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사의
사명이요 목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요즈음 저는, 우리 이름으로는 박노자, 원래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의 귀화 러시아 청년이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30을 갓 넘은 젊은이가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보면서 느꼈던 바를, 매우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가지고 쓴 책입니다.

그가 한번은,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몽골 출신 지식인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인종차별적 태도가 가지고 있는 야만성을 고발한 글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가운데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분들이, 다른 소수민족 내지는 중국 동포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또는 인간차별적 자세가 심각하다는 점이 마음에 겹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왜 이토록 빈곤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박노자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살펴보면, 그는 한때 구 소련 시절 레닌 그라드라고 불리웠던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상트 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 우리 식으로 하면 "성 베드로 대학" 동방학부 한국사학과 출신으로 후에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의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지금은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부 교수로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로 하나 말씀드리자면, 그의 논문에 나오는 562년이라는 연대는 가야가 멸망한 해입니다. 그는 가야연맹의 후기역사를 주제로 연구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는 까닭은 그의 글이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는 매력이 있기도 했지만,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오늘날 우리 자신도 제대로 관심도 갖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가기 일쑤인 5-6세기 가야 시대의 역사를 파고들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의 먼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그 본류에 흐르고 있는 한국인들의 심성과 의식을 캐내어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동토(凍土) 러시아에서 온 한 푸른 눈의 청년이 아득히 먼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와서, 1천 5백년 전 그 나라의 고대사가 남긴 흔적을 하나 하나 들추어 나가는 과정은 마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의식 저 편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 자신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는가 돌이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김수로왕이니 악사 우륵의 가야금이니 가락공주니 하는 수준의 이해와 지식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있는가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따지고 들면, 가야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만큼 일제시대 식민지 사관에 의해 왜곡된 분야도 없다는 것을 역사를 조금이나마 공부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고대 일본이 가야에 자신의 식민지를 세워 경영했다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군국주의 일제식민통치자들은 "본래 열등한 너희 조선 놈들은 그 아득한 옛날에도 우리 발 밑에 있었고 그런 역사의 흐름이 바뀐 법이 없어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를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정립하고 읽어내는 문제는 우리 민족의 자기발견이라는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삼스레 가야사(伽倻史) 공부를 기초부터 다시 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김해를 중심으로 지금의 경상남도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세워졌던 일종의 부족연명체적 수준의 나라 내지 지금의 눈으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촌장정도가 있었던 옛날 마을에 대한 역사를 알지 못한다고 지금 무슨 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 나이에 무슨 중간고사를 볼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뇌리에 가야시대의 삶이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가야의 이야기는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생각 이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작고 미약하고 별로 큰 자취를 남기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은 것에 대한 일관된 멸시와 통합니다. 이것은 억측이나 무리한 주장이 아닙니다. 가야가 크고 강성한 국가를 세웠다 하면, 아마도 우리의 관심은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고구려가 한때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느니 중국 대륙의 반을 집어삼켰느니 하면서 아직도 야단법석인 것을 보면 그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큰 것에 대한 숭상의 심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것이 휘두르는 폭력과 힘은 큰 것의 당연한 권리인양 생각합니다. 작은 자들의 희생이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이 한번 이렇게 기울어버리면, 작은 것 안에 담겨 있는 그 나름의 일체의 귀중한 가치들은 모두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입니다. 작은 나라, 약한 국가의 사람들이 무슨 꿈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 이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는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한국에서, 파키스탄 출신의 노동자들이 개 취급당하고 짓밟히는 이야기를 심심치않게 듣게 됩니다. 이곳에서 히스패닉계 노동자는 그가 나이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우리 동포들에게 야, 자 소리 들으면서 제대로 정중하게 사람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으면, 그리고 피부색이 까무잡잡하면 깔봐도 되는 것으로 아예 머리속 깊이 습관이 들어 있습니다. 작고 약한 것은 인권이 처음부터 없고, 그 목숨 값도 지배인종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일부 언론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이면에 아이들을 포함한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생죽음을 당했는지 하나하나 폭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폭격으로 한 마을이 그대로 무덤이 되어버린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도대체 테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가슴을 치며 비통해하는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여전히 소수입니다. 사극을 봐도 온통 서로 집어삼키는 이야기들뿐입니다. 아름다운 꿈을 나누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라의 크기가 작다해도 어떤 행복을 추구하려 했을까, 사람의 가치를 어디에 두었을까 하는 상상력은 아예 발휘되지 못합니다. 강자, 대국, 잘 나가는 집단과 사람에 대한 열등감 어린 선망만이 앞서다보니 한국에서는 기가 차게도 영어 발음 교정하겠다고 혀를 잡아 빼는 수술하는 부모가 생겨나고, 이름 있다 하는 이른바 지도자들은 죄다 자기가 미국이나 영국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내가 한국의 클린턴이예요, 그랬다가 클린턴이 인기가 시들해지니까 내가 한국의 토니 블레어예요 했다가 요새는 내가 지사 출신이예요, 보세요 미국도 지사가 다 대통령 해먹잖아요, 저 예쁘게 봐주세요, 아니면 대통령은 최고 경영자적 자질을 가진, 말하자면 CEO적 인물이 해야지요, 선진국은 다 그렇습네다, 참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지만 소중한 것, 초라한 듯 하지만 의미 있는 것, 약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 진실한 힘이 있는 것에 대해 눈이 감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세를 앞세우는 강자만 추종합니다. 강자가 아니다 싶으면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합니다. 자기가 따르려는 자가 정말 선한 강자인지, 아니면 포악한 강자인지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 강자를 본받아 사는 것이 장땡인줄로 압니다.

강한 자 앞에서 비굴하게 굽신거리고 약한 자에게는 군림의 오만을 부립니다. 겉보기에 대단한 것 같지만 인간 사회에 진정 덕이 되고 축복이 되는 이와, 그 반대로 화려하지 않으나 그의 존재와 삶이 인간에게 사표가 되고 일깨움이 되며 감사가 되는 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자기 일신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는 야망을 지닌 자의 탐욕적인 부지런함과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살려는 꿈을 가진 이의 자기 헌신적 열정을 판별하지 못합니다.

수와 양의 기준에 좌우되어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따르면 그것이 승리의 주도권을 쥔 것인 줄 압니다. 그것을 좌우하는 이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그 안에 진정 있어야 할 정신적 성숙과 의로운 행위와 이타적 자기 나눔의 모습이 보다 귀중한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덕목들이 우리에게 자랑이 되고 자신감이 되며 능력이 되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돌 베개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사건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형의 약점을 노리고 술수를 써 가문의 상속자가 되려하다가 들통이 나게 됩니다. 그러자 목숨을 부지하느라고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도망 나오게 되는데, 어느 이름 모를 들판의 한 곳에서 졸지에 방랑객처럼 하루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켜주심을 계시 받는 놀라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자기 꾀에만 의지해서 살아왔던 그에게 이 꿈은 지금까지의 이기적이고 얄팍한 수를 앞세웠던 인생관과 탐욕적인 삶의 자세를 바꾸게 하는 중대한 계기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면 그것이 지금 아무 것도 아닌 듯 해도 실로 귀중한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이 없는 것이면 그것이 지금 당장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님을 깨우쳤던 것입니다. 눈이 바뀌고 생각이 변하고 사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 꿈을 꾸고 나서 이렇게 놀라워합니다. "주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황량한 들판에 그 무슨 하나님의 사건이 있겠나 싶었는데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는 감격에 겨워 그 이름 모를 들판을 가리켜 "아, 이곳이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비록 고난의 여정을 걷는 자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은 행복해졌습니다. 그의 처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무력한 듯 했으나 그의 내면은 더할 나위 없이 강성하고 자신감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안전한 곳에서 불확실한 곳으로 던져진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길을 가게 되었음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는 상황에 좌우되는 자가 아니라, 그 상황의 중심에서 그 상황 자체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는 자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자신이 밤사이에 베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눈여겨보며 생각해봐야 할 바는 사람이 머리를 베고 잘 만한 돌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으며, 그렇게 기둥으로 세운다 한들 제대로 눈에나 띄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서의 표현대로라면, 그가 "돌 하나를 주워 베개를 삼았다"라고 되어 있으니, 그것은 남자 성인 하나가 두 팔로 번쩍 들어야 하거나 또는 용을 쓰면서 겨우 옮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저 손으로 줏을 만한 크기의 돌일 뿐입니다. 그냥 하룻밤 들판에서 지내는데 그 무슨 대단한 돌이 필요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집에 쓸 기둥에 걸맞게 조각품처럼 깍은 섬세한 것이기나 하겠습니까?

그가 자신이 하늘의 계시를 받은 곳을 기념하고 이후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는 경우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해도 그 세운 돌 베개의 기둥이 과연 한 눈에 알아볼 만한 표석(標石)이 되겠는가 의문 또한 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걸 가지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떡 하니 이름을 붙이다니 어디 될 법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우스광스럽기조차 하지만, 그러나 야곱은 참으로 당당하고 기쁘게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은 혹 그 돌을 보고 비웃을지 모를 일이며, 멸시하고 짓밟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시시하게 여기고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돌의 모양새가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보다 관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써 그의 존재 내면에 움터 오르는 새로운 꿈과 열정, 그리고 희망과 소신으로, 이 광야의 한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집의 기둥으로 삼아도 전혀 거리낄 것 없으며 하등 꿀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는 이제 작은 것, 약한 것,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 대한 멸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큰 것, 대단해 보이는 것, 강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신이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강자에게 압도되고 약자 앞에서 군림하려는 생각이 그의 인생을 이끌고 갈 수 없습니다. 하찮은 듯 한 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건을 깨우치며, 굉장한 것 같지만 속 빈 허무를 그는 이제 꿰뚫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자를 깔보지 아니하며 있는 자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겪어도 이제 그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그의 삶이 지혜로 채워지는 까닭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려보게 되었으며 진정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 또한 무엇이며 진실로 기뻐할 일이 무엇인지 깨우쳐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우리 교회가 그런 깨우침으로, 그런 믿음으로 때로 보잘것 없어 보이는 듯한 돌 베개일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집으로 선포하고 당당히 자랑스러워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고 기원합니다. 수와 크기가 주는 힘도 물론 분명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 자신의 성숙한 변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누군가 단 한 시간 잠시 발길이 머무는 곳이 된다해도 그 시간이 그의 평생에 귀중한 음성으로 울리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으면 합니다. 그래도 그것이 충분히 감사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 진실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기성찰의 능력이 진지하게 자라나고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고 그 존중의 마음이 길러지는 현장으로서 이 공동체에 속한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장에 무슨 큰 위력이 있지 아니하다 해도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양심을 지키고 의로움을 선택하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일 자체에서 축복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작은 것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사의 사명이요 목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있기에 이 시대에 감사와 희망이 존재하고, 하고 싶은 기도를 마음껏 할 수 있으며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그런 곳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듯 한 돌 베개 하나일지라도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집이 되는 그런 놀라운 감격이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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