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님, 우리가 지난 번 만났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성서 읽기와 관련해 좋은 참고도서는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 오셨지요. 오늘은 먼저, 성서독법에 관해 저의 짧은 생각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성서해석의 바른 관점을 세우는 일은 신앙인, 특히 목회자와 앞으로 목회자가 될 사람에게 핵심적인 작업임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 어려움을 주는 일 또한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에 따라 여러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겨 놓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고정관념적 관점이나 도식적인 이해, 구태의연한 해석, 초보적 낱말풀이 등으로 구성되는 성서 읽기가 될 경우, 성서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세계가 펼쳐주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의 진면목을 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서독법의 기본 결말에 대하여 전혀 예상이 불가능하고, 결론적 메시지에 대하여 속단할 수 없는 성서읽기가 아니고서는 신앙인만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의 삶에 영적 충격으로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논리를 거스르는 반전과 역설의 충격으로 존재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미리 알아보고 손을 쓰려고 자주 거울을 보곤 합니다. 화장과 치장으로 거울의 눈초리를 슬쩍 피할 수는 있지만 거울 앞에서 자신의 볼품 없음을 느낄 때 속매무새를 똑바로 응시하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화려하게 부풀린 모습을 기대하는 심정에 ‘있는 그대로’의 모양새를 보는 일은 대부분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사회의 돌아가는 모양새가 그런지 모르지만 요즈음 흔히 ‘마음의 거울’이라고 일컬어지는 옛 경전이나 동양의 고전을 읽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거울 중에서도 특이한 책입니다. 성경 각 권이 제각기 다른 색체와 꼴을 지녔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그 구비구비마다에서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차라리 덮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는가 하면 눈시울을 적시는 진실의 향기를 뿜어내기도 합니다. 맑은 눈으로 본다면 내 안에서, 또 우리네 삶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그 생생한 모습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부류의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일그러진,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과 인생 및 사회의 실상을 대면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적당히 회피하거나 미화하거나 무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보입니다”(히 4:12-13).

그러기에, 성서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성서를 늘 새롭게 읽고, 재해석하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이해하고 알아 온 성서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더 깊은 깨우침을 얻는 일에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전혀 새로 대하듯 성서를 읽어나가는 자세를 갖추지 않는 한 성서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내면풍경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한 내게는 그 알고 있는 부문만 보일 뿐입니다. 성서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는 깊고 깊은 세계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는 것이죠.

실로, 성서는 아무리 퍼올리고 퍼올려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아서 미리 판단해버리는 예단(禮斷)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성관념과 관점을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힘을 지닌 책이라는 점을 기억하여 나의 맹점(blind spot)이 어디에 있는지 성령으로부터 일깨움 받는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사건의 기록을 놓고도 무수한 관점에서 그 의미의 지층(地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자신의 제한된 시각과 관점을 고정시켜 성서를 해석하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내지는 교과서적으로 정형화하는 것이 얼마나 성서에 대해 우(愚)를 범하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집사님도 잘 알고 계시듯이 성서는 이미 죽어 박물화(博物化)되어버린 기록이 아닙니다. 성서를 대하는 이와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자라나는 책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성서 독자가 성서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 것인가가 관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되어 있는 문자의 표면적 세계 밑바닥에 숨겨져 있고, 쌓여져 있는 놀라운 사연들이 한올한올 풀려져 나올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체험하기를 바라시는 세계의 무궁무진함을 비로소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나의 길은 너의 길과 다르다”고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파격’(破格)으로 다가오시며,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날아드는 화살처럼 우리들의 영혼을 찌르셔서 ‘전환(轉換)과 전복(顚覆)의 역설적 논리’로 우리가 이제껏 안심하고 딛고 있어왔던 대지를 뒤엎어 새 기초를 세우시곤 하십니다.

하여, 우리는 성서 앞에서 결코 안심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믿음과 생각, 그리고 결론을 지지해주고 증명해주는 책이라는 안이한 생각에서 그 반대의 관점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성서 앞에서 처음 서 있는 자이며, 어떤 결론에 직면하게 될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서 읽기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음성을 난생 처음으로 듣는 기회이며, 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을 자신의 생애에 최초로 목격하게 되는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뜻에서 성서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치열하게 도전해오는 책이며, 그 도전으로 말미암아 낡고 헛된 껍데기가 벗겨지고 무너지도록 하는 힘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를 지탱했다고 여겼던 것이 소멸하고 지금까지 생각해볼 수 없었던 새 것이 생기는 그런 체험을 이루어내는 독법(讀法)에 성공할 때 성서가 나의 삶에 육박해들어 오는 긴장과 갈등, 그리고 그 돌파구의 열림이 믿음의 능력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기초가 동요하면서 말씀이 새로운 반석이 되어 이를 대체하는 일종의 ‘주도권의 지진적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파격과 역설, 불시의 반전과 허점이 보이지 않는 도전, 인간이 만들어낸 형식논리의 완벽성을 깨는 대안 등이 성서에 잠복해 있습니다. 따라서 특히 목회자는 바로 이 숨겨진 지층을 세상에 드러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자의 소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의 목소리를 말씀에 담아 포장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체의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성서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라 그런지 인터넷 매체와 더 많이 쏟아지는 종이쪽과 그 밖의 각종 전파와 영상들이 유용한 것이라며 쉴새없이 정보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지식과 정보들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기보다 허세와 허상을 키워주고, 우리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 주면서 ‘괜찮다’(렘 6:14) 할 뿐입니다. 다들 뱃속 비어 가는 것 걱정하며 ‘뱃속을 살찌우는데’ 열심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뼛속을 살찌우는’ 말씀에(잠 15:30) 더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영화와 영광을 누릴지라도 “모든 인생은 한 낱 풀포기...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기”(사 40:6, 8)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참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드는 집사님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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