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시작하는 이즈음이면 저마다의 가슴속에는 희망찬 꿈과 포부가 한두 가지씩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오십보 백보 비슷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뿌리를 따지자면 서로 양립하기 어려울 만큼 상충되기도 한다.

가슴속에 품은 꿈과 포부라고 해도 애당초 품어서는 안될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너무 힘들 듯하여 포기해 버렸지만 실은 자기를 던져서라도 지켜냈어야 할 꿈도 있을 수 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길은 멀고 날은 저물어….'

이 말은 중국 초나라 고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나라의 평왕에게는 오사란 충신이 있었는데 간신들이 참소하여 역적으로 내몰린다. 결국 큰아들 오상과 함께 처형되고 만다.

작은아들 오자서는 구사일생 화를 피해 이웃 나라인 오나라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때 자기 친구인 신포서에게 "두고 봐, 내가 이 놈의 나라를 뒤집어엎겠어"라고 결의를 밝힌다. 그러자 신포서는 "자네가 뒤엎는다면 나는 반드시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네"라고 대답한다.

오자서는 오나라를 부추겨 초나라를 치게 하고 평왕의 목숨도 빼앗아 복수에 성공한다. 그 정도로는 화가 덜 풀렸던지 평왕의 시체까지 험하게 손을 대 훼손시킨다. 한바탕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이때 자서의 친구 포서는 사람을 보내 이렇게 충고한다.

"인중자승천 천정역능파인(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유한이 무한을 넘어서면 안돼

사람의 기세가 일시적으로 하늘의 뜻을 누를 수는 있지만 시간이 흘러 하늘이 안정되면 결국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개인의 복수를 위해 이웃 나라를 끌어들여 조국을 짓밟게 하고, 사람들의 목숨을 모질게 빼앗는 것은 지금 네 힘이 세어 별 일 없어 보이지만 결국 하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였던 것이다. 여기에 오자서가 답을 보낸다.

"일모도원 오고도행이역시지(日暮塗遠 吾故倒行而逆施之)."
어쩌겠는가, 갈 길은 멀고 해는 벌써 저무니 내가 이치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일을 저질러 버렸네, 라고 말이다.

내가 꼭 이루고는 싶고 마땅한 기회를 기다리자니 내게 남은 시간은 벌써 끝이 보여 어쩔 수 없었네, 라는 변명 아닌 변명인 것이다. 물론 그 끝은 자기를 닮은 또 다른 사람에게 배신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이 비슷한 변명을 했겠고 '3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국을 바로 세워달라는 국민들의 바람을 외면하고 저마다 먼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설 때도 스스로에게 '알지만 어쩌겠어, 길은 멀고 날은 저무는데…'라고 변명을 늘어놨을 법하다.

물론 지금도 거기서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나 보다. 대선 출정식을 한다는 사람도 있고, 대통령을 지내고 난 뒤에도 막후에서 스스로 킹 메이커인 양 주변을 기웃거리니 말이다.

세상일은 시간의 관점에서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유한과 무한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당연히 무한 쪽일 것이고, 사람의 사적인 욕망은 유한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좁게 따져보아도 정치로 나라와 국민의 삶을 일구어 나가는 것은 무한의 영역에 속하지만, 상대적으로 파당을 이루어 권력을 다투는 것은 유한의 영역에 속한다. 사업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유한이지만 가족은 무한이다. 스포츠 경기가 유한이라면 무도(武道)를 통해 자기 완성의 길을 걷는다면 이는 무한이라 할 것이다.

유한의 일들은 이기고 지는가 하면 미래를 누가 지배하느냐와 관련 있고 적자생존이면서 어떻게 하면 빨리 끝장을 내나 궁리하게 된다. 반면에 무한의 일들은 승패가 무의미하고 미래의 풍요를 함께 꿈꾸고 나은 쪽이 모자라는 쪽을 감싸고 가르쳐 이끌기도 하며,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속시켜 나가느냐에 관심을 둔다.

인간 세상에서의 문제는 무한의 영역을 유한의 힘과 논리가 침범해 유린하거나 왜곡시키는 데서 말미암는다.

자서가 개인의 복수라는 명분을 내세워 나라와 백성의 삶과 미래를 짓밟은 것도 유한의 것을 무한의 위에다 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지구를 위협하는 환경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도 유한한 상업적 논리나 인간의 편리 추구가 무한한 자연의 순환과 생태를 파괴한 까닭이다. 유한이 무한의 법리에 따라 자기만의 영역을 지켜 벗어나지 않아야 세상이 편안한 것인데, 길이 멀고 날이 저물어 초조하다며 이치에 어긋난 일을 벌이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지게 마련이다.

물론 하늘이 다시 바로 잡지만 말이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도 따지고 보면 같은 모양새다. 평화는 무한의 영역인데 유한의 도구인 전쟁으로 평화를 성취하겠다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유한과 무한의 영역을 구분하는 일은 지구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일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일의 시작은 무한한 창조주에 대한 경외로 시작되었다. 또 인간이 오늘 먹어치울 식량을 참고 아껴 씨앗으로 뿌린 뒤 내일의 꿈으로 가꾸고 기르면서 인류의 생존 양식이 되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보라. 어떤 유한의 일이 있고 어떤 무한의 일이 있는지. 그들의 영역은 자기 자리와 이치를 맞게 지키고 있는지. 이 두 영역이 뒤죽박죽인 것은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와 그 계시를 가장 가까이 모시는 곳일 텐데 어찌 새벽기도까지 해도 이렇게 헷갈리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자기가 일하던 교회를 자기 가문의 영구한 재산이라고 우기며 세습한다. 그것을 놓고 찬반으로 나뉘어 토론도 벌이던데 이것이 토론감이 된다는 것은 헷갈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의 반증이 아닌가? 교회도 그렇지만 교회가 함께 세운 연합기관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몸담은 기관도 세 번째 연임하겠다는 사장을 말리느라 이사회가 열리면 노조원들이 그 자리를 몸으로 막고 울며 기도한다.

진리 위한 싸움에는 빠르고 바른 결단이 중요

이웃한 기독교서회 이사회는 이사회가 열리면 자기 편 아닌 사람이 사장으로 선임될까 봐 이사들 스스로가 기권표를 던진다고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무한의 영역인 하나님의 선교는 훼손되어간다. 무한의 영역을 지키려면 그 경계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결단이 필요하고 그 결단은 빠르고 분명해야 한다.

얼마나 빠르고 단호해야 하는지 마하트마 간디의 예를 들어보겠다. 막 출발한 기차에 급히 올라타던 간디가 슬리퍼 한 짝을 떨어뜨렸다. 간디는 망설이지 않고 나머지 한 짝을 벗어 슬리퍼가 떨어진 그곳을 향해 던졌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각각의 슬리퍼를 순간 유한의 영역에서 건져 무한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 결단이 3초만 늦었다고 친다면 슬리퍼는 몇십m 떨어진 곳에서 각각 쓰레기로 존재할 것이다.

한편 간디는 거대한 식민지배 권력과 싸우는 데 있어서는 천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을 바위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며 싸웠다. 진리를 위한 싸움은 그렇게 해야 하고 역사는 그런 결단들을 통해 바로 잡혀가는 것이리라 믿는다.

새해가 밝았지만 희망은 멀고 길은 험하다. <뉴스앤조이>를 통해 만나는 모든 분들의 힘차고 당당한 걸음을 기원한다.

이 글을 쓴 변상욱님은 CBS 편성국에서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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