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처음으로 주셨습니다. 율법의 적용을 받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양심, 도덕적 분별력이라는 자연법, 영원법의 지배를 받고 살았는데, 율법으로는 정죄 받지는 않지만 양심에 따라 심판 받는 시기입니다. 바울도 율법 없는 이방인의 경우에 양심이 증거가 되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했습니다(롬 2:15).

그러나 외적인 규제가 없이 양심에 따른 자율적인 법, 하나님의 법인 자연법을 인간들은 자신의 타락으로 지키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법으로 규제를 받는 기본적인 하한선을 정해주셨는데 이것이 모세의 율법, 즉 십계명과 여러 규례들입니다. 학자들은 이 율법을 실정법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에 일어난 많은 사건, 율법적 의식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한 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이르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구원의 사건도 일회적이 아닌 출 애굽, 탈 바벨론처럼 반복적으로 성취되어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되다가 마지막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을 것을 예표하고 제사 의식은 그리스도가 양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제물이 될 것을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되 율법의 원 의미와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껍데기인 율법의 행위를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을 다 한 것으로 착각하고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육체의 할례를 구원의 표징으로 믿는 그들은 할례의 흔적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구원 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변하지 않고 율법을 외식적으로 지키면서 바리새인 수준에 머무는 그들에 대해 주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라는 바울의 표현처럼 율법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의미는 율법의 껍데기인 형식, 의식은 폐하지만 율법의 내용은 지키는 정도에서 더 발전하여 율법 이전의 자연법, 영원법의 수준인 내면의 동기까지도 확대해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실정법을 만든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 의도를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율법을 완전케 성취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율법은 가장 낮은 차원의 계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러한 율법으로 만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십계명 같은 기본적인 수준의 규범에 만족하면서 외식하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원하는 수준까지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의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백성들이 율법이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갈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율법에서 건져내어 자유롭게 하신 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수준까지 자라게 하실 계획을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방법을 통해 실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본 뜻과 목적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므로 구약의 율법적인 의식은 더 의상 의미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율법의 한 부분을 강조한다면 구약의 모든 율법의 적용을 받게 되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합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죄 부분에 대해서는 신약의 은혜를 적용하면서 안식일과 십일조와 같은 민감한 부분에 대해선 율법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고 이율 배반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며(엡 2:9), 믿음에다 할례라는 육체의 흔적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그리스도 인들에게 자신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당당하게 도전하면서 믿음에다 육체의 행위를 덧붙이어 복음을 변질시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이 주는 놀라운 자유에 대해 언급하며 껍데기에 불과한 율법의 행위에 얽매이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는 종처럼 얽매이고 짐이 되어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딸이라는 자유로운 명분을 주셔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 받은 자녀는 종과는 달리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고난도 받고 목숨을 바쳐 헌신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자녀의 권세 있는 삶은 상이나 벌을 주는 법에 의해 한정되고 제한되어지는 낮은 차원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나의 죄를 없앤다는 차원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부르신 소망, 목적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믿음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주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 죄인인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대표하여,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믿음으로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원래 죽어야 할 내가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죽었으므로 나의 몸은 살아있는 산 제사,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의미이고, 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자기부정, 자기부인을 의미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도록 훈련도 받고 교육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고 천국가면 된다는 식으로 구원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단순히 주님을 입으로 영접 시키고 구원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주님이 죽은 것이므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중수 목사님의 저서 [십자가와 헌금]에서는 헌금제도를 구원의 원리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요약한 부분에 안식일도 함께 적용해보았습니다.

"구약의 십일조(안식일)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성전 유지를 위한 성전 의식법이 주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기에(미래의 영원한 안식인 구속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기에) 구약의 그림자에 불과한 십일조(안식일)는 폐지되어야만 합니다. 헌금(안식일)제도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외형적인 영역을 넘어 율법의 살아있는 참 정신과 목적을 드러나게 하는 십자가의 원리에 의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시대의 새언약 하의 온전한 십일조(안식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있는 산 제사로 드리는 십자가의 원리,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십자가는 십분의 십을 모두 바친 희생과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헌금(안식일)자세는 십분의 일이라는(일주일의 하루라는) 형식을 뛰어넘어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나의 삶의 십분의 십을 믿음으로 드리는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이라는 신령한 예배의 한 표현으로 헌신자의 자발적인 내적 자세가 중요시 되어야지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 ('주일을 잘 지키면 축복 받는다')라는 상거래식의 유도와 강요는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변화나 사랑이라는 내면의 동기 없이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기도하고 헌금하며 전도하는 외식적인 신앙인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구약의 바리새인과 같은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닌지 생각케 합니다. 예배 전에 불편한 이웃과의 화해를 먼저 요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나 헌물을 받기 이전에 거룩한 난 자신을 원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희석시키는 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열심과 충성으로 헌신한다는 우리 기독교인들 자신이 아닌지요. 과연 그 열심과 충성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열심과 충성인지 자문해 봅니다. 내 뜻에 맞게 각색된 하나님은 성서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내 목적과 유익을 위해 만들어낸 또 다른 우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나의 유익에 맞게 성서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하더라도 내면의 양심의 소리와 성령의 탄식하는 소리마저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이 가식적인 종교지도자와 삯꾼 목자에게 그렇게도 분노하는 이유를 간과해선 안 됩니다. 지도자라는 위치에서 행사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사리분별을 못하는 순진한 주님의 양 떼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하다면 주일성수, 헌금에 대한 문제를 강조하지않는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주일성수와 헌금을 사정과 형편이 안돼서 못했을 경우 죄의식을 갖지 말라고, 어디에 있던지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