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욥 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막 9:2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이 세 구절은 7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 성장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성서의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이 말씀을 듣고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재기의 의욕을 불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는 이러한 의욕의 무진장한 공급처였으며 그로써 한국사회의 발전을 보다 힘있게 지원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우리 나라가 겪은 가난과 열등감과 목표 상실의 현실에서 풍요와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슬로건처럼 이 세 구절은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이해는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힘겨운 현실을 돌파할 수있도록 하는 '축복의 언어'로 신앙인들을 사로잡아왔다.  

경제 성장과 교회 성장의 맞물림

코딱지만한 구멍가게 규모로 시작한 사업이 이후에 번성하는 기업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심사는, 그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비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아무래도 자신이 없을 듯한 상황이지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니 자신감을 한번 더 발휘해보는 시도를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무얼 못하겠나 싶은 대단한 용기가 나오는 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들 말씀들은 좌절의 벽을 뚫고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거의 주술적(呪術的) 영향력을 행사하기조차 했다.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이로 인한 성공에의 열망은 보다 나은 계층으로 이동하기를 갈구하는 신앙인들에게 성서에 이같은 구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사했고, 자기를 드러내기를 꺼리는 유교적 전통이나 세속적 성공과 노력에 관심이 없는 불교문화적 환경이 줄 수 없는 도전적 능력을 이 말씀 속에서 길어올렸다. 그러기에 과거 기독교인하면 어딘가 자신없이 겸손하기만 하고 자기를 낮추면서 '제가 뭘요' 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자신감이 넘치고 무슨 일에든 선뜻 나서기를 서슴치 않는 유형으로 바뀌어왔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다그쳤던 경제개발정책에서 요구되었던 인간유형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고, 우린 한다면 한다는 식의 저돌적인 집행력을 갖춘 인간군이 요구되고 있던 상황에서 기독교는 그에 필요한 인간형의 성품적 기초를 마련해주고 있던 셈이었다. 한국경제의 성장과정과 한국교회의 성장과정이 서로 합치되는 상황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무형적 연관성이 존재했다. 그것은 성공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되고 풍요와 일신의 영달이 축복을 받는 시스템이 마련되는 것을 의미했다.

허허벌판의 한국경제에 공장과 도시가 세워지고, 게으르기 짝이 없다고 스스로 한탄했던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민족 가운데 하나로 치켜지며 도대체가 한국 사람이 못하는게 있을까 싶게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이들 성서의 구절대로 현실이 움직여지는 듯했다. 그래서 교회는 그와 같은 현실에서 성공을 보장해주는 축복의 지침을 내리는 현장처럼 되었고, 세속적 성공을 위한 믿음의 징표는 말씀 안에서 능력을 얻고 그 능력대로 최대의 성과를 목표로 하는 '적극적 인생관'으로 집약되었다.    

긍정적 사고에 대한 담론이 이 시기에 지배하기 시작한 것도 다 이러한 연유와 관련이 있다.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사고방식이 스스로의 인생을 보다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길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것은 세속적 현실에서의 능력과 관련이 있었고, 그로 해서 '성공'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가 되었다. 낙오는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으며, 따라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서 능력을 얻어 현실에서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의 정도와 내용이 높고 풍족할수록 축복을 많이 받은 존재로 인정되는 인식체계를 한국교회 안에 자라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목회자는 '허가받은 축복의 배급자'처럼 되는 그 위치가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특권적 위계질서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적 위계질서는 정치경제적인 특권과 연결되면서 한국교회를 기득권 세력화했으며, 그 기득권의 방어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져왔던 것이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가 요구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를 강화시켜왔으며, 이로써 이러한 체제가 추구하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온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인가,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로써 성공주의의 윤리적 기초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와 의'라는 대전제는 이러한 성공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 자리가 없었으며, 오로지 세속적 능력과 위치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으면 그로써 축복이 확인되는 시스템이 가동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의 근본정신은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무너질 것을 보고, 패배하는 듯 하나 위대한 시작을 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그 중심이 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섭리의 핵심이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목격했지만 신앙은 거기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의를 위한 헌신은 그 무엇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은 전혀 다른 평가 속에 놓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몰락과 패배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접붙여진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광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고 그로써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간과 사회가 병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적 타락과 경제적 붕괴 속에서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다.

빌닷의 충고가 축복의 메시지로 변질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그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한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욥의 탄식에 대한 위로와 신앙적 충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의롭게만 살아온 그가 갑자기 당한 고생을 보고 그의 친구는 '네가 의롭고 깨끗하기만 한다면야 무슨 걱정인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는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지금 보기에 보잘 것 없이 여겨져도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바로 서리라'하는 격려였다.

그러나 욥은 빌닷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매우 전격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의롭다 의롭지 않다는 내 자신의 입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소관이지 어찌 내가 의로우니 그런 축복을 내려주시라고 요청하며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이었다. 시작의 미미함이 결과의 미미함으로까지 가지 않는다는 빌닷의 격려 속에 담긴 무의식적인 전제, 즉 그런 축복을 마땅히 여기게 될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성서적 충격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면'이라는 질문이 풀려야 한다는 점이다. 온갖 술수와 음모와 비리, 그리고 아부로 낮은 처지에 있다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에게는 이러한 말씀의 성서적 적용은 불가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 그 높은 자리가 바로 죄의 증거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는 세상이 보기에는 자못 미미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 의로움의 열매는 인간의 헤아림을 넘는다'라고 이 대목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의로움 대신에 인간의 성취를 그 중심에 놓고 은유적으로 차용했으니 이는 성서의 근본정신에 대한 파괴이다. 욥은 빌닷의 하나님 이해를 수용하면서도, 그 미미함과 창대함의 과정은 인간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것임을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면 도리어 인간의 처지는 겉보기에는 몰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몰락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정녕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믿음의 능력은 욕망의 도구가 아니다

마가복음의 본문은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에게 부탁하면서 '하실 수 있으시다면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말에 대한 대응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나이의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하고 반문하신다. 그리고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나이가 예수에게 한 말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호소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문제의 해결은 사나이 자신의 믿음과 직결되어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예수의 능력에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것은 전제되어 있고 이를 확고히 믿고 그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이 아버지에 더욱 달려 있다는 논리이다. 이때의 상황은 제자들이 아이를 치유하기보다는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로써 정작의 치유대상인 아이는 관심권 밖에 방치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모두의 관심을 이 아이 자체에 집중시킨다. 논쟁의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귀신을 내어쫓고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지금 결정적인 과제라는 것을 환기시키신 것이었다.  

그 일은 실로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처럼 보인다. 누군가 능력있는 존재가 와서 해결해주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저 참고 기다리든지 아니면 그 해법을 놓고 갑론을박하든지 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일의 해결이 모두에게 가능할 수 있음을 일깨우신다. 이후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그러지 못했는가 하고 묻자 기도로 능력을 입지 않으면 하고 그 방도를 가르치셨다.  

무슨 이야기인가? 믿음의 능력이란 우선 이 아이의 생명에 대한 간절한 심정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기원으로 강렬하게 집약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결합되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은 '앗! 뜨거라' 하고 줄행랑을 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것이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가? 성공한 이들은 대체로 이렇게 귀신들려 고난을 받고 있는 아이의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 생명이 이들의 중대한 관심도 아니며, 그에 쓸 시간도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난이 어떤 병을 일으켜 이들에게 삶의 좌절과 고통을 주는지 알 바가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의 기도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우선 그런 기도가 그들의 삶에 중심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귀신들려 가련하게 된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시지 않을 것이다. 나의 믿음과 간구가 그 생명에 집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생명을 구해내실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이다. 윤리적 정당성도 없는 일, 도리어 이웃에게 귀신들리게 하는 일들을 믿음이 주는 능력이라고 앞세워 자신의 탐욕을 채우며 야망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들을 벌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작업인 것이다.  

'믿는 자에게'라는 말씀은 지금 생명이 고난을 받고 있는 존재에게 대한 일차적인 관심이 쏟아부어지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다. 제자들처럼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앞서는 이들은 '믿는 자'라는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교회는 우리 사회에 바로 이 고난받는 생명을 중심주제로 삼아나가도록 하는 일깨우기가 전제된 상황에서 이 말씀이 주어져야 함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 사회가 겪는 온갖 문제들이 하나씩 제대로 풀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의욕, 용기, 재기, 이런 단어들과 이런 현상들이 이 생명에 대한 깊은 사랑과 상처받은 생명의 치유에 대한 열정과 관련이 없으면 그것은 개인적 욕망의 달성일 뿐이며 신앙은 이를 도우는 협력자로 전락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그런 죄를 저지른 과거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는 순교적 헌신의 고백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한 바는 어떤 의미였는가? 이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그 옥고를 사도 바울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빌립보서는 증언해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일에 쓰이는 사건이라면 그 어떤 것도 달게 받아 즐거워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귀한 일이라고 4장 14절에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함은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고난의 한계에조차도 자신은 무너지지 않는다 라는 감격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자신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편지의 진상이 이러할 진데, 한국교회는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이루어내고 만다는'식의 성공주의적 모델에 매달려왔다. 고난은 피하고, 갈채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는 머리박고 다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이다. 그 어떤 위협과 그 어떤 불리함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라면 나의 처지가 어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게 치루겠다는 순교자적 헌신의 고백, 그 결정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에 과연 이런 모습으로 현실의 권세가 휘두르는 폭력과 불의에 맞서는 순교자가 얼마나 되었는가? 아니, 순교자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선하고 의로웠으며 아무 문제가 없었던가? 바울의 옥중서신이 담고 있는 이 신앙적 비장함과 그 놀라운 기쁨의 고백은 나의 개인적 고통을 대가로 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가고 있음에 대한 간증임을 주목할 때 비로소 그 진의(眞意)가 드러난다. 이 성서의 진면목에 대한 설교가 부재한 교회에서 자라나는 것은 자신의 불의에 대한 성서적 합리화일 뿐이다. 성서에 대한 이와 같은 간교한 유린은 실로 이제부터라도 중단되어야 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