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날 수 있을까? 예수시대 이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있었는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죽었다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 주위에 죽었다가 살아 난 사람이 있는가? 성경은 영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예수께서는 영으로만 산 것이 아니고 죽었던 육이 살아서 부활했다고 성경은 증언하지 않는가?

얼마 전 실제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그가 그렇게 죽었다 살아났다고 글을 써서 그런 줄로 알고 있다. 그는 미국인이고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를 말하다 보니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자꾸만 자기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니 일일이 다 다닐 수 없어 체험 간증을 책으로 펴냈다.

그러나 죽었다 살아났다고 미친 말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라야 믿지 세상에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사람도 많고 예수님이라는 사람도 많으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그 책을 누가 번역했는가 살펴보니 별로 저속한 사람이 번역한 것 같지는 않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학박사요 마취과 전문의로써 현재 한국의 모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라나 이 정도의 학력과 신앙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미쳐도 되먹지 못하게 크게 미친 사람은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그 책을 사들고 읽기 시작하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간증을 쓴 저자도 그의 학력과 경력과 삶의 태도로 봐서 지나친 신비주의에 빠진 그릇된 신앙인 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는 분이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뉴튼에서 출생하고 20여년 동안 노던 켄터기 대학에서 예술대학 교수로 봉직한 분이다. 그러던 그가 1985년 프랑스 파리에서 죽음을 체험한 후 그의 삶이 거듭나는 변화를 겪고 그 후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1992년 그리스도 연합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현재 오하이오의 그리스도 시온 연합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의료진들이 죽었다고 판단한 병실에 누워서 죽음 저편을 다녀왔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에 관한 새로운 체험을 하였다. 어릴 때 예수를 믿고 세례 받은 적은 있지만 그 후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사람이라 예수에 관한 성경지식도 없고 믿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만나주시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 주셨다. 그 후 그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오늘의 시대에 죽어서 예수를 직접 만났다는 자는 어떻게 예수를 증거 할 것인가? 초대교회의 사도 바울 처럼 증거 할 것인가? 아니면 요즈음의 목사님들처럼 증거 할 것인가?

2.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를 증거 한다.

    "나는 죽었을 때 지옥의 입구로 가 있었다. 지옥의 심연과 공허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연옥이라고 부른다. 이 때에 나는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을 불렀다. 성경에는 이에 연관된 구절이 여러 번 나온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나는 나를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였다.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가졌던 기억이 저 멀리 떠올랐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이 예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어렸을 때에 예수님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를 수가 있었다. 12살이 되자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성령께서 내 삶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10대 후반기에 믿음에서 멀어졌다. 나는 믿음을 상실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영은 항상 내 안에 계셨던 것이다.

    내 삶을 회상해 보면, 내 안에서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 자아는 천박한 이기주의로 발전해 갔지만 또 다른 내면에는 하나님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수년간 계속되어 영적 응급상황으로 폭발할 때까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영적 싸움으로 인해 내 뱃속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이 육신의 질병은 이 영적 싸움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모두가 나의 책임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게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2번째, 3번째, 4번째 그 이상의 기회를 주신다. 이번 기회는 내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가 아니었다. 그 동안 주어진 여러 기회 중의 하나에 불과 하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 - -

    되돌아 보건대, 나의 영적 발전은 먼 길을 지나 왔다. 일정한 짧은 기간만을 되돌아보면 나는 넘어졌다가 전진하고 좌로 갔다 우로 가기도 하였다. 발전만 계속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진보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노력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사랑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 자매, 또 우리 자신을 사랑할 때에 우리의 창조주는 기뻐하신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을 섬기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선한 목적과 진보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상상하지만 그 역으로도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가 바로 우리들의 영혼의 여정이다.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본 모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참 모습이 결정된다.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원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 기쁨, 친절, 관대함, 오래 참음, 신뢰를 보내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과 천사들이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보살피기를 원하신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서 세계를 변화시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을 보이느냐에 따라 세상도 변한다.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 진정한 기쁨은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들과는 무관하다. 기쁨은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 속에 있다.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만물을 만드셨다는 믿음을 가짐으로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두려움이나 고통 등의 감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쁨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기쁨이다. 기쁨은 삶의 매 순간 순간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인지하는 것도 기쁨이다. 외모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영은 그들 안에 계신다. 사람들의 행악에 저항하면서도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허물 투성이의 존재이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얼마 전에 묵상회 중에 메노파(派) 기독교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 도중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당신은 성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어서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우리는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의 성인이다. 바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거룩해진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알 때에 성화(聖化)가 일어난다. 나의 죽음의 체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체험이었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갖고 계신 그 사랑을 확인해 보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모두 성인이 되도록 부르신다."(참고 : 하워드 스톰 저, 이헌근 역,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은혜출판사, 2001.12.25., p.145-150)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함을 보이고 존경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이 관여하시는 모든 것에 다양성을 주셨다. 우리는 모든 종교에서 궁극적으로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 같은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종교적 믿음의 차이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종교의 저변을 흐르는 근본 진리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것이다."(위책, p.133)

    "나쁜 종교에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좋은 종교에 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종교이냐가 아니고 각 사람이 접한 종교에서 각 개인이 어떤 행위를 하였는지가 중요하다. 종교란 어떤 행선지에 이르게 하는 도구이다.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과 내밀한 관계를 맺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내밀한 사랑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면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가 이익을 추구하고 스스로를 높여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데에 관심이 많음을 발견한다. 종교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란 각 사람들의 말, 생각, 행위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모든 삶을 사랑하시며 영과 진리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종교에 대해 기뻐하신다.

    종교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자기 독선의 자긍심을 고무하는 것에 대해 깊은 혐오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어떤 종교보다도 위대하시다. 그리스도의 영은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앞책 p.198.)

    "진실한 사랑이 결여된 종교적 행위를 하나님은 가증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종교적 위선보다는 오히려 진실한 불가지론자를 사랑하신다"(앞책, p.200)

    "사후세계 - 사람은 죽을 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세상은 예전과 똑같이 보이고 완전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죽기 전에 무슨 일을 당했을지라도 그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고통은 사라지며 살아 있을 때보다 오히려 육신의 상태는 더 좋아졌다고 느끼게 된다. - - - 대부분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 - - 모든 사람은 천국에서 불멸의 형태로 있으며 물질적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영적 여행을 하고 있다. - -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이승의 삶은 값진 선물이다. 천국을 준비하는 단 한번의 기회이기에 이 삶을 아주 현명하게 보내야 한다. 아무에게도 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선물은 하나님께서 경솔하게 아무렇게나 주신 것이 아니다. 이 삶은 천국에서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는 기회로 주어졌다. 이 삶의 기회를 현명하게, 사랑으로 유용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거절하는 셈이다. 삶을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결정에 따라 천국의 후보자 여부가 결정된다. 우리 각자가 천국으로 갈지 아닐지 알고 있다. 아직 답을 알지 못한다면 큰 문제이며 갈 길을 보여 주시도록 즉시 하나님께 여쭈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 본향에 오기를 원하시며 그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 주셨다. 그 이름은 바로 예수이시다"(앞책, p.204-218)


3.

저자 하워드 스톰이 이 책에서 시종일관 사용하는 용어는 죽음, 성령, 믿음의 다양성, 사랑, 천사, 천국과 지옥이다. 그는 이 간증에서 죽음 후의 생활을 말하되 현재 삶 속에서의 회개와 성화를 강조하며 성령께서 도와 주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한 세계 여러 종교 속에 나타나는 믿음의 다양성들을 존중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간증한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죽어서 하나님을 만난 체험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지나친 신비주의자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때론 박식한 종교철학자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아주 보수적인 목회자인 면도 보이며 때론 아주 진보적인 목회자의 모습도 보인다. 그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그의 죽음의 체험에 대한 진실성을 보여주는 면이다.

이 사람이 진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인지 우리는 현대 의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또한 이 분의 간증이 현대신학의 신학적 사유로 쉽게 용납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대 철학적 사유도 이를 쉽게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현대 과학도 마찬가지로 이분의 간증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도 완성된 진리가 아니다. 과학도 한계가 있다. 과학은 대상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바탕으로 하는데, 바로 대상을 객관화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과학이 안고 있는 한계라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이 객관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객관화가 가능하지 않으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과학의 한계란 과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란 말이다.

이분의 간증은 매우 신비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간증은 건전한 면이 있다. 맹목적인 예수 신앙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며 성령을 인정하고 삶 속에서의 성화를 위한 실천적 사랑의 삶을 말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만을 크게 신성시하거나 우상시하지 않고 우리 모두 성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은 매우 건전한 간증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교단의 목사가 된 이로서 믿음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타종교의 믿음까지도 용납한다는 것은 천국의 체험이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 이분처럼 한 번 죽어 보는 게 어떻겠는가. 이분의 간증이 신빙성이 있다 없다를 논하는 데 열중하는 것 보다도, 한 생명이 하나님께 매달려 고달픈 인생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남은 인생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와 열정과 소망을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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