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예수님의 낚시에 제대로 걸린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점지해 놓으신 운명인지 아무튼, 뒤늦게나마 신학이라는 길에 들어선 집사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신학교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면 지금까지 세상에서 누렸던 많은 것을 포기하기를 '권고당합니다.' 그리고 일로매진, 소명감을 갖춘 목자가 되기 위한 훈련에 매달리기를 '기대당하곤' 하지요. 하여 신학생의 삶과 태도는 보다 엄격한 윤리적 기준에 시달리고, 스스로에게도 자체검열의 기관이 있어서 그 행동의 자유는 제한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한손에 그 검열전등을 들고 다른 손에는 제초기(除草器)를 들고 자신의 삶을 포위해들어가서 그 포위에 견디는 마지막 남은 자리에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과정으로 투입된다고나 할까요? 달리 표현하면, 세상과 결별하는 방식으로 신학의 세계에 정결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상투적인 신학교육의 현장이 보여주는 지루함과 삭막함입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기되었던 집사님의 얼굴이 떠오르는군요. 이거 처음부터 주눅들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은 어떤 것일까요? 어쩌면 기대했던 영적 빛남은 고사하고, 검열에서 살아남은 자아가 기쁨을 느낄 믿음의 권위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반사적으로 신학도를 급속하게 타락시키고 이중인격이 되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요. 겉과 속이 다른 현실이 일상화되어 있는 환경에서 너무도 당연한 자기 변신 내지는 생존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 말입니다.

일상의 언어와 종교 내지 신학의 언어가 구별되어 있는 지점에서 신학도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과, 신학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 사이에서 위선을 느낄 틈도 없이 그런 이중구조를 자기체질화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신학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사는 기묘한 모습이라고 할까요? 이것이 지나치면,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장래에 종교적 사기꾼이 될 소질을 열심히 개발하는 셈이 되는 것이죠. 경건한 목회자와 타락한 죄인이 한 인간 속에 공존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상태로 되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신학적으로 자신을 그럴싸하게 치장하는 방법을 배우고 마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저의 이런 걱정들이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신학은 무엇에 봉사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요? 신학을 했다는 것은 새로운 장사를 하는 수단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분명 그런 목적을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닐 터인데, 무수한 삯꾼 목자의 하나가 되는 지름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 빠른 자가 되고 만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하여, 우리는 우리를 삯꾼 되게 하는 신학, 아니 그렇게 만드는 삶과 대결해야 하는 것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신학도의 생활은 은혜가 아니라 몹쓸 구렁텅이의 시초가 된다는 것을 먼저 뼈저리게 깨달았으면 합니다. 이걸 정직하게 직시하지 않으면, 서서히 포장되기 시작해서 그 포장을 더욱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으로 갈아버리는 솜씨를 배우는 자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신학도로서의 삶은 이렇게 해서 고급스러운 타락의 장으로 변질되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걸 인정하고, 이럴 수 있는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면 신학은 사탄이 우리를 점령해버리는 통로가 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죠. 하여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무한히 정직해야 하며, 신학적 증언에 대하여서도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여, 공부하시다가 알아듣기 어려우면 알아듣기 어렵다고 말하세요. 말이 안되는 것 같다면 말이 안된다고 하시고요, 쓸데없는 말장난처럼 여겨지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하면, 그것이 곧 거짓을 배우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고 모를 수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때에도 왜 이해가 가지 않는지 도전해야 하며, 본래 그렇게 이해가 가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어법은 아닌지 따지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이 그 무슨 대단한 것인양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체의 거짓 권위와 맞설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 보듯이 그런 거짓 권위에 복종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만들고 교인들을 속이는 삯꾼 목자되는 죄에 속히 빠지고 맙니다. 한마디로 '나쁜 놈'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신학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어찌하여 신학을 설명하는 언어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서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언어로 무장을 하고 주눅들게 했던지...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자가 주눅이 든다면, 그것은 실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신학은 때로 '벌거벗은 임금님' 노릇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직시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신학이라면 그것은 그것을 논하는 자만을 위해 만들어진 독점의 체계일 뿐입니다. 그러니 혹 이런 체계로 무장한 스승을 만나거들랑 주눅들지 마시고, 아, 저렇게 되어서는 아니되겠다 하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언어를 쓰신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의 체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과 영혼을 기르는 일에 실패하는 신학은 그냥, 발길질을 해버리십시오. 아, 이건 너무 과격한가요? 결코 그렇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식하거나 타락하거나 교만해지든가 아니면 멍청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신학을 거부하지 않으면, 그런 허위의 권위가 추방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의 정직함을 상실해버리고, 가짜배기 자아를 형성해버리고 맙니다. 세상에는, 예수께서 이미 오래 전에 발길질 해버린 것들을 다시 주어모아 신학이라고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려내는 능력을 기르는 결단없이 신학을 하게 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하며, 도저히 알 길이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해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시고 깨질 것은 깨뜨리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면서 그렇지 않은 척, 깨달은 척, 믿고 있는 척하고 있으면 언제 무엇을 제대로 배울수 있겠습니까? 지금 꼭 다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부탁하고 싶은 건,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으면 끝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학에 포위되어 이중인격자가 되는, 그러다가 나중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추한 모습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매달려 살려 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기도 믿지 못하는, 그렇게 믿고 살지도 않은 말로 종교적으로 살살 속이면서 사는 인간이 되는 것은 영적으로 구제불능의 폐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집사님은 이야기의 말미에 일상의 현실 속으로 우리를 기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신학도가 되겠노라고 하셨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를 정작 기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치열한 만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치열함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적나라한 현실을 목격하는 것에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 세상 속에 깊이 박혀있는 곤고함과 아픔을 대면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치유하고 새살이 돋게 해야겠다는 간절함을 그 영혼에 지니지 못하면 말씀이 그 영혼에 부딪혀 점화되는 감격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어떻게 이런 좁은 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아갈까? 그 월급으로 요즘 같은 때에 아이들 교육을 과연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 아직도 굴속 같은 집이 서울에 있었군요. 뭐라고? 열네살인데 여길 나와서 몸을 팔어? 벌써 임신을 세 번이나 해봤어? 언제부터 이렇게 매맞고 살았나요? 온몸에 피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군요. 이게 무슨 상처예요? 담뱃불로 지진 상처라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썩어 있어요? 된장을 발라서 반창고로 붙여놨더니 이렇게 되었다고요? 할아버지 자식은 어디에 사세요? 그래 그동안 한번도 찾아오질 않았다구요? 처음에는 친자식처럼 잘 해주길래 마음을 놓았더니 그새 온통 돈을 훔쳐 달아났다구요? 책상서랍부터 열더라구. 봉투를 살그머니 집어넣기 전에는 아예 시선을 주지 않아. 아니, 30년을 이 옥에 계셨다고요? 그때가 몇살이셨어요? 그래 부인과 자식은 모두 북에 있겠군요. 내려온지 4일 만에 체포되어 지금까지…. 정박아를 둔 부모의 마음은 아무도 모를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생명을 세상에 내어 놓으셨지요? 그때 월남전에서 우리야 그저 벌초제정도로 생각하고 아무런 장비없이 뿌려댔지요. 그런데 그게 우리 아이들대까지 내려가서 이 모양으로 살고 있습니다. 고엽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누가 알았습니까? 조선족이라고 하면 사람을 우습게 봅니다. 사기부터 칠려고 해요. 누구를 믿습니까? 교회에서 사귄 사람이 급하게 돈을 빌려달래서 주었더니 종적이 없어요. 경찰에 신고하려 해도 불법체류신분이라 그렇게도 못합니다. 그걸 이용한 것이지요. 이게 어디 동족입니까? 그래도 나는 파키스탄에서 역사교사로 있었습니다. 이 연수제도라는 것이 사람을 교묘하게 착취하는 제도입니다. 산재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월급도 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얼마 안되고 현장에서는 나이도 어린 친구가 반말로 마구 부립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줄 몰랐는데, 80퍼센트가 욕이예요. 전부 어음으로, 그것도 몇 개월씩 뒤로 미루었다가 겨우 줍니다. 나는 공기 먹고 삽니까? 직원들은 무료봉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거래처 목록에서 빠질까봐 이 나이에 30도 안먹은 놈한테 머리 숙여야 해요. 젊은것들이 벌써부터 밝히기만 하고, 거시기 안 대주면 움쩍도 안해요. 이놈의 나라가 안 망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요. 내가 범인이라고 써대고는 정정기사는 귀퉁이에다가 보일락말락하게 해놓은 것 있죠? 직장에서 주변에서 그동안 내가 당한 수모와 집안 풍지박산된 것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습니까? 이런 횡포가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배웠다는 인간들은 이런 일에 눈길 한번 안줘요. 등등."

우리가 다가가야 할 현실은 얼마나 무수한지 모릅니다. 이걸 배우는 곳이 바로 신학교의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학은 무엇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걸까요? 현실의 아픈 현장이 절규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하고 좌절하며 소리죽여 우는 자리에서 터져나오는 질문을 안고 신학하지 않고 어떻게 그 신학이 죽음에 대한 '생명의 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마주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소리는 지적 사치일 뿐입니다. 하여 신학한다 함은 세상과의 결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새롭게 만나는 일의 시작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그 곤고한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시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간의 뼈아픔과 절망, 죄와 죽음을 보시고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에 나섰던 것입니다. 모세더러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내 백성이 고통당하고 있으니 일어나 그곳으로 가라' 하신 하나님의 음성은 하여,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지적 체계로 독자적인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치열한 현실의 삶과 부딪히는 가운데 대답이 될 때 그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아무리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신학체계라 할지라도 이 현실과의 만남과 싸움에 무력한 것은 우리에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지루하게 되었네요. 그렇다면, 신학도가 된다함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나를 바치는 훈련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부유하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고 그리하여 우리는 부유해졌다고 했지요.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가난해지는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새로운 부유함에 눈을 뜨고, 감격해하며 그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기운이 넘치도록 하는 일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소명감이 관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말해지듯 신학도가 되는데 전제가 되는 조건이 결코 아닙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아마, 소명감에 대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꼭 소명감이 있어야만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무수한 이유가 신학도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유 속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계기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소명감 운운으로 그 출발을 짓누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명감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이 들어왔다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서 세상을 누룩처럼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헛된 소명감으로 신학교에 들어왔다가 실망하는 자가 적지않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소명감이 신학도의 기본조건이 아닌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신학도의 삶은 평생 이 소명감을 기르고 그것이 길러진 만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그 과정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소명감이란 그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고, 양이 있어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채워지면 들고 다니면서 효력을 발생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의 성숙도와 비례하여 구체화되는 것이 소명감이고, 그로써 그만한 빛을 발하는 것이 소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은사를 발견하는데서 이루어집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신학의 자리를 발견하는데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김아무개, 이아무개, 최아무개만이 할 수 있는 자리를 펴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발견하는 기쁨 가운데서 새로운 자유와 아름다움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신학생들 사이에서 잘 나간다는 어느 젊은 목사를 자신의 목회 모델로 삼겠노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당사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에 빠져 스스로 인기모델에 집착하여 주어진 고유의 은사를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마다 생긴 것이 다르듯이, 주어진 일과 능력과 소명의 길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껏 펼쳐주도록 도와주는 것이 신학교육 현장의 소명입니다.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목회자를 기르는 곳이 신학교육의 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네. 그대라는 통로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은 원하신다네"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신학교는 똑같은 제품을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며, 모두가 새롭게 창조된 자로서 그 풍요한 다양성을 발휘하도록 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오묘함을 세상에 증거하는 자리입니다. 바로 그 점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을 바치는 일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고유한 작업임을 뿌듯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자여, 노래하라. 시를 쓰는 자여, 시를 쓰라. 그림을 그리는 자여, 그림으로 말하라. 목소리가 굵고 낮은 자여, 억지로 테너가 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고유의 자아를 발견하여 그로써 자신을 최대한 실현하도록 한걸음 한걸음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신을 세상에 주고 또 주어도 메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원천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학도는 세상의 유혹과 죄에 자신을 노출해야 합니다. 그리고도 자신을 지켜내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참 자유한 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 저렇게 사는 것이로구나. 세상의 유혹과 죄에 전염이 될까 전전긍긍해서 피해 사는 자가 아니라, 그에 맞서서 이기는 자의 의연한 풍채로 사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그리하여 결국 사탄이 그를 이기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짐에 모두가 은혜를 받는 놀라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을 이끈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여 이루어진 사건임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신학수업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일꾼 되려는 이들에게 그 성령의 역사가 끝까지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학의 길에 들어선 집사님께 따뜻한 격려와 용기를 불어넣기 보다는 투박한 언어로 거칠게 글을 써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집사님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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