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의 부활 기록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실증적인 역사적 시간으로 증명할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교회의 탄생이 증명합니다.

교회는 오순절 날 예수의 제자 120명이 성령을 받는 데서 시작합니다. 언제 뒷덜미를 잡힐지 몰라서 숯불에 올라앉은 새처럼 오들오들 떨던 제자들,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숨죽이던 것들, 그 가운데는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던 겁쟁이 베드로도 있습니다. 몇몇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뿔뿔이 "걸음아 나 살려라"며 도망쳤습니다. 그 겁쟁이들이 하루아침 잠갔던 문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는 죽지 않고 살았다"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 아닙니까. 이것이 실증적인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교회의 시작 아닙니까. 그러면 겁을 집어먹고 숨죽이고 숨던 때와, 문을 박차고 나와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교회가 탄생한 때, 이 두 시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겁쟁이들을 확신에 찬 사람들로, 죽음을 향해서 몸을 내대고 소신을 외치는 사람들로 만든 사건은 무엇인가.

성서는 그것을 예수의 부활과 성령강림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둘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그들 몸 밖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부활이 그들 속에서도 부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신 예수의 뜨거운 마음으로 뜨겁게 살아가는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이란 바로 예수의 뜨거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시 사신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죽었던 제자들, 죽었던 갈릴리 어중이떠중이 민중이 예수의 뜨거운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데서 교회가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부활이 민중의 부활이 되는 데서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뜨거운 마음, 뜨거운 가슴, 뜨거운 정의감, 뜨거운 사랑으로 다시 살아난 민중입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난 민중이요, 민중으로 다시 살아난 예수인 겁니다.

별 볼일 없는 갈릴리 어중이떠중이, 힘없는 사회의 밑바닥 천덕구니들이 대로마 제국 속으로 누룩처럼 무섭게 퍼져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바로 그런 비밀이 있습니다. 로마의 땅굴 속에서 나와 그 속에서 살다가 그 속에서 죽어 간 기독교 초기 3백년의 역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로마 군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이유 때문에 처형 당한 수많은 젊은이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리고 거지 옷차림 한 벌로 새 인생길에 들어선 많은 귀족 부인들, 마침내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에게 찢기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뜨거운 마음, 뜨거운 가슴, 뜨거운 정의감, 뜨거운 사랑으로 다시 살아난 예수의 몸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뜨거운 마음이 민중의 아픔, 민중의 절망과 허무 속에 한없는 슬픔으로 현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뜨거운 마음에서 솟아나는, 그 깊은 슬픔에서 나오는 한숨 소리를 비단 고난 받는 민중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자식들에게 짓밟혀 신음하는 삼라만상에서도 들었던 것입니다.(롬 8:22~23)

예수의 부활이 민중의 부활이라면, 예수의 죽음도 민중의 죽음입니다. 그의 아픔, 그의 절망, 그의 한숨, 그의 눈물, 그의 외로움, 그의 허무 이 모두가 민중의 것입니다.

육군 교도소에 있을 때 일입니다. 저는 밥을 먹으면서 농민들의 피땀으로 영근 쌀 한톨 한톨 씹으면서, 가난하고 억울한 농민들의 애타는 염원을 씹어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민들의 피가 툭툭 터지는, 그들의 쌀을 씹어 먹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 되면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몸이 됩니다. 그들의 이루어지지 않은 애타는 염원으로 사무친 그들의 몸이 됩니다. 그런 몸은 그들의 염원을 배신할 수 없지요. 우리는 이 몸으로 그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살 속, 뼈 속에서 사무치는 농민들의 염원을 삽니다.

예수도 그런 몸으로 산 것이 아닐까요. 이 몸이 나의 몸이 아니듯 예수의 몸도 예수의 몸이 아니었죠. 농민들의 것이지요. 민중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찬을 받을 때 우리가 예수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농민들의 몸을 먹고 농민들의 피를 마신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눌려 소외되고 고난 받은 민중과 몸으로 일체한다는 말입니다. 매 끼니가 성찬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란 단순히 우리 개인의 구원의 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온 몸으로 민중의 아픔과 허무와 절망,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민중의 염원을 사는 일이 되는 거죠.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는 민중 속에서 민중의 아픔을 살았습니다. 눈물을, 한숨을, 배고픔을, 외로움을, 억눌림을, 절망을, 허무를 몸으로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슬픔으로 예수의 몸속에서 살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몸부림치신 예수의 절망은 바로 민중의 절망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십자가의 절망은 바로 민중의 절망입니다. 예수에게 걸었던 민중의 마지막 희망, 그 피어린 기대가 예수의 죽음과 함께 박살나는 걸 보면서 민중은 "하느님은 이제 우리를 영영 버리셨구나"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절망적인 민중의 외침이 예수의 입에서 예수의 절망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그는 한없는 슬픔으로 절망하며 떠나가는 민중과 같이 절망하며 뒤쫓아 가는 임마누엘이 되었습니다. 이런 죽음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슬픔과 슬픔의 만남으로 절망을 폭발시키며, 새로운 인정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죽음이 되었습니다. 잠자는 새벽을 깨우는 목소리, 민중의 한밤중에 불쑥 동트는 새벽이 된 것입니다. 어둡기만 한 민중의 역사의 지평을 밝히는 새벽이 되었습니다.

문익환 목사, 1983년 EYC 부활절 예배 설교 "부활 이전을 산다' 중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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