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회심과 함께 시작됩니다. 회심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벗하여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극적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교회가 회심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습니다. 존 웨슬리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름만 기독교”(nominal Christian)인 오늘의 한국교회가 “참다운 기독교”(real Christian)로 거듭나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스스로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불쾌한 소리겠지만, 오늘의 한국교회 일반을 바라볼 때,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섬뜩한 비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바울조차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삶을 반복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아팠지만, 기도하는 심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제대로 돌아서길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라!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다는 것은 돌아섬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삶의 목적이 ‘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이기적 ‘야망’이 아닌, 거룩한 ‘복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넓고 편한 삶이 아닌,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 돌아섬은 우리 삶의 가장 위험한 도전이자, 가장 성스러운 모험입니다. 기존의 안정과 안락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서 고생하겠다’는 무모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이 결단 없이 한국교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향해 바로 지금 돌아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한 후, 예수 곁에서 함께 처형되었던 강도처럼, 그렇게 주님 곁에서 죽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교활한 정치이념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부패한 경제체제의 기만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오염된 세속문화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타락한 종교전통의 마수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병든 하늘과 땅의 대재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무너진 가정들을 벼랑 끝에서 구해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해체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기적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향해 돌아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고, 우리를 십자가로 초대하셨기 때문이며, 주님과 함께 지는 십자가가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만이 생명을 얻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겸손히 주님을 따를 때, 주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십자가를 통해 주님과 친밀해 지며, 십자가를 짊어질 때, 주님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소아시아로 돌아가 복음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제자들처럼 예수를 향해 돌아서서,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향해 돌아서서, 복음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에 의해 돌아서라
 
하나님에 의해 돌아선다는 말은 돌아섬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삶의 주체가 더 이상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기독교적 발언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의 고통을 보고, 하나님의 귀로 세상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의 아픔을 느끼며, 하나님의 손으로 세상의 상처를 만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내가 살지만 실제로는 내가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시는 것이며, 나를 통해 세상이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강력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의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기름으로 범벅이 된 바다 앞에서 절망하는 태안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하나님의 눈물 어린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벌써 수년째 농성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의 여린 몸부림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장에서 버린 폐수로 호숫가에 배를 뒤집고 둥둥 떠 있는 물고기들의 시체를 분노의 눈길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오체투지를 하며 사방으로 꽉 막힌 세상을 향해 침묵의 항의를 하고 있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진지한 눈빛으로 공감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귀로 세상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미국쇠고기 수입반대를 부르짖던 백성들의 분노에 찬 함성을 온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온몸에 멍이 들도록 얻어맞는 불쌍한 아이들의 비명을 찢어지는 가슴으로 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농촌의 적막한 고요에 숨죽이며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서로를 향해 쉼 없이 발사되는 기관총소리와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에 두 귀를 정직히 열어야 합니다. 12월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구세군의 종소리를 듣고, 마음과 주머니를 함께 열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의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이 겨울을 살아남아야 하는 노숙자들의 동상 걸린 마음을 시린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경제위기 상황에서 언제 구조조정 대상 통보를 받을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노동자들의 피 말리는 순간을 가슴 졸이며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의 무책임과 부모의 무분별 속에 유목민처럼 학원가를 떠도는 공부하는 기계들의 식어가는 심장을 안타까운 눈물 속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연기, 회색의 콘크리트 덩어리, 악취 나는 쓰레기, 치명적인 농약으로 뒤덮여서 숨조차 쉬지 못하며 죽아 가는 자연의 실낱같은 숨소리를 죄책감 속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손으로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져야 합니다. 정글보다 냉정한 입시경쟁에서 낙오된 젊은 영혼들의 상처 난 마음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지옥보다 무서운 시장의 논리 속에 밀려난 노동자들의 깨어진 은행통장을 아픈 눈물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교회의 타락한 현실에 낙담하여 오늘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불쌍한 신자들의 병든 영혼을 사랑의 기도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할 곳이 없어, 눈부신 청년의 계절을 춥고 어두운 터널처럼 통과하는 청년 실업자들의 무너진 미래를 희망의 말씀으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뽕나무에 올라 있던 삭개오를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 삭개오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꼈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착취했던 불쌍한 사람들의 삶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눈물, 그리고 한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탐욕에 뒤틀린 마음과 비열한 행동을 온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하나님에 의해 돌아설 때, 한국교회도 동일한 변화를 기적처럼 경험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여, 하나님과 함께 돌아서라!
 
하나님과 함께 돌아서는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일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소녀 앞에서도 예수를 부정했던 베드로가 성령세례를 받은 후, 수천 명의 군중들 앞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승천 후,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성령을 체험한 후, 전대미문의 경이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가 체포된 후, 살기 위해 예수를 버렸던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를 위해 기꺼이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이 변화되고, 초대교회가 탄생하며, 복음이 세계로 확장된 배후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회심과 부흥은 오직 성령에 의해 가능합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단호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돌아설 때, 한국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인력, 예산, 그리고 힘에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공룡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룡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아기공룡 둘리’가 아니라, 만인의 경계와 지탄의 대상인 ‘티아노사우로스’처럼 보입니다. 교회마다 첨단의 프로그램들이 시행되고, 전철과 거리마다 용감한 전도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며, 선교현장마다 헌신된 선교사들로 넘쳐나고, 동네마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가 밤하늘을 덮지만, 세상에서 예수, 복음, 구원, 십자가, 그리고 희생은 점점 더 아득하고 희미해져 갑니다. 사람이 예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이 복음일 수 없습니다. 힘이 구원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의 눈이 열려 진짜 예수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가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힘을 줄 때, 우리가 순교의 제단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돌아설 때, 한국교회는 이 땅에서 하늘의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귀신 들린 자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 땅에는 온갖 억압 하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가장 무서운 귀신들이 군대를 이루어 달려들고 있습니다. 자본귀신․성공귀신․제국귀신․전쟁귀신․시장귀신․권력귀신이 공중의 권세를 장악했습니다. 가장 혐오스런 질병들이 고도의 전술로 이 사회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몸을 죽이는 암, 마음을 죽이는 우울증, 정신을 죽이는 스트레스, 영혼을 죽이는 절망, 자연을 죽이는 오염, 세상을 죽이는 타락한 이념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천지에 가득합니다. 가장 고통스런 억압들이 칼날을 휘두르며 이 땅을 지옥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돈의 칼, 성의 칼, 힘의 칼, 신의 칼, 병의 칼 때문에,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모진 목숨들에게 이 땅은 이미 지옥입니다. 유일한 해법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고,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며,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늘의 기적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돌아설 때, 한국교회는 이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미 에덴의 동산은 세속의 도시로 퇴락했습니다. 세속도시의 신은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세속도시의 제왕은 다국적 기업의 CEO들입니다. 세속도시의 제사장은 ‘긍정의 힘’을 설교하는 종교인들입니다. 세속도시의 헌법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입니다. 세속도시의 시민은 자본과 전쟁의 메커니즘에 종속된 우리들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맹위 속에 세상은 맘몬을 자신의 신으로 선택했습니다. 맘몬의 충실한 사도들인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들은 성공적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맘몬의 성은을 입은 종교인들은 ‘긍정의 힘’이란 세속의 이데올로기를 신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했습니다. 맘몬이 권력을 장악한 세상에서 자본의 법칙은 세상을 통치하는 신성한 법전이 되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의 옛 터에 세속도시가 괴물처럼 들어섰습니다. 이 가인의 도시를 허물고, 그 터에 에덴을 재건하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비록 현재의 우리 상황이 참혹하고 암울할지라도, 여호와의 신이 우리에게 임한다면,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손처럼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한국교회여, 이제는 돌아서라!

배덕만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교수) dawkmah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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