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예수님도 많은 기사와 이적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싸우시며 못다한 안식일 논쟁을 그 제자들이 다른 날 즉 "주일"을 새로운 안식일로 규율화 하였다면, 이는 당시 아주 심각한 이슈로서 바울의 서신서에서 분명히 다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관련하여 분명히 다룬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단지 위에서 설명한 롬14장의 말씀이 특정 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골자이다.

자유케하는 진정한 복음은 특정 장소만이 아닌 특정 시간으로부터도 자유로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의 태도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아니, 본질적으로 필요한 전부임을 깨닫게된다. 참으로 지고 지상의 예배는 우리의 전 삶이 그 앞에 정직하게 드려지며 우리의 사고와 판단중에 그를 의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롬12:1~2)

일상 노동의 현장에서 진실되고 성실하게 사는 것, 아비와 어미로서의 도를 다하고 가족을 사랑과 인내로 감싸고 돌보는 것, 자기 마음을 지켜 세상것에 대한 탐욕적 집착과, 두려움에 굴복한 처세술, 비열함을 떨치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것.(약1:27) 그를 의지하여 정의와 사랑의 편에서 영적 승리를 추구하며 개인적 삶을 통해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알아가는 삶! 이러한 것이 진정한 예배, 곧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일 것이다.(호세아6:3,6 ; 미가6:6-8 ; 롬12:1~2)


2. 주일성수 개념의 덕

믿음의 선진들이 댓가를 치르며 지켜낸 이 전통의 덕은 무엇인가?

2.1 믿음의 성장을 위한 보호

주일성수의 계율화는 개인적으로 믿음의 반석위에 서지 못한 이들에게 최소한 지켜야할 구체적인 행위적 지표를 제시하고 교회에 나와야할 의무감을 줌으로써, 게으름과 바쁜 세상의 여러가지 급한 일들의 속박을 극복하고 교회예배에 나아와 하나님 말씀의 역사와 임재,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도전..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음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현대의 바쁜 생활 패턴이 쉬이 앗아갈 수 있는 개인의 영적 관심을 주일성수 제도화를 통해 지키고 보호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앙하는 자로 성장하게 도울 수 있는 면이 있다 할 수 있다.

교회가 중요한 규율로 제도화한 이 주일성수 개념으로 인해 군대내에서도 주 1회 종교 활동이 불가침의 성역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는 사실 군 생활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주 큰 긍정적 영향요소라 할 수 있다.

2.2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실천함.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됨을 면하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4:13, 10:24)

복음은 분명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것이고 신앙의 척도는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일상의 어떠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 지체된 이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걸음마 단계의 신앙이 보호되고 성장하며 서로에게 달리 주신 은사를 나누며 섬기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반한 데에 이르도록 자라기 때문이다.

2.3 몸에 새겨진 창조의 원리

하나님은 스스로 6일간의 창조작업후에 제 칠일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축복하시며 우리 인간에게도 이것을 지키라고 하셨다. 낮과 밤을 주어 일할 때와 쉴 때를 제공하셨듯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할 날 즉, 쉼과 새로운 날을 위한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직시하였을 것이다. 이 몸에 새겨진 쉼의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 스스로 쉼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그 쉼을 제도화하여 인간의 성취욕으로 인해 몸이 혹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주일성수의 또다른 긍정적 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에 불과한 안식일의 규례가 주일성수로 대체되어 일주일에 어느날이 되었든 하루는 구별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 과정에는 이러한 몸에 새겨진 창조 원리의 실재와 복음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라 생각된다.

2.4 자본주의의 횡포에서 노동자를 보호함

노예제도가 신분의 차별과 노동의 합법적 착취로 가져다 준 부와 풍요를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표준화되고 반복적인 노동과 대량생산 체제로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이들이 값싸게 재화를 공유하며 풍요를 공유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인간 노동의 가치는 점점 기계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값싼 행위로 평가절하되어 갔다. 자본이 없이 노동으로 생활하는 노동자는 노동가치의 상대적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땀흘려야 하는 압박과 동시에, 업적에 따른 차등 보상과 풍부한 물질 문명에 대한 동경으로 자발적이고도 무분별한 노동에의 몰입을 가져오기도 한다. 또한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공장회전율을 높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 무한 경쟁에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 고용제 사장이 단기에 실적을 남기려는 의도 등으로 밤낮, 주말없이 노동자들을 압박하며 일하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즉, 계급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노동자는 다시 자본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란적 상황에서 다시금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게 해주는 "안식일"의 의미로서 주일성수가 자리하고 있다.


3. 주일성수 개념의 해악

3.1 양심의 걸림돌, 양심을 더럽힘

현대의 노동자는 주일외에는 자신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이들이 많이 있다. 안식의 의미는 그들에게 교회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잠을 자는 것, 아이들과 충분히 놀아 주는 것, 사회생활에 쫓기며 돌보지 못한 집안일을 돌아보고 돕는 것, 가끔씩 친지를 찾아 뵙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지 않는 것, 이웃과 주위 동료의 경조사에 찾아가 축하와 위로를 나누는 것,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는 것, 어려움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진 일반 노동자들에게 짧게 주어진 주말에만 할 수 있는 일들로서 다가온다.

주일 날 사정이 있어 교회에 가지 못하여도 하나님앞에 거리낌없이 일상 중에 나아가기를 힘쓰고, 세상속에서도 그의 임재하심속에 살아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성수”라는 말속에는 이 특정날에 교회에 빠지면 거룩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며 정죄의 대상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어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하나님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성도들에게 걸림돌과 정죄의식을 남김은 신앙의 뿌리를 좀먹게 하는 심각한 잘못이다.

난 약 한 달전 두달간의 해외출장후 한국에 일요일 새벽에 도착하였다. 집에돌아와서 아내와 아이들만 교회에 보내고 난 그시간에 수면을 취한 후 교회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오후내내 함께 놀아주며 시간을 보낸후 다음날 새벽 다시 금요일까지 떨어져 지내야하는 일자리로 향했다.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 잠을 잔 것으로 내가 스스로 정죄감을 가져야 옳은 것일까? 난 그 시간에 단잠을 주시고 빠른 시간내에 시차에 적응하여 아이들과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바울은 자신이 마땅히 취하고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것도 다른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거나 그 약한 믿음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자기 합리화 또는 믿음에 따라 행치 못하여 뒤로 물러가게 될 이들이 생길까 두려워 부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힘들여 자비량 선교사가 되었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부러 먹지 않았다. 단 하나의 목표 즉, “형제 앞에 아무 걸릴 것을 두지” 않아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14:13)

3.2 복음의 본질을 가리움

사마리아 여인이 장소적 제약에 대해 그러했듯 매주일마다 교회에 가야 한다는 시간적 제약에 대한 두려움으로 교회에 나아오기를 주저하는 이들을 나는 많이 만났다. 특히 저소득층의 사람들일수록 그러하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가 중산층의 전유물이 된 현상을 일부 설명해주는 대목이지 않은가? 나는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언하고 복음의 본질로 그들의 관심을 안내했다.

성경 어느 말씀에 한 개인이 거듭나기 위해 주일성수를 결단해야 한다고 나와 있는가? 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인정하는 문제이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바라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이 전부 이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보다 교회생활의 규율(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 등등..)이 먼저 다가와 그들을 압박하게 하는 현실은 또 다른 법, 그것도 인간을 위한 법이 아닌 교회 조직을 위한 법으로서 율법의 완성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가리우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 생각된다.

구원사역과 교회가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주일성수개념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본질이 될 순 없으며 이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한 자유하는 복음속에서 우리의 삶과 전인격으로서 예배하는 성장은 멈추고 특정 종교적 행위를 준수하는 것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선데이 크리스천의 양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직장 동료들과 점심중에 나눈 이런 말이 생각난다. 군대 있을 때 심지어 자판기 커피 마실 때도 꼭 기도하는 상관이 있었는데 행실이 좋지 않아(연말에 부대에 할당된 면세 양주를 부당하게 사적으로 대부분 전용하는 등...) 많은 이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는 교회를 통해 본질의 근처에도 속하지 않는 행위를 철저치 배워 지키면서도 정작 복음의 본질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3.3 가까이 하기엔 너무 바쁜 그리스도인

청년부 성경공부를 섬기던 시절, 교회 나온지 얼마되지 않는 한 조원이 일요일날 이사하게 되었다. 가난하여 포장이사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그 형제는 건강한 몸도 아니었다. 신뢰하는 후배에게 내가 직접 가고 싶은 맘과 필요성을 전하고 예배와 성경공부에 나오기 보다 그 형제를 도와 주자고 제의하여 그 후배와 다른 한명이 그 이사를 도와주었다. 그날은 예수님이 인습과 전통으로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이 시대속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을 것이다.

평신도 사역이라는 말이 유행하듯, 신앙이 자라는 것과 교회봉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인식의 오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죄많은 세상에서 믿는 우리를 당장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고지상의 목표로 성장해가야할 과제를 위해 남겨 두셨듯이, 진정한 신앙의 성장은 더 많은 교회활동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유일할 모델일 수 없으며, 세상으로 나아가 나의 도움과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곳에서 삶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증거하고 실천하여 복음적인 가치관이 이 세상의 구석 구석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 더 어렵고 가치있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자기손으로 땀을 흘려 얻은 정직한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는 주말이 유일한 노동으로부터 자유한 시간인데 이 때마저 교회활동에 전 시간을 몰입하여 이웃과 동료를 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가족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심각한 폐단이다. 교회봉사에 너무 바빠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 아버지를 둔 어떤 사람이 그 상처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뿐 아니라 그 부모가 그토록 열심히 섬긴 교회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는 이 땅의 치우치고 온전치 못한 교회의 모습을 항변하는 단편적 예이다.

종교적 행위를 하는데 집착하는 이들로서가 아닌 생활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앞에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들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4. 제안 - 믿음의 분량대로

주일성수를 힘쓰는 것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결심한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앞에 드려지는 날이며 일요일 성도가 함께 모이는 것은 우리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할 전통일뿐 정죄의 기준이나 신앙의 목표로 자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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