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재 교수 ⓒ뉴스앤조이 김승범
교회교육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2002년의 교육 기획은 우선 신학대학에서 기독교 교육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해보는 자리를 만든다. 첫 순서는 우리 교육계에 '대안학교'의 가능성과 가치들을 소개해온 감리교신학대 송순재 교수에게서 '대안적 기독교 교육'의 내용과 전망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

송 선생님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기독교 교육학계에 '대안적 기독교 교육'이라는 담론을 내놓은 분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개념인가?

기존의 지배적인 기독교 교육의 틀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기독교 교육사를 살펴보면 결코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다만 서구 기독교 교육적 학문 영역에 있어서도 그런 시도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런 시도는 지난 역사적 노력들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교회교육의 현실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현재 교회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성서 학습과 그 전승에 충실하도록 요구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CCM이나 워십 댄싱(Worship Dancing) 등이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보수적인 성서관에 입각한 성서 학습과 예술 활동이 한데 결합해서 청소년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적 삶을 배려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인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을 체화시켜 내거나, 개인의 발달 또는 직업 생활을 돕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교회교육이 학교와 가정에까지 연관시켜 나가는 노력 또한 거의 미비한 주제다.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CCM이나 워십댄싱 등이 가미된 집회 형식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청소년 사역은 이런 '경배와 찬양'이라는 모임 형식 위에서 비로소 접근이 가능하다는 얘긴데 선생님은 이런 현상을 염려하는 듯하다. 그런가?

현재 청소년들이 열광하고 있는 워십 댄싱이나 CCM은 내가 볼 때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을 수 있다. 순종이 강조되고 상의하달 식의 의사소통 구조를 요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 개개인의 의사나 결정능력 및 참여를 가로막는 요소가 엿보인다. 여기서는 참여해서 발표하기보다는 주로 설교 위주여서 더 이상 사고하지 못하게 만들고 매우 주입식이다. 또 내용이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어서 현실에 대한 관점을 형성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이원적 의식을 갖게 만든다. 특히 이런 문화는 미국에서 형성된 선교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어 한국 교회가 토착적인 뿌리를 내리기보다 오히려 미국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기독교는 우리 토양에 맞게 체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 교회의 한 부분에 불과한 문화가 한국 교회의 주도적 흐름이 된다면 기독교 본래의 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령 카톨릭의 사제론에 동감하지 않지만 카톨릭이 보존하고 있는 교회의 훌륭한 전통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 잘 생각해 보라, 이런 문화가 지속될 경우 우리 영성이 과연 얼마나 발전할 것인가? 나는 회의적으로 본다.

'영성'의 의미에 대해 오해하는 이들의 경우 이해가 쉽지 않을 텐데, 영성의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뉴스앤조이 김승범
영성이란 곧 체질화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주제를 삶 속에서 곱씹어 구체적 사안으로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기쁨을 느끼며 그것으로 사는 것, 이것이 곧 삶의 영성이다. 그렇게 볼 때 지금의 교회교육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우리 공동체의 중요한 현안인 남북 문제를 풀 수 있는 거시적 전망을 내놓을 수 있는지, 또 세계화의 현상 속에서 희생되고 있는 약자들을 위해 호소력 있는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지, 질문해 봐야 한다.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어디서 하나의 이즘(-ism)이 들어오면 그것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해 왔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그렇고, 유학 역시 이 땅에서는 교조적인 형태로 성장했다. 그리고 기독교 역시 이상하게 변질되어서 모든 것을 양자택일 식으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개교회주의와 선교지상주의로 치우쳤으며, 교육 현장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교회교육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현재 교회 학교의 중요한 문화인 CCM과 워십 댄싱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다. 계속해서 지적되어야 할 교회교육의 일그러진 현상들을 정리한다면?

가령 학습 방법이 획일적이다. 이는 행정구조 자체가 담임목사에 집중돼 있다. 또 예배의 구조는 어른 중심이어서 어린이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여성의 참여율이 적고, 지역이나 사회에 대한 참여 역시 미흡하다. 문명 충돌과 전환기적 성격이 나타남으로써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고, 약자들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데 교회교육은 여전히 어떠한 긍정적인 응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신학자는 물론 윤리학자들까지 가세해 이런 부분에까지 치고 들어가서는 기독교적 해석을 통해 실천에 이르고 있다.

(현 교회교육의 문제점과 관련해서는 송순재 교수가 <신학과 세계> 2000년 봄호에 발표한 논문 '대안적 기독교 교육의 문제 제기와 단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주의. 학생들은 언어 구조에 집중된 예배 설교와 성경공부 시간이 만들어내는 주기(주일설교, 분반성경공부, 설교 중심의 부흥회식 수련회 등)에 끊임없이 이끌리고 있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지적 구조는 한편은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또 한편으로는 전인적 종교 체험과 발달 가능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저해한다.

둘째 사제 관계는 종종 일방적이어서 학생들의 능동성이 살아 있는 주체적 참여를 배제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들의 독특한 인간적 존재 방식으로 이해되고 고려되기보다 교회 전체에서 주변화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유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다.

셋째 교회 전체에서 교육은 여전히 아동부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회학교적 문제로 다루어지는데 그치고, 모든 연령층 특히 여성이나 노인을 두루 고려하는 방식은 여전히 상당수 교회에서 답보 상태를 넘지 못하고 있다. 좀더 크게 보아 교육이라는 사안 역시 교회 전체에서 주변화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넷째 교회교육은 지역에서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의 현장과 괴리 상태에 놓여 있다….

다섯째 그나마 농어촌 지역의 교육 문제는 도시 지역에 비해 여러 면에서 현저히 뒤떨어져 있는 상태이고 많은 경우 아주 오래된 틀, 말하자면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은 교사의 일방적 수업방식 구조에 묶여 있다.

여섯째 기독교 교육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 토착적 내용과 구조는 아직 본격적인 주제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기독교 교육의 사상과 개념을 우리 정서와 사상에 걸맞은 개념으로 이를테면 이(理)와 기(氣) 내지 수신(修身), 자연이나 무위(無爲) 같은 개념으로 풀어낼 수는 없는가? 예배와 시도의 형식이나 기독교적인 삶의 형식을 우리의 가락과 생활 예법에 맞도록 발전시킬 수 없는가 하는 문제는 이론적으로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주제이며, 현장은 말할 것도 없다….

일곱째 세계는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와 또는 다원론적 문화와 종교 시대에 급속히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현장은 상당 부분 이러한 주제에 둔감하다. 현재의 경제적 세계화 과정에 기독교 신앙은 무어라고 응답할 것인가?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에 대해 교회는 어떠한 사회적 참여를 나타낼 것인가? …현장은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세 종교재판 식의 배타적인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현실은 대안을 요청한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그렇다면 이런 문제점들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이란 어떤 것인가?

통전적 교육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만물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도 교회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이들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개인의 삶 역시 교회 가정 학교 지역사회 더 나아가 자연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관돼 있다. 이 연관성 때문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곧 가정에서 어머니들이 어떻게 신앙교사가 될 수 있는가, 지역에서 어떤 기관이나 회원들이 유능한 교사로 교회에 들어와서 가르칠 수 있느냐, 또 자연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나타난 신성과 만나는 기회를 줄 수는 없는가, 또 타문화와의 교류 속에서 이런 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가정이 공동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정에서 이렇다 할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부모가 종교적인 삶을 체화해내고 아이들은 또 그 안에서 종교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며 나아가 교회의 장으로 확장시켜야 하며 학교와 지역 사회와도 관련돼야 한다.

그렇다면 통전적 교육을 위한 준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그런 접근 방식이 많은 교사들에게 낯선 방식인데.

그것은 기독교 교육이 어떻게 학생들이 접하는 일반 교과목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가 전문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을 엮어서 하나의 교사진을 구성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이들을 통해 통전적인 교육을 위한 교과목을 만들 수는 없을까? 가령 물에 대해 접근할 때 화학에서는 분자식으로 표현되지만 국어에선 아름다운 시로 나타나고 종교에서는 요단강과 세례의 물로, 또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물로 비쳐진다. 이런 다양한 물의 모습을 한데 엮는 작업인데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통전적인 수업 구조로 전환했을 때 우리는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또는 예술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나는지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예술이 발휘하는 힘을 교회가 교육 과정에서 대부분 놓치고 있다. 가령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음악회나 미술 전람회를 다녀와서 교사와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간단하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1년 동안 쌓으면 그것으로도 엄청난 양이 된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야만적인 이유 역시 예술에 대한 몰지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까지 정신 세계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술 감상의 능력도 없고 행위 역시 없다.

학교 교육과의 관련성 차원에서 교회가 수용해볼 만한 요소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뉴스앤조이>가 그동안 다뤄온 학교에 대한 대안들이 교회에서도 유용한 것이 많다. 바라기는 좀더 명상적이고 수도원적일 필요가 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적어도 설교를 절제하고 기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중요하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여준다든지 하면서 기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를 연습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고전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이에 무관심할 것이라 여기지만 적어도 낭만주의는 여전히 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랩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지만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 연주도 좋아하지 않는가? CCM에도 그런 감미로운 선율을 가진 곡들이 있다.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는 낯선 것과의 대면이 무척 필요하다. 때로는 강요도 필요하다. 교육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만 주는 게 아니다. 무턱대고 내버려두는 것을 자유교육이라 하지도 않는다. 그것으로 아이들을 얼마나 망치는지 모른다. 교사는 아이들이 해야 할 때에 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다. 싫은 것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은 너무 아이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됐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떠들거나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가차없이 야단친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이 울리면 압수도 한다. 기본적으로 예의를 갖추고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일부 교회들이 현 교회교육의 한계점을 돌파하기 위한 대안으로 작은 학교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어떻게 보는가?

아직까지 이것만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니 계속 시도해봐야 한다. 이런 시도들이 필요하다. 또 진보만이 옳은 것도 아니다. 진보나 보수나 모두 수용하고 배울 것이 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학교를 세우는 것 또한 보다 나은 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니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어떤 학교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학습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은 목회를 하지 않지만 만약 다시 송 선생님이 목회를 한다면 교회교육을 위해서 어떤 목회적 선택을 할 것인가?

협동목회 구조가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화된 여러 목회자들의 결합과 여기에 평신도들이 대거 발언권을 갖는 목회 공동체가 좋을 것이다. 물론 진정한 수평적 협력 구조가 가능한 협동목회를 의미한다. 평신도의 참여는 지역과의 연결을 위해 꼭 필요하다.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어린이도서관운동은 지역과의 훌륭한 연결 고리가 된다. 교회가 도서관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이 수시로 와서 책도 읽고 만남과 쉼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역과 결합돼야 할 것이다. 이런 개념은 도시나 농촌 모두 필요하지만 특히 농촌에선 절실하다. 물론 우리 문화가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정서 속에서 이뤄져 왔기 때문에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지금은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생활과 괴리되지 않는 영성을 많이 강조해 오셨는데.

나는 그것을 생활 신앙이라고 이야기한다. 만일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지식이 아니라 삶의 문제라면 곧 생활에서 녹아나야 한다. 일상이란 게 뭔가? 밥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쉬고 자고 하는 모든 과정 아닌가? 이 일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것, 곧 일상성에서 체화해내는 것이 바른 신앙 교육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1주일을 어떻게 지내고 내 몸으로 어떻게 신앙을 살아내느냐의 문제다. 노동을 통해서 또는 가사를 통해서 어떻게 신앙을 체화하고 체험할 것인가, 이런 것이 모두 신앙 교육에 관련된 것이다. 돈을 함부로 쓰고, 못도 하나 박지 못하는데 성경만 달달 외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밥도 하고 기술도 배워서 책상도 만들어 보고, 화초도 가꾸고 그러면서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나는가 배워야 한다.

주일이라는 시간, 교회라는 공간, 공과 교재라는 텍스트만 가지고서는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어머니가 중요하다. 서당 교육을 보면 자고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손님을 응접하고, 밥도 할 줄 알고, 친구와 놀 줄 알게 됐을 때 공부를 가르쳤다. 나는 그게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우리 교육이 그런 것은 하나도 안 가르치고 구원의 질서만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기 책임도 못하면서 원수는 사랑하는 꼴이다. 교인들이 어떻게 운전하는지 보라. 법을 위반하고 과속을 해댄다. 그게 자유교육이 아니다. 이런 교육을 위해서는 우선 수련회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가령 주말마다 교사가 아이들을 데리고 한두 달 정도만 데리고 지낸다면 거기서 가사도 가르치고, 김치도 만들고, 그러면서 잠자리 개는 것과 우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많이 배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체화해내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학원 보내야 하고, 학교에서 자율학습 하는 청소년들에게도 이런 교육이 가능할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투쟁해야 한다. 많이 가르친다고 공부 잘하는 것 아니다. 풀무학교를 봐라. 할 것 하면서 다 대학가지 않는가? 그리고 이런 잘못된 교육에 대해 학부모들이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주말엔 풀어주고, 주일은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것부터 물어야 한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은 교육문화 속에서는 극단적인 저항 방식이 필요하다. 아이들 조기 교육시키느라 병원에 실려 가도록 하는 교육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인가? 더욱이 교회까지 그런 흐름에 편승해 오히려 기도했더니 좋은 대학 갔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의식적·철학적으로 정리가 안돼 있다. 그래서 배우기는 많이 배우고, 성경공부에다 예배도 많이 드리지만 불신자가 아이들을 경쟁 논리로 괴롭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그대로 한다. 전도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을 체질화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거기에 전도를 얹어놓아야 한다. 전도만 하니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돌아간다. 공허한 사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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